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73
272화
먼지처럼 흩날리는 중앙 가시는 부스러져 떨어지는 밤의 잔해 같았다. 영원히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을 줄 알았던 거대한 탑이 허무할 정도로 고요히 스러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임시 캠프에 몰려 있는 모두가 보고 있었다. 그토록 무너뜨리고 싶어 하던 거대한 탑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
“…….”
그저, 사라지는 중앙 가시만큼이나 고요히.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멍하니 흩어지는 검은 안개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새파란 하늘에 궤적을 남긴 검은 잔해가 길게 뻗어져 나갔다. 하늘을 타고 뻗어 나간 그 검은 고리는 온 세상에 자신의 소멸을 알릴 의무가 있는 양 점점 선명해졌다.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지는 검은 탑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저것이 처음 이 땅에 뿌리 내렸을 때를 떠올렸다.
어느 날의 평온한 저녁. 하늘이 무너질 듯 굉음이 울리더니 온 세상이 가시에 꿰뚫렸다. 기습적으로 추락한 저주가 찌른 건 단순히 대지나 강 따위가 아니었다. 그곳은 그리운 고향이기도 했고, 온 정성을 다해 가꾸던 꽃밭이기도 했으며, 사랑하는 이가 잠드는 집이기도 했고 혹은 사랑하는 이의 머리 위이기도 했다.
그들이 빼앗은 건 그런 것들이었다. 예고도 없이 비겁하게 찍어 누른 저주로 인해, 그들은 의무적으로 하나씩 잃어버려야 했다.
아직도 그날의 분노를 기억한다. 흔적도 없이 뭉개진 소중한 것을 부여잡으며 복수를 울부짖던 절망을 기억했다. 고통스러운 상실을 보상받기 위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병사가 되어야 했다.
과수원을 빼앗긴 농부는 도끼를 들었고, 아내를 잃은 예술가는 어린 딸이나마 지키기 위해 방패를 들었다. 가족과도 같은 친구를 잃은 사서는 이젠 책보다는 단검을 다루는 게 더 익숙해졌다.
원래 서 있던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다 같이 피의 강에 제 손을 담그는 일이었다. 안타레스로부터 시작된 증오의 연쇄는 성공적으로 그들에게 이어져 서로를 옥죄었다.
쫓겨나듯 전쟁으로 내몰린 지 15년.
그들은 오로지 저 거대한 가시를 뿌리 뽑는 것만을 목표로 살아왔다. 적들을 베고, 가시를 무너뜨리는 세월이 쌓일수록 점점 그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사악한 악의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서 제 손도 똑같이 더럽혀야 한다니. 최악이었다. 하지만 가장 최악은 더 이상 안온하고 평화롭던 저녁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저 침범당해서는 안 됐던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감각만 남았다.
그럴 때면 그들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절망하다가, 이 모든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상상하며 버티곤 했다.
건방지게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아야 하는 까마득한 탑. 그것이 성검에 두 동강 나 떨어져 내릴 때면 분명 통쾌한 환호성을 내지르리라, 마침내 무릎 꿇은 안타레스 놈들을 눈앞에서 비웃어 주리라 다짐했었다.
“아아…….”
하지만 정작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온 건 떠들썩한 환호성이 아닌 낮은 탄식이었다.
하늘을 뒤덮는 검은 궤적이 여기저기서 가지를 뻗쳐 왔다.
저 멀리 아직도 무수히 많이 남아 있던 가시들이 사라지는 저주를 따라 함께 스러졌다.
가시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로우드 상공에서 시작된 이 검은 고리는 하늘길을 타고 뻗쳐 나가 전 대륙을 하나로 감쌌다. 부스러진 밤의 궤적이 지나는 자리마다 뿌리 깊게 박혀 있던 가시들이 모래처럼 부스러져 그것을 따라 흐르며 저주의 소멸을 공표했다.
오래도록 기다린 승리의 순간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헤타르딘에서도, 다리 건너의 남부 연합에서도, 재건이 한창인 요정의 숲에서도, 사막의 에스텔라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태어나 처음 보는 징조였으나,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목격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중앙 가시가 무너졌다.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서 이제는 일상 같던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이다.
끝은 고요하게 찾아왔다. 사라진 건 대지에 뿌리박힌 저주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지상을 꿰뚫은 날로부터 모두의 가슴속에 뿌리내린 증오의 가시도 함께였다. 연쇄가 끊어진 자리에는 거대한 구멍이 남았다. 그건 너무 크고 깊어서 어쩌면 긴 시간이 지나도 메워지지 않을지 모른다.
뻥 뚫린 길을 타고 고여 있던 절망과 분노가 빠져나간다. 마침내 드러난 바닥에는 크고 작은 생채기로 얼룩져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온전히 마주한 자기 모습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공허하고 허탈하기도 했지만, 그 위에 새로이 피어나는 싹이 있어 슬프지는 않았다.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씨앗이.
세계를 한 바퀴 돌아온 검은 궤적은 다시 중앙 가시 위로 되돌아왔다. 긴 시간을 들여 흩어진 중앙 가시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시야를 막는 새카만 흉물은 모조리 사라지고, 사람들의 눈앞에 지평선까지 탁 트인 광활한 대지가 펼쳐졌다. 시린 풍경을 마주한 이들에게서 비로소 반응이랄 게 터져 나온 건 그즈음이었다.
가시가 사라진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드디어…….”
종전이었다.
***
“…생각보다 조용하네.”
감격해서 폭죽이라도 터뜨릴 줄 알았는데.
멀찍이서 사람들을 지켜보던 세라가 싱겁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중앙 가시가 사라지고 나면, 임시 캠프의 모두가 밖으로 뛰쳐나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담담해서 김이 빠진다는 투였다.
“다들 고생한 세월이 있으니까.”
그에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에녹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은 것뿐이라며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 또한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하늘에 펼쳐진 검은 고리를 올려다봤다. 고생한 것으로 치면 가장 고생했을 에녹이다. 아무리 반복해서 겪은 전쟁이라 할지라도 드디어 숙적을 쓰러뜨렸는데, 기분이 영 언짢아 보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세라가 곧장 그의 심경을 캐물었다.
“왜 화가 났어?”
“네가 다쳤으니까.”
“아하-.”
쌀쌀하게 맞받아친 에녹이 세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장 제게서 감추고 있는 그 손을 이리 내라는 기세였다.
“별로 심각한 부상도 아닌데…….”
머쓱한 표정을 지은 세라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별거 아니라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핵을 보호하던 저주에 할퀴고 찢긴 팔은 처참한 흉터로 가득 차 있었다. 막상 눈으로 보니 심각해 보이기는 해서, 세라가 서둘러 아프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
하지만 에녹의 표정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라의 손에 조심스레 깍지를 낀 그는 심각한 눈으로 그녀의 상처를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었다. 바짝 조여진 연둣빛 동공에는 방금 승리를 거둔 사람답지 않게 기쁨 한 자락 보이지 않았다.
“얼굴 좀 풀어. 나 진짜 괜찮다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숨을 푹 내쉰 세라가 자신의 무사함을 재차 강조했다. 에녹을 달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는 괜찮았다. 오히려 기분이 제법 좋았다.
맞닿은 두 손을 바라보던 그녀가 살포시 웃었다. 핵을 파괴하느라 성검의 힘을 사용하는 바람에, 손목 어귀에 머물러 있던 균열이 에녹의 어깨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궤적은 우연하게도 세라의 팔에 새겨진 상처들과 모양이 비슷했다. 맞닿은 손에서부터 시작된 흉터는 에녹과 마찬가지로 세라의 어깨 위까지 이어져 있었다.
닮았네.
힘주어 에녹의 손을 맞잡은 세라가 쾌활하게 중얼거렸다.
“이러니까 꼭 데칼코마니 같다.”
같은 팔, 같은 위치에 비슷하게 새겨진 흉터.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마지막에 나서서 도와준 것뿐이지만, 이렇게 두고 보니 에녹이 짊어져야 할 무언가를 같이 나눠진 것 같아 제법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싫어.”
에녹은 단호했다. 어림도 없다는 태도로 세라의 뿌듯함을 잘라 낸 그는 연인의 자랑스러워하는 상처를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바로 다음 순간 치료해 없애 버렸다.
“다치지 마. 어떤 이유에서라도.”
“……알았어. 알았어.”
쩝, 아쉽게 입맛을 다신 세라가 신뢰가 가지 않는 어조로 약속했다. 에녹이 장난하는 게 아니라며 진지한 눈으로 시선을 맞춰 온다.
“난 이제 괜찮으니까 어서 가 보기나 해. 저기, 너 기다린다.”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했던 세라는 비로소 자신들을 알아본 길드원들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에녹의 등을 떠민 세라가 괜히 긴박한 낯으로 그를 부르는 사람들을 눈짓했다.
“에녹!”
“대장!!”
“…….”
에녹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으나, 떠미는 힘에 못 이겨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나서야, 세라가 기대했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어이고! 이리 와, 요 이쁜 것!”
“영웅이 또 해냈다!”
에녹을 얼싸안은 사람들이 저마다 감격의 말을 토해 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영웅의 이름을 부르짖는 외침이 하늘을 찔렀다. 눈물과 환희가 뒤섞인 공기는 금세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에녹 소서 만세! 만만세!”
“이제 끝이다! 끝!”
질색하는 에녹을 억지로 들어 올린 이들이 그를 힘차게 하늘로 던져 올렸다. 원치 않은 헹가래에 휩쓸린 영웅의 표정은 심통 맞은 고양이처럼 뾰로통했지만, 세라의 눈에는 그가 썩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제야 좀 분위기가 사네.”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라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저렇게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중앙 가시를 무너뜨렸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자, 그럼 이제 얼마나 남았나 볼까?
가장 굵직한 위업을 달성한 세라가 한껏 기대에 찬 눈으로 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
그리고 깜빡, 예상치 못한 것을 목격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팔뚝에 적힌 형량은 그대로였다.
100,257,384.
“이상하다.”
왜 형량이 줄지 않지?
중앙 가시를 뿌리 뽑았음에도 1억 남짓 남은 형량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어째서지. 1년이라도 줄어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예상치 못한 난관으로 인해 태평하던 가슴속에 불쑥, 혼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세라!”
그때,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길드원들이 그녀를 불렀다.
“너도 얼른 이쪽으로 와!”
“그래! 너도 와서 같이 축하해야지!”
만면에 기쁨의 미소를 그린 이들이 세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에녹을 실컷 괴롭혔으니 이번에는 그녀 차례라는 뜻이었다. 정답게 그녀를 맞이한 이들이 옆으로 한 발짝씩 움직여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곳에 네가 들어올 수 있는 마땅한 자리가 있다는 것처럼.
“…….”
세라는 그 자리를 빤히 바라봤다.
사람은 가끔 눈으로 보아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그녀는 살아 있는 모든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렸다. 그건 왕궁 마법사가 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할 때도, 증오하던 이를 진창에 처박을 때도, 심지어 성검에 찔려 죽을 때도 충족되지 않은 지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오래도록 괴롭히던 갈증이 씻은 듯이 해갈되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마도 나는, 그 긴 세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고 싶어 그토록 괴로웠던 모양이라고.
한번 실패했지만, 이렇게나마 그 자리를 찾은 모양이라고 말이다.
“……난 헹가래 안 할래.”
그래도 던져지는 건 싫었던 그녀가 봐달라는 듯 픽 웃었다. 언제나 이방인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던 마녀가 그렇게 그림의 한 조각이 되기 위해 한 걸음 내디딘 순간-.
“……?”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길드원들과 에녹의 얼굴이 저 멀리 흐릿하게 사라졌다. 쿵,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크게 박동하고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어 버렸다. 초점을 잃은 시야가 땅 밑으로 푹 꺼졌다가 돌연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귓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생생했다. 구름을 헤집고 오르는 시야가 휙휙 돌아갔다. 끝없이 하늘로 치솟던 눈높이가 비로소 어느 지점에 멈춰 섰다. 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중이었다.
마침내 초점이 돌아온 시야에 선명한 하늘이 들어왔다. 그곳에서 지평선 너머로 뻗어 나간 검은 궤적이 있었다. 그것을 공중에서 바라보니 하나의 거대한 길처럼 보였다. 그 길을 한 차례 훑은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싱그러운 초목의 숲.
저주받아 군데군데 새카만 얼룩이 졌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로우드.
발밑에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우글거렸다. 그 사이에 온점처럼 찍힌 붉은 머리통이 유난이 눈에 띄었다. 땅에 발을 붙인 이들은 신나는 일이 있는지 무척 떠들썩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너무나 낯이 익은 군청색 머리칼의 여자가 보였다.
“…….”
세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시야에 비치는 여자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 날카로운 깨달음이 세라에게 내리꽂혔다.
누군가 우리를 내려 보고 있어.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그녀를 부르는 길드원들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들뜬 남부 연합원들도.
그리고 에녹조차.
“……!!!”
그 사실을 인지하자 세라의 온몸에 소름 끼치는 한기가 끼얹어졌다. 대지를 향해 겨눠진 악의를 목격한 세라가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모두, 도망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