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75
274
에녹 소서는 영웅이다.
성검의 주인이자 지상의 수호자다. 신의 선택을 받은 순간부터 그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축복을 받은 육체는 어떠한 무기로도, 저주로도 훼손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육체에 어떻게 하면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콰직.
저주가 담긴 검은 창이 영웅의 몸을 꿰뚫었다. 사람의 몸을 찔렀는데, 메마른 모래 더미를 쑤시는 감촉이 전해졌다. 남자가 에녹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깊이 쑤신 저주를 아프게 비틀었다. 콰드득. 콰득.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파고든다.
“…….”
미간을 찌푸린 영웅이 꿰뚫린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옆구리에 박힌 남자의 창은 아까의 폭격을 막아내느라 새로이 갈라진 균열 한 가운데를 정확하게 적중했다. 마치 이곳에 약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군더더기 없는 일격이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지독한 저주의 기운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삿된 기운이 육체를 침범하자 손안의 성검이 원통하게 울부짖었다.
남자는 그 비명을 감미로운 음악처럼 감상했다.
울컥, 에녹이 검붉은 핏물을 쏟아냈다. 퉤, 입 안에 남은 피를 마저 뱉어낸 그가 형편없이 얼굴을 구겼다. 균열 사이로 파고든 그것이 더 깊은 곳을 향해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내장이 통째로 뒤집히는 것 같은 거부감이 일었다.
단순히 정반대의 기운이 충돌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이 눈앞에 꿈틀대고 있는 것과 같은 본능적인 거북함이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에녹이 상대를 가늠하듯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남자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세라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에녹은 그것 이외에도 남자에게 무언가가 더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새하얀 안대로 가리고 있는 얼굴은 겉보기에는 유약했으나,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인간적인 본능이 소리쳤다.
어서 저것을 부숴야 한다고.
당장 베고 정화해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이런 건,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불길함이었다. 여태 그가 상대했던 어떤 적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수만 명을 학살한 폭군도, 인간의 피로 목욕을 한다는 마왕도, 흑마법의 정수라 불리던 세라 로젠바움조차도…….
“너는, ‘무엇’이지?”
확신에 가까운 직감을 얻은 에녹이 물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상대를 향해 ‘누구’냐도 아니고 ‘무엇’이냐고.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원하는 형태의 답은 아니었으나, 그 찰나에 드러난 감정으로 말미암아 에녹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는 에녹을 증오하는 자였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
남자가 내팽개치듯 에녹에게서 떨어졌다. 영웅의 몸을 깊이 꿰뚫은 저주의 창이 뽑혀져 나갔다. 부서져 벌어진 균열 사이로 사이한 기운이 이글거렸다. 그러자 희미하게 빛을 내뿜은 성검이 안절부절못하며 에녹의 몸을 치유하려 애썼다.
하지만 중앙 가시에서부터 쌓여온 부하로 인해, 치료는커녕 밀려드는 저주가 더는 퍼지지 않게 막는 게 고작이었다.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에녹은 곧장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남자는 무력하게 무너진 영웅의 꼴을 코끝으로 내려다보았다.
본인이 유리한 위치를 점했음에도 에녹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굳어진 얼굴은 좀처럼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남에게 대답해 줄 이름이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단어로도 남자가 무엇이고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머릿속이 칠흑을 헤매는 것처럼 시커멓게 엉켰다.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제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멋대로 죄인의 낙인을 찍어 영혼마저 갈기갈기 찢어 흩뿌렸다. 어딘가의 누구였던 자신을 이름도 뭣도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무엇인지는-.”
그러므로 남자의 증오는 타당하다.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남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파바박! 흐릿하게 남아있는 잔상을 뚫으며 날카로운 칼날 비가 쏟아져 내렸다. 에녹의 눈앞에서 사라진 남자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허무하게 찢긴 환영만이 남았다. 그 너머로 매서운 표정의 세라가 비쳤다.
이리 와.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세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에녹은 제 발밑까지 기어든 그림자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을 땐, 세라의 곁이었다.
“괜찮아?”
에녹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온 세라가 그의 상처를 보고는 멈칫했다. 검은 창이 찢어놓고 간 옆구리는 죽어서 부스러지는 별의 조각처럼 시커멓게 깨져 있었다. 성검이 부서진 몸을 수복하려는지 균열이 이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언제나 태산처럼 굳건하던 몸에 보기 흉한 상처가 남아버렸다. 그 순간 차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참아낸 세라가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움직일 수 있겠어?”
“아직은.”
“성검은-.”
하지만 곧, 한계에 다다랐는지 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녀는 지금도, 이전의 생에서도 에녹의 승리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어려서 처음 검을 잡은 그 순간부터 에녹 소서는 징그러울 정도로 강했고, 성검의 주인이 된 이후부터는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으니까.
에녹은 세라가 아는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패배를 모르는 영웅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정의의 현신이자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 사실은 세라가 살아있었을 적부터 시작해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뿌리 깊게 이어져 마치 하나의 진리처럼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믿음이 처음으로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세라는 에녹을 만난 후 처음으로, 이번에는 그가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성검은 얼마나 쓸 수 있어?”
불안한 마음을 겨우 다잡은 세라가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전력을 확인했다. 그녀의 부축을 받아 제대로 선 에녹이 성검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제대로는 한 번 정도.”
기회는 단 한 번.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감춘 세라가 주어진 패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남자에게 치명상을 입혀 쫓아 보내는 게 가장 그럴싸한 해결책이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상황은 상대가 아까와 같은 대규모 기습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거였다.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그만한 마력을 단시간에 두 번이나 이어서 사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분명 저주를 명하고 그것을 발동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틈을 만들게.”
그것만 아니라면, 세라가 마법으로 보조하고 에녹이 기회를 노려서 얼추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계산을 끝낸 세라가 에녹이 말릴 틈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마력을 끌어올린 그녀는 곧장 그림자를 여러 갈래로 쪼개어 남자를 향해 쏘아 보냈다.
그림자의 창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새카만 가시들을 보고서도 남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마력을 움직이지도, ‘목소리’를 쓰지도 않았다.
카가각!
순조롭게 뻗어나간 세라의 그림자가 남자의 살갗을 꿰뚫기 직전. 그녀가 쏘아낸 가시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남자를 향해 칼날을 세우던 그림자가 끝에서부터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
그에 세라의 두 눈이 크게 홉떠졌다. 마력의 움직임을 전혀 읽지 못했다. ‘목소리’도 듣지 못했고,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의미만으로 마력을 움직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타고난 마력의 농도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제 공격이 먹혀들지 않은 건가?
순간적으로 밀려든 의문을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세라의 저주를 무력화한 남자가 곧장 에녹을 향해 검은 창을 쏘아 보냈기 때문이다.
“에녹!”
식겁한 세라는 서둘러 그림자 속으로 에녹을 옮겼다. 파바박! 에녹이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그림자가 검은 창에 꿰뚫렸다. 으윽-. 심장이 꿰뚫린 것 같은 격통이 일었다. 와락, 미간을 구긴 세라가 가슴께를 움켜쥔 채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그녀는 서둘러 창에 꽂힌 그림자를 자신과 분리했다.
그리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안전한 그림자 속에서 에녹이 솟아올랐다. 아직 그는 운신이 불편해 보였다. 성검이 부상을 치료하기까지 아직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세라를 바라봤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으나 어째서인지 존재 자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다 아무런 전조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저 치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