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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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시선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반지는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었던 양 세라에게 꼭 맞았다. 깜빡. 깜빡. 에녹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페리도트 빛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돌아왔다.
반지에 못 박혀 있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붙었다.
너무 놀라 미뤄뒀던 감정이 밀려들기 시작한 눈동자에 그제야 세라가 꺾어 온 새하얀 꽃이 들어왔다. 그건 척 보기에도 꽃집에서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 로우드 인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생화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한 송이 한 송이 직접 꺾은 걸까?
깜빡. 깜빡. 에녹이 재차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조금씩 허물어져 물렁하게 녹아내렸다. 세라가 내민 꽃다발은 투박하기 그지없었으나, 꽃잎에 묻어난 자유로운 바람의 냄새가 꼭 그녀 같았다.
꽃다발에 못 박혀 있던 시선이 위로, 위로 올라붙었다.
그리하여 화려한 드레스,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 새하얀 목, 붉은 입술, 오뚝한 코를 지나서…….
눈이 마주쳤다.
“…….”
그 찰나에 에녹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벅찬 감정은, 비단 그녀가 제 청혼을 받아주었다는 데에서 오는 일차원적인 기쁨 때문이 아니었다.
세라가, 웃고 있었다.
머뭇거리지도 않고, 짜증을 부리지도 않고, 거짓말로 꾸며낸 것도 아닌 진짜 미소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토록 환하게 웃는 모습은 말이다.
에녹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근심 한 자락 없이 맑게 갠 그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이가 보이도록 환하게 호를 그리는 입술, 예쁘게 접히는 눈가, 그 안에 별처럼 박힌 자수정 빛 눈동자가 생기 넘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 속으로 빨려드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을 향해 추락하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리하여, 세상을 이루는 색채가 세라를 향해 몰려들었다.
꽃도, 하늘도, 태양도,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모조리 흑백으로 물들고, 오로지 그녀만이 반짝이고 다채로운 빛을 뿜어냈다.
세상을 향해 열려있던 모든 감각이 파도에 쓸려 지나간 것처럼 사라지고, 그녀가 내뿜는 찬란한 빛, 향기로운 숨, 아름다운 미소가 그 자리를 채웠다. 눈에, 숨에, 피부에, 온몸에, 세라가 짙게 내려앉았다. 그것을 한껏 들이쉰 영웅이 더는 못 버티겠다는 듯 표정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깨달아 버리고 만다.
아아-. 나는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살아있는 세라를 만나고, 제 마음을 고백하고, 그녀와 하나로 이어지는 이 결말을 얼마나 오래도록 소망했던가.
영원히 이룰 수 없어 그를 절망케 하던 유일한 소원이 거짓말처럼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목숨이 지지도 않았는데. 그러니 에녹은 이것으로 되었다. 지난 300년. 고통스럽게 길기만 하던 모든 순간이 지금, 이 순간 하나로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찰나.
에녹의 발밑에서부터 전율과도 닮은 환희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대장! 뭐 하고 있어! 얼른 받으라니까!”
“이러다 세라 팔 떨어지겠다!”
오로지 세라와 에녹만이 존재하던 세상이 깨어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주변으로 몰려든 길드원들이 아까부터 멀뚱히 앉아만 있는 에녹을 향해 괜히 좋으면서 간보지 말라며 그를 재촉했다.
“우우우~. 괜히 뜸 들이지-.”
입을 모아 퍼붓던 장난스러운 야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에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꽃다발 채로 세라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가녀린 어깨에 깊이 고개를 묻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게 꼭, 세라가 에녹의 품에 안겨든 게 아니라, 에녹이 세라의 품 안에 뛰어든 것처럼 보였다.
“……?”
그에 길드원들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에녹이 내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이들이 서로에게 눈짓을 보내며 ‘왜 저래?’ 하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훌쩍.
에녹의 등이 크게 들썩였다.
“……?!”
그 한 번의 움직임에 가볍고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경악으로 술렁거렸다. 훌쩍, 훌쩍, 그 사이 에녹의 등이 두어 번 더 들썩거렸다. 도무지 다른 무언가로 착각할 수 없는 확실한 신호에, 제 눈을 의심하던 길드원들이 제가 본 게 맞냐는 듯 속닥거렸다. 뭐야. 우는 거야?
“어어-.”
당황스럽기는 세라도 마찬가지였다.
에녹이 고개를 묻고 있는 왼쪽 어깨가 무서운 속도로 젖어 들었다. 단순히 심증만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확실한 물증을 근거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에녹이 울고 있었다.
……이게 울기까지 할 일이야?
생각보다 격렬하게 돌아오는 반응에 황당한 숨을 내쉬면서도, 검은 방에서 말라 죽어 가던 얼굴을 떠올리고는 잠자코 들썩이는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바짝 힘이 들어가 있는 몸이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억누르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곳을 재차 쓸어내려 주자 에녹이 연약한 짐승처럼 낑낑거렸다. 그녀를 더 힘주어 끌어안은 에녹이 고개를 틀어 동그란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드디어 대답을 돌려주었다.
“……응.”
너한테 줄게. 전부. 뭐든지.
내 남은 모든 생이든, 이 세상이든, 그게 뭐든… 전부 줄게.
안개처럼 흩어질 것 같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애달픈 고백을 이어가던 에녹이 내내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한 번 더 고백했다.
“사랑해. 세라.”
고마워. 사랑해. 고마워…….
세라의 두 손을 꼭 부여잡은 영웅은 그 말만을 반복하며 울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평소와 똑같았으나, 촉촉하게 젖은 연둣빛 눈망울에서는 연신 투명한 눈물이 줄줄 떨어져 내렸다. 그 짧은 사이 어찌나 울어 젖혔는지,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온통 척척하게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보다는 그저 예뻤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영웅은 갓 세상을 깨우친 어린 소년처럼 사랑스러웠다. 처음 보는 에녹의 모습에 길드원들은 짓궂게 놀려대던 것도 잊은 채 숨죽여 사태를 관망했다.
그리고 세라는…….
“그런 말은-.”
세라는 자신 때문에 울고 있는 연인을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고선, 단정한 목에 예쁘게 매고 있는 넥타이를 낚아챘다.
“입이라도 좀 맞추면서 해라.”
그러고는 그대로 끌어당겨 박력 있게 입을 맞췄다.
으아악! 몰입하여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 사이에서 우스꽝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쮸우왑!
혀를 섞지 않은, 하지만 충분히 진한 입맞춤을 끝낸 세라가 에녹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목적지에 안착한 새하얀 꽃과 붉은 머리의 사내는 세라의 예상만큼이나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그 조화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세라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갈까?”
에녹을 뒤흔드는 찬란한 미소를 그린 마녀가 살가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더없이 달콤한 제안에 에녹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자그마한 손 위로, 반지를 낀 커다란 손이 내려앉는다. 단단히 깍지를 껴 서로를 붙든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계단을 내려갔다.
“행복해라!”
“잘 어울린다!”
“한턱 쏴!”
침묵에서 깨어난 길드원들이 마침내 완전히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발밑에 축복을 쏟아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휘파람, 흥분에 찬 괴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그 속에는 남부 길드에서 파견된 이들도 섞여 있었다. 화끈한 청혼의 현장을 구경하던 남자 하나가 곁에 선 동료의 어깨를 두드리며 익살스럽게 위로했다.
“레오.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는데?”
“흥, 저런 말뿐인 맹세. 언제든 깨지면 그만이지.”
그에 혼자서만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던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고집스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그 모습에 레오를 위로하던 남자가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저것 좀 봐.”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두 사람이 광장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찬란하게 빛이 나는 군청색의 여자는 연신 함박웃음을 짓고 있고, 그녀의 곁에 조신하게 따라붙은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자신이 받은 꽃다발에 얼굴을 묻은 채 기쁜 듯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완전히 극과 극의, 감격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웃긴 광경이었으나 힘주어 맞잡은 두 손이나,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걷는 발걸음만큼은 빈틈 하나 없이 단단했다.
“그래-.”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해 버리고 만 레오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없는 거절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남자는 그제야 깔끔히 인정했다.
“엄청, 행복해 보이네.”
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틈 따위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씁쓸한 미소를 지은 레오가 자신이 졌다는 듯 세라와 에녹을 향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 힘이 없는 그 축하는 금방 힘차고 경쾌한 축복의 외침 사이로 묻혔다.
“축하드립니다!”
“예쁜 사랑해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댄 길드원들이 어디선가 꽃가루 같은 것을 구해와 하늘 높이 뿌려댔다. 나풀거리는 종이와 싱그러운 꽃잎이 한데 뒤섞여 어지럽게 흩어졌다. 나풀나풀 호를 그리며 떨어진 축복들이 세라와 에녹의 머리 위에 눈처럼 내려앉았다.
“애는 꼭 세라 닮은 왕자님으로 낳아라!”
누군가의 짓궂은 농담에 유쾌한 웃음이 번졌다.
긴 세월을 돌아 마침내 나란히 서게 된 영웅과 마녀는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모두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두 사람은 결혼식장을 나서는 신랑과 신부처럼 느긋이 걸어 퇴장했다.
오롯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멀어지는 뒷모습이 오래오래 행복했다는 동화책의 결말처럼 그저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