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72
271화
“……!”
설마 그녀가 곧장 손부터 뻗을 줄은 몰랐던 에녹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핵을 향해 다가간 세라의 손은 금방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나아가지 못했다.
파지직! 세라와 맞닿은 벽에서 사나운 전류가 튀었다. 핵을 보호하는 결계 같았다. 번쩍, 불빛이 터지며 세라의 손이 뒤로 튕겨 나왔다. 벽에 닿았던 손끝에 붉게 상처가 남았다.
“세라!”
에녹이 얼른 그녀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괜찮으니까 물러서.”
당장이라도 치료하려는 그를 제지한 건 세라였다. 생경한 눈으로 생채기를 바라보던 세라가 그 손 그대로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핵을 감싼 저주는 심연 그 자체처럼 새카맣기만 했다. 단단히 맞물린 원한이 덧칠되고 또 덧칠되어 그 안에 적힌 수식을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세라는 그 저주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았다. 세라조차 질릴 정도로 짙은 원한은 오로지 핵을 보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힘을 축적했고 드디어 그렇게 됐다. 그렇게 완성된 칠흑의 보호막은 에녹이 깨부순 고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사이한 울음을 내며 엉겨 붙은 저주가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그게 꼭 어디 할 수 있으면 자신을 깨어 보라 약을 올리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생물도 아닌 한낱 저주 따위가 의지를 갖는다니 어불성설이지만, 세라는 귓가를 파고드는 속삭임을 똑똑히 들었다.
이런 식의 저주는 완전히 처음 보는 형태였지만, 세라는 이 저주가 발동하는 순간부터 그것의 정체와 원리를 간파했다. 그건 지식에 의한 해석이라기보다는 직감에 더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무언가가 눈을 뜨는 기분이었다.
눈으로 수식을 읽어 내지 않아도, 눈앞의 저주 덩어리의 의도, 흐름, 목적, 존재할 수 있는 원리까지 모든 게 훤하게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
눈을 감은 그녀는 순순히 제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했다.
회로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마력이 스멀스멀 깨어났다. 벽 너머로 느껴지는 저주를 흉내 내어 비슷하게 엮어 내니 세라의 손을 가로막고 있던 단단한 벽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세라는 그것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았다. 저주를 모조리 빨아들인 줄 알았는데, 벽 바깥에서 같은 기운이 느껴지자 마저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녹아내리는 얼음의 표면처럼 물렁해진 결계가 세라의 손끝에 들러붙었다. 그리고 쑤욱-. 제 핵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그것을 스스럼없이 안쪽으로 이끌었다. 새카만 껍데기가 일렁거리며 형체를 바꾸었다. 촉수처럼 기다랗게 대가리를 뺀 그것이 저주를 내뿜고 있는 세라의 손바닥에 닿았을 때였다.
그 줄을 단단히 붙잡은 세라가 바깥으로 흘려보내던 저주를 돌연 제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러자 세라의 저주를 잡아먹으려 들러붙은 저주가 역으로 그녀의 회로 속으로 빨려 들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그와 동시에 구체 주변으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류가 튀었다.
세라는 그럴수록 제 안으로 더 많은 저주를 끌어들이려 정신을 집중했다. 모든 흑마법을 꿰뚫는 회로가 최대로 개방되고, 그 안으로 저주를 끝없이 집어삼켰다. 그때마다 핵을 감싸고 있는 새카만 껍데기가 한 꺼풀씩 벗겨져 내렸다.
득달같이 일어난 시커먼 전격이 성난 짐승처럼 공간을 울렸다. 파지지직! 파지직!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촉수들이 세라의 팔을 채찍처럼 후려쳤다.
인정사정없이 저항하는 저주로 인해 세라의 옷소매가 엉망으로 찢겨 나갔다. 팔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넝마가 되고, 새하얀 살이 벌어져 벌겋게 상처를 내보였으나 세라는 멈추지 않았다.
세라의 회로는 스며든 저주를 마력으로 환원해 제 것으로 삼았다. 그렇게 축적된 힘으로 인해 회로가 한계까지 확장되고 마력이 끝없이 순환한다. 세라와 핵 사이에 광풍이 몰아쳤다.
“세라…! 이제 그… 소용… 이러… 폭……!”
심상치 않은 기운에 에녹이 무어라 소리쳤다. 어딘가 다급한 목소리였으나, 귓바퀴를 할퀴는 소란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라는 에녹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난 마력이 바깥까지 흘러넘쳤다. 어깨 위로 검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발밑의 그림자가 넘쳐 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양 크기를 키웠다. 얌전히 세라의 형상을 비추었던 것이 일그러져 제멋대로 모양을 바꿔대다가 기어코 온 대지를 뒤덮어 버렸다.
마력 폭주의 전조 증상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마력이 또다시 세라의 의지를 벗어나 회로의 주인을 향해 뻗어 나갈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조금의 위기의식조차 들지 않았다.
어디에 근거를 둔 자신감인지 모르겠으나, 오히려 충분히 할 수 있다는 확신만 가득했다. 그 확신이 세라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더 많이, 더 깊이, 더 빠르게.
세라는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과감히 저주를 빨아들였다. 그럴수록 저주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
언뜻 팽팽해 보이던 힘의 균형이 기울어 버린 건 순간의 일이었다.
쩌적!
세라를 거부하던 결계에 균열이 일었다. 쉼 없이 저주를 흡수한 세라의 힘이 드디어 결계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워진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도 핵을 감싸고 있는 저주가 많이 옅어졌다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저항이 생각보다 강했다. 남겨진 저주들은 자신들이 사라지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들러붙었다.
세라에게 한 움큼의 저주가 빨려 나가면, 약해진 쪽으로 힘을 보내 다시 보강했다. 저주가 빈틈을 메우기 위해 움직였다. 그 너머로 내내 꼭꼭 감춰져 있던 핵이 언뜻 모습을 비췄다.
“……!”
그 광경을 본 에녹이 세라를 말리던 손을 거두고 떨어졌다. 대번에 진지한 낯을 한 그가 숨죽여 때를 기다렸다.
그 때는 세라만이 정할 수 있었다.
끝이 왔음을 직감한 세라가 저도 모르게 남아 있는 저주를 향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읊조렸다.
이리 와. 이쪽으로 와.
그녀는 자신이 지금 ‘목소리’를 사용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눈앞에 마지막 남은 저주를 완전히 벗겨 내는 데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저주가 조금만 남아도 어떻게든 핵을 감싸려 들기 때문에, 세라가 저주를 흡수하여 핵이 잠깐 바깥으로 드러났을 때를 정확히 노려야 했다.
그리하여 바로 다음 순간, 한층 더 약해진 결계에 크게 금이 갔다. 한 꺼풀 더 벗겨진 저주가 뭉텅이로 세라의 회로 속으로 빨려 들고, 저주가 뜯겨 나간 자리에 날 것 그대로의 핵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세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에녹!”
그녀가 신호를 주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에녹이 곧장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가 일으킨 순풍이 세라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고-.
새하얀 빛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
중앙 가시 주변에 자리 잡은 임시 캠프.
갑작스럽게 바깥으로 쫓겨난 토벌대들은 저마다 치료를 마치고 다시 입구로 모여들었다. 아직 몸속에 쌓인 독기가 다 빠져나가지도 않았는데, 붉게 변한 정화의 돌을 빼내고 다시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손길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누가 먼저 나서서 이렇게 하자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시그너스의 토벌 대원들은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다시 출발 대형을 갖추고 있었고, 그 당연한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외부에서 파견 온 남부 연합 길드원들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 가시 앞의 인원은 자연스럽게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입구 앞에 정렬한 시그너스 길드원들과, 그곳에 차마 함께 서지 못하고 멀찍이서 바라보는 남부 인원들.
그 인원들의 선두에 선 레오가 제 앞을 지나쳐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설마, 바로 다시 출발하는 겁니까?”
레오의 앞을 지나던 마커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주 명쾌한 대답이었으나 남부 연합 길드원들은 혼란스럽게 술렁거렸다. 독기도 제대로 빼지 못하고,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를 최상층을 지금 다시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는 마커스가 쾌활하게 덧붙였다.
“남부 인원들은 빠져도 됩니다. 정식 토벌 임무가 아니거든요.”
그건 레오를 비롯한 남부 길드원들이 듣기에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좋은 소식이었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가시밭길로 돌아가려는 시그너스를 이해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럼, 당신들은 왜 다시 들어가는 겁니까?”
타당한 목적을 묻는 그 말에 마커스가 한껏 멋있는 표정을 지어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레오도 아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최상층에서 쫓겨나다시피 바깥으로 튕겨 나왔는데 단 두 사람만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레오는 자연스럽게 둘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을 떠올렸다.
“에녹 소서요? 그 남자라면 어차피 걱정할 필요는-.”
“누가 그딴 놈 걱정돼서 이런답니까?!”
하지만 그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마커스가 멋진 척하던 표정을 집어치우고 대번에 역정을 냈다. 중앙 가시를 향해 삿대질을 한 그는 여기서 에녹이 왜 튀어나오느냐는 듯 빼액 목청을 높였다.
“세라 말이요! 세라! 우리 세라가 아직 저 안에 있잖아!”
너는 걔를 그렇게 쫓아다녀 놓고서는 이걸 꼭 말해 줘야 아니?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레오는 마커스가 제게 꼭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세라?”
레오의 시선이 하늘 높이 치솟은 가시로 향한다. 그리고 그 앞에 비장한 분위기를 풍기며 도열한 수많은 시그너스 길드원들을 훑었다.
“저 사람들도 전부?”
“당연히 그 애 데리러 가려고 모인 거죠. 누가 대장 걱정이나 한다고.”
콧방귀를 뀌는 마커스에게는 정말로 에녹 소서 따위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저 많은 인원이 영웅을 내버려 두고, 일개 탐색 조원을 구조하러 다시 모였다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레오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물론, 그 또한 세라가 돌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인이니까. 하지만 그런 자들은 남부 길드원들 중에도 있었고, 가시를 토벌하다 보면 사람 한둘씩 사라지는 것쯤이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낙오되어 돌아오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신의 뜻이다.
오히려 홀로 남겨져 그 시체가 동료들의 이정표나, 무언가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숭고한 희생을 한 격이니 축복받아 마땅했다.
하여 남부 길드에서는 가시 안에 남겨졌거나,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부러 찾으러 돌아가지 않았다.
그게 더 효율적이니까.
설령 그 사람을 구하러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미 죽어 시체도 못 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것이 그들이 사는 시대였고, 가시였다.
혹시 시그너스는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이 자연스러운 이치를 모르는 걸까?
“그 여인 하나 구하자고, 이만한 인원이 다시 들어간다고요? 이건 너무나 비효율적인-.”
“예?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엥?”
나름 그들을 돕기 위해 조언을 하려는데, 마커스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태도로 중간에 끼어들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은 한동안 상대를 희한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런 두 사람이 답답했는지 레오의 뒤에 있던 남부 길드원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지금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앞으로 있을 토벌을 생각해라. 지금은 회복을 하고 다음을 도모하는 게 맞다. 탐색 조원 하나 없어진다고 타격이 있겠느냐……. 하나같이 이성적으로 맞고, 효율적인 이야기였다.
“그래요. 네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저희는 그런 거 모르겠다고요.”
마커스는 그 모든 말들에 심드렁하게 대응했다. 그제야 남부 길드원들은 그가 정말로 못 알아들어서 모르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무시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손사래를 친 마커스가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며 낮게 읊조렸다.
“가족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내일이 다 무슨 소용이라고.”
우린 그런 거 못 해.
껄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그가 제 길드원들을 향해 떠나갔다. 그 거리낌 없는 한마디를 끝으로, 남부 길드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고수하는 효율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 모였군.”
마커스까지 합류하자 비로소 세라를 구하러 가는 구조대가 완성되었다. 선두에 서서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던 기드온이 간결하게 할 일을 정리했다.
“목표는 단 하나, 낙오된 길드원의 무사 귀환이다. 핵이건 나발이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미아를 찾아서 돌아오는 것만 집중해.”
“넵!”
우렁찬 대답이 울렸다. 가족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모여든 길드원들의 얼굴에는 핵을 깨부수기 위해 입장하던 때보다 더 결연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그럼 이만 출발-.”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기드온이 막 출발 신호를 보내려던 그때였다.
“우왓!”
잠잠해졌던 대지가 또 요동치며 지진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길드원들이 당황하며 크게 비틀거렸다. 겨우 중심을 잡고 설 수 있게 된 이 중 하나가 우연찮게 중앙 가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아주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두 눈을 크게 홉떴다.
“어어……? 저, 저기 좀 보십시오!”
다급한 외침에 입구 앞에 몰려 있던 이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태양을 가릴 듯 거대하게 치솟은 탑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즈음, 모두 남자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지난 15년의 세월.
깊숙이 못 박혀 세상을 좀먹던 거대한 가시가 꼭대기부터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