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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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 한번…….”
약간의 희망을 느끼기가 무섭게 거대한 절망이 그녀의 발목을 낚아챘다.
바람이 멈추었다.
새카맣게 몰려든 저주가 마법을 잃은 마녀를 향해 쇄도한다.
바람을 일으키며 추락하는 새들이 포식을 시작했다.
회로를 뜯어 갈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영혼을 들쑤신다. 절벽에 매달린 세라의 영혼이 무자비하게 찢겨 나갔다.
“……!”
온몸에 덮쳐드는 끔찍한 고통에 하마터면 손을 놓칠 뻔했다.
차례로 조금씩 뜯겨 나가던 것과, 한꺼번에 짓이겨지는 건 그 통증의 정도가 달랐다. 이딴 걸 견뎠다가는 이곳에서 탈출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이 손을 놓고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기는 게 현명한 판단일지도 몰랐다.
“…….”
하지만 세라는 끝끝내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악에 받친 눈을 하고선 자신이 닿아야 할 하늘을 바라보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고통.
그 어느 때보다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나,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의 부친이라는 자는 스스럼없이 제 딸을 이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고, 그녀를 지상에 올려 보낸 신에게 의지하는 건 헛된 망상이었다. 평소처럼 이 모든 게 내 탓일 리 없다고, 당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손가락질해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숨이 막힐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세라의 의지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 뜯어라. 뜯어.”
나는 어떻게 해서든 저 하늘로 올라갈 테니.
호기롭게 읊조린 세라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버텨서, 기어코 위로 한 뼘 더 전진했다.
까아악!
그러기가 무섭게 검은 새가 투박한 발톱으로 그녀를 위협했다. 손속에 자비가 없는 그 몸짓에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이곳에서 떨어뜨리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으윽, 악문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샜다.
날카로운 발톱이 여린 몸을 할퀴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영혼을 마음껏 갈취해 가는 게 느껴졌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세라는 혼자였다.
딱 하나,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온기를 제외하고.
뀨우우! 뀨우!
세라의 어깨에 올라앉은 까망이가 달려드는 새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다 몇몇은 까망이의 배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으나, 그게 수적인 열세를 뒤집어 줄 정도는 아니었다.
방해하는 까망이가 거슬렸는지 세라를 노리던 발톱 중 일부가 뱀에게로 향했다. 사납게 울부짖은 새들이 제 주인을 보호하는 뱀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뀻… 뀨웃!
공격당한 까망이가 아픈지 소리 높여 울었다.
충성스러운 검은 뱀은 제 몸이 적들의 발톱에 베여 나가는 와중에도 제 기다란 몸을 어떻게든 빈틈없이 겹쳤다. 세라에게 향하는 공격을 최대한 막아 내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이 똑똑히 느껴졌다. 이 세상 끝까지 세라와 함께 갈 기세였다.
정말이지 미련스러울 정도로 맹목적인 뱀이다.
“……으이그. 이 바보.”
세라는 그거면 되었다.
그 따뜻하고 기특한 마음 하나면, 조금 더 힘을 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닮은 미소를 내쉰 세라가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있는 까망이를 제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를 보호해 주던 뱀이 사라지자, 포식자들의 공격은 오롯이 그녀에게 향했다.
뀨우웃?! 뀨웃?!
난데없이 최전선에서 끌려 내려온 까망이가 놀란 듯이 꿈틀거렸다. 품속을 빠져나가고 싶은 것처럼 몸부림치는 뱀을 상처투성이의 손이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넌 거기 있어.”
내가 지켜 줄게.
다정하게 까망이를 달랜 세라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씨익, 웃는다. 품 안에 갇힌 기다란 몸뚱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
이슬처럼 맑은 짐승의 눈동자가 그 미소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세라는 조금 더 그 눈과 시선을 맞추고 싶었으나 상황이 도무지 도와주지 않았다.
으드득. 으득.
소란스러운 날갯짓 사이로 영혼이 뜯겨 나가는 소리가 선득했다.
“진짜, 이… 인정머리 없는 것들.”
그토록 잔인한 고통 앞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차라리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만약 이 일이 스스로를 위한 일이었다면, 그녀는 새의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었을 때 이미 이곳을 오르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라가 품은 염원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에녹 소서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수백 년을 혼자 병들어 가던 미숙한 남자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세상 모든 사람을 구해 주는 주제에, 자신을 돌볼 줄은 모르는 바보 같은 연인을 지키기 위함이다.
쩌적…….
그때,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주변으로 희미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빛은 여러 차례 찢기고 뜯겨 볼품없이 너덜거리는 영혼으로부터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안개처럼 흐릿하던 빛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그녀를 공격하던 새들이 경계하듯 거리를 벌렸다. 소란스러운 날갯짓을 퍼덕이며 어떻게든 그 빛에 닿지 않으려 애를 쓴다.
시커먼 심연의 밑바닥에 영롱한 빛이 너울거렸다.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당사자인 세라였다. 또다시 한 뼘, 앞으로 나아간 세라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절대, 포기 안 해.”
굳게 다짐하는 두 눈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깨끗했다.
늘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표독스러움이나 비틀린 오기, 기어코 비극을 부르던 독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세라는 한평생 누군가를 저주하는 힘으로 살아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살게 하는 건, 저주도 증오도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위태롭게 너덜거리던 영혼에 기어코 깊은 균열이 일었다. 쩌저적. 쩌적!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부서진 껍데기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떨어져 나가는 조각이 많아질수록 심연을 비추는 빛도 찬란해졌다. 오래전 자신의 부친이 억지로 덧붙여 준 외피가 쓸려 나가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찬란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찬란함은 결코 한순간에 완성된 어설픈 기적이 아니라, 세라 로젠바움이라는 인간이 타고난 본연의 빛깔이었다. 그녀는 사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세라 로젠바움.
사악한 흑마법사, 나라를 팔아먹은 독한 년, 죽지도 않을 악마 새끼.
온 지상의 증오를 한 몸에 받던 그 순간에도.
그녀가 바란 소원이라곤 세계 멸망도, 전쟁도, 금은보화도 아닌.
앞이 보이지 않는 가여운 동생, 에델 로젠바움의 안위뿐이었으니.
또다시 지킬 사람이 생긴 세라는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했다.
제 몸이 부서지고, 땅바닥을 구르는 일엔 이골이 났다. 새삼스러울 정도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하지만 너만은 온전하게 남아야 한다.
염원을 담은 손짓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간다. 이상한 일이었다. 세라의 영혼은 이미 손쓸 틈 없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으나, 그것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은 점점 그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에 심연의 귀퉁이로 쫓겨났던 짐승의 무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도저히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빛무리에 위협을 느낀 검은 새들이 사납게 눈을 번뜩였다. 잠시간 소강상태에 들었던 새 떼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우글거리는 그림자들이 한데 모여 매섭게 휘몰아쳤다. 예전의 기세를 되찾은 검은 새들은 이 이상 자신들의 먹잇감이 기세를 떨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로 했다. 이제 세라에게 남은 영혼은 부스러기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 그들은 여전히 유리한 상태였다.
불길하게 울부짖은 검은 폭풍이 주제넘게 찬란한 사냥감을 향해 하강한다.
그리하여, 정반대의 기운을 가진 두 기운이 충돌하는 순간.
눈 부신 빛이 심연을 집어삼켰다.
“…….”
세라의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녀는 정확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얗게 타 버린 시야 때문에 그녀가 계속 깨어 있었던 건지, 잠시 정신을 잃었던 건지 확실히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마음이 묘하게 편안했다.
“……?”
그러고 보니,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빠질 것처럼 아프던 두 팔도, 금방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처럼 위태롭던 의식도 평화롭기만 했다.
멀쩡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세라는 어느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절벽에 매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거지?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세라가 지극히 당연한 의문에 휩싸였다. 그때, 두 눈을 가리던 새하얀 장막이 걷혀 나가고 서서히 시력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세라는.
“…….”
자신이 떠나온 곳에 서 있었다.
스산한 공기, 공허할 정도로 거대한 공간, 죄인들을 위한 엄중한 심판대.
그 너머에 앉은 존재가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라는 실로 오랜만에 재회한 신을 향해 물었다.
“……저 혹시, 죽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