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20
219
처음에는 날이 갠 줄 알았다.
비가 온 뒤로 온통 흐릿하던 시야에 간만에 해가 드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먹구름 뒤로 숨은 태양이 아니라는 건 그것과의 거리가 유난히 가깝다는 걸 깨달은 뒤였다.
태양으로 착각할 정도로 찬란한 빛은 광신도의 손끝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쥐어져 있었다.
“이것만큼은 꺼내고 싶지 않았는데…….”
단 일격으로 검은 방의 에녹을 튕겨낸 광신도가 침통한 낯으로 읊조렸다.
제 것처럼 빛을 쥔 광신도가 남자를 향해 그것을 겨누었다.
“아니…….”
세라는 그 빛을 아주 오랫동안,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건 뒤로 튕겨져 나온 검은 방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땅에 착지한 그는 자신을 쳐낸 빛을 마주 노려봤다.
허공을 그러쥔 광신도의 손아귀 안에는 찬란한 광명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부름에 응한 선명한 빛의 조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흐린 하늘 아래로 태양이 떠오른다.
그건 보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에 어린 빛만큼이나 투명하고 아름다운 여명이었다.
허락 없이 떠오른 태양을 경계하듯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성난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전처럼 지천을 뒤덮는 천둥은 없었다.
빛에 닿은 모든 것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빛으로 만든 물결처럼 살랑이는 빛무리가 공간을 어루만졌다.
성난 하늘도. 먹구름도, 거센 비바람, 사납게 으르렁 대던 땅도 그 손길에 분노를 빼앗긴 듯 잠잠해져 갔다.
찰랑찰랑 차오른 빛무리는 세라의 어깨 위에도 내려앉았다.
지쳐서 무거워진 어깨를 토닥이는 따스한 기운에 긴장으로 바짝 졸아붙어 있던 신경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고된 피로가 녹아내리고 고갈된 마력이 차오르는 충만한 감각이 세라를 채웠다.
몽롱하던 의식이 돌아오고, 손끝까지 힘이 넘친다.
이 세상에서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성검.
“……저게 왜 저기서 나와?”
허, 황당한 웃음이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검은 방의 에녹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에녹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검이 그이 손에 버젓이 들려 있었다.
심지어 세라가 보았던 성검 중 가장 청량하고 깨끗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기까지 했다.
그 빛이 마치 태양이 투과된 조각상의 빛처럼 아름다웠다. 세라는 그것을 바라보며 새벽녘의 이슬, 발자국이 닿지 않은 설원, 갓 돋아나 싱그러운 나뭇잎 따위를 떠올렸다.
“…….”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검은 방의 남자가 불쾌한 얼굴로 검은 휘둘렀다.
날카롭게 벼려진 어둠이 공간을 채워나가던 빛의 한 귀퉁이를 손쉽게 잘라냈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잠잠하던 하늘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다시 기지개를 켠 어둠이 광신도의 빛을 몰아냈다. 기세 좋게 크기를 부풀린 어둠이 공간을 양분했다. 어둠이 돌아온 거리만큼 소리가 돌아왔다.
쿠르릉!
그리하여, 기세를 되찾은 벼락이 대지를 내려쳤을 때.
—!!!
빛과 어둠이 다시 한번 격돌했다.
공간이 깨어져 나가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 —!!! —!!! —!!!
크게 울린 충격음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서로 상반된 힘이 맞부딪히며 허공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불꽃이 튀었다. 은하수 같기도 하고, 오로라 같기도 한 그것이 찰나에 피었다 지는 꽃처럼 이곳저곳에서 피어올랐다.
“울어라! 여신참성도!”
신이 내려준 성검에 기괴한 이름을 붙인 광신도가 비장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성검을 휘둘렀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찬란한 빛이 세상을 비췄다.
“그 뭔, 씹…….”
절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외침에 검은 방의 에녹이 뭐 씹은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대화만 놓고 본다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그 주변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검은 방의 남자와 광신도가 맞붙을 때마다 땅이 용솟음치고, 바람이 울부짖으며, 하늘이 갈라졌다.
세라는 몰아치는 광풍에 종이 인형처럼 흔들리면서도, 그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벌을 받을지어다!”
“닥쳐.”
“회개하라!”
“닥치라고.”
병신 같아.
하지만 왤까.
뭔가 멋있어 보여…….
그래서 짜증 나. 하지만 멋있어…….
동시에 몰아치는 양가감정에 세라는 유령에 홀린 사람처럼 광신도의 놀라운 활약을 지켜보았다.
한 방에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선전 중이었다.
세라는 흑마법을 사용해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게 전부였던 공격을 제대로 맞받아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찌르고, 막고, 다시 파고드는 그 공방은 검술에 문외한인 세라가 보기에도 비등비등해 보였다. 뿐이랴, 광신도는 세라가 절대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모든 공격들을 그냥 받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빈틈을 노려 착실히 반격까지 하고 있었다.
이게 되네.
놀라움 반, 당혹스러움 반인 심정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세라의 얼굴에 미묘한 희망의 빛이 어렸다.
그 순간, 성검의 빛을 받아 편안하게 풀려있던 공기를 뚫고 서늘한 살기가 세라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절로 등허리가 바짝 굳어버리는 감각에 흠칫, 놀란 그녀가 광신도에게서 그 반대로 시선을 옮겼다.
시선이 마주쳤던가? 잘 모르겠다.
검은 방의 에녹은 몇 번의 부딪힘 만으로도 광신도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파악한 것 같았다.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던 검격을 거짓말처럼 멈춘 그가 뒤로 크게 물러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신도에게 쉴 틈을 준 건 아니었다.
빠르게 검을 회수한 검은 방의 에녹은 뒤로 물러선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광신도를 향해 검을 쏘아 보냈다.
쐐애액!
검은 섬광이 허공에 남은 빛의 잔상을 찢으며 뻗어나갔다.
“……!”
이번만큼은 광신도도 허를 찔린 표정으로 다급히 빛을 휘둘렀다.
—!!!!!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공간을 왜곡하는 불꽃이 튀어 오름과 동시에, 남자의 몸이 그보다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대로라면 검을 휘두르느라 비어있는 광신도의 빈틈을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방금 전까지 검을 맞댄 상대의 곁을 아무런 미련 없이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하여, 눈 깜짝할 사이.
날카로운 바람을 몰고 온 남자가 세라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어-.”
미처 반응하지 못한 세라가 그 손에 붙잡히기 직전인 그때였다.
콰아앙-!
별안간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남자의 위로 내려앉았다.
“으아악!”
그 충격파로 인해 세라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쿵! 땅에 대차게 뒤통수를 찧는 바람에 눈앞에 허연빛이 번쩍 튀었다.
으으….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여신의 발등 뒤로 올라온 세라가 찡그린 눈을 하고선 고개를 들었다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
그 바로 앞의 대지가 엉망으로 부서진 꼴을 발견하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운석이라도 떨어져 박힌 것처럼 움푹 파인 땅 위로 검은 방의 에녹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쓰러져 있었다. 세라에게 닿으려 내뻗었던 손은 누군가의 발에 처참히 밟힌 채 땅에 깊숙이 처박힌 채다.
저 정도면 그냥 막으려는 정도가 아니라 팔을 뜯어버리려고 한 거 아니냐.
자비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그 행위에 세라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엉망으로 부서진 대지에 머물렀던 시선이 서서히 그것을 밟고 있는 존재를 향해 올라붙었다.
세라에게 완벽하게 등을 보이고 선 남자는 분명 광신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세라는 어쩐지 그가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손에 들린 찬란한 성검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벽한 신관 복장도 여전했으나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적당히 까불어.”
광신도가 제가 짓밟은 남자를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늑대가 제 아랫것에게 경고하듯 매정한 어조로.
그리고 그 목소리는, 세라에게 굉장히 낯이 익은 것이었다.
울컥.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아낸 심장이 크게 반응했다.
저 밑바닥에 눌러두었던, 그녀조차 알지 못한 감정이 밀려들며 코가 매워졌다.
마녀는 제 앞을 든든히 지키고 선 커다란 등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그토록 찾던 영웅의 이름을 읊조렸다.
“에녹……?”
“…….”
그녀의 부름에 광신도가 고개를 반쯤 돌렸다.
빛이 테두리를 비추는 선 아래로 비로소 그녀가 아는 얼굴이 맺혔다.
어느새 그의 어깨 너머로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하늘이 드러났다.
서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팽팽하게 맞붙어 있던 공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모든 빛, 공기, 대지 위에 어른 빗방울 하나까지도 남자의 발아래 납작 엎드렸다.
그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짓밟힌 남자 하나뿐이었다.
“……세,라-.”
부서진 대지의 저편에서, 지독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애달픈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가슴이 죄어드는 기분이 든 세라가 반사적으로 남자를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나 에녹이 한 발 더 빨랐다.
옆으로 몸을 움직여 남자를 가려버린 에녹이, 반쯤 돌아봤던 고개를 바로 했다.
“보지 마.”
넌 이런 거, 몰라도 돼.
그렇게 속삭인 영웅이 성검을 높이 들어 올린다.
“야, 잠깐……!”
추락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허공을 가르며 남자에게 닿은 빛의 궤적이 단숨에 어둠을 베어냈다.
진정한 주인이 휘두르는 성검은 닿는 모든 것을 조각내 빛으로 뒤덮었다.
바로 앞에서 터진 빛이 가장 먼저 세라를 뒤덮었다.
덮치듯 세라를 감싼 빛이 득달같이 그녀의 영혼에 스며들어 채 회복되지 못한 곳이 없도록 구석구석 핥아주었다.
이 와중에도 제 안위나 신경 쓰고 있는 미련한 영웅을 향해, 세라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 다 봤는데 뭘 보지 말래.”
너 임마, 나가서 보자.
허탈한 한숨을 내쉰 그녀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를 저 높은 수면 위로 밀어올리는 듯한 감각과 동시에 세라가 까무룩 빛 속으로 빨려 들었다.
***
마지막으로 제 몸을 감싸던 빛무리 덕분일까.
세라는 정신을 잃을 때보다 날아갈 듯 가벼워진 몸으로 정신을 차렸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 몸이 자연스럽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직 상이 완벽하게 잡히지 않은 시야에 은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낭창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상대를 알아본 세라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진-.”
“일어, 났어?”
으응, 세라는 깨어났다는 의미로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를 길게 내었다. 상쾌한 몸 상태와는 별개로 타인의 내면에 발을 들였다 돌아온 정신은 쉽사리 맑아지지 않았다. 꼭 남의 몸을 둘러쓴 것처럼 제 몸이 다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에녹을 짚은 채 일어서던 몸이 푹푹 꺾이며 그 위로 철푸덕 쓰러지길 반복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땅으로 처박힌 시야에 석양의 빛으로 물든 잔디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몇 차례의 실패를 겪는 동안에도 진은 절대 뒤를 돌아볼 수 없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봤다.
“에녹은?”
그러면서 간결하게 성과만을 물었다.
“해결했지이-.”
그에 대답하는 말끝이 이번에도 어눌하게 늘어졌다.
이건 언제 돌아오는 거야.
스스로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세라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깨웠다. 효과가 있었는지 한 바퀴 빙글 돈 시야가 조금씩 깨끗하게 걷히며 헐겁던 육체와 정신의 매듭이 단단히 조여지는 감각이 들었다.
“그래……?”
목표를 달성했다는 말에도 진은 끝까지 담담했다.
“뭐가 이렇게 심드렁해.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그 고생을 하고도 공치사 한번 받지 못한 세라가 요정의 등을 불만스럽게 흘겨봤다.
그런데 어라, 방금 전까지 굳건히 버티고 있던 뒷모습이 휘청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거 정말, 다, 행-.”
불안하게 흔들리던 등이 마지막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기어코 무너져 내렸다.
요정의 몸이 쓰러지는 그 시간이, 세라의 눈에는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풀썩.
느리게 쓰러진 진의 몸이 붉게 물든 대지 위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