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90
289
신이 대답했다.
“아직은.”
그에 세라는 안도를 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이라고 했으니 지금 당장 죽어 버린 건 아니라는 뜻이겠으나, 어쩌면 곧 그렇게 될 운명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같았다.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지금의 세라는 죽었다고 말하기도 살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태였다. 영혼이 하도 뜯겨 나간 탓에 오락가락하는 중이었다. 이를테면 그녀는 지금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에 빠진 거였다.
전문 용어로는 반죽음. 본인은 모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한 발은 지옥에, 다른 한 발은 지상에 걸친 채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신이 겨우 알맹이만 남아 있는 영혼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감상을 읊조렸다.
“더는 저주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구나.”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언뜻 축하라도 해 주는 듯한 어조였다.
하긴, 흑마법이란 신을 거스르는 불길한 힘에 불과했다. 세라의 입장에서는 유일한 장기를 잃은 셈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눈엣가시 같은 죄수가 그나마 깨끗해진 것처럼 보일 테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당사자 앞에서 은연중에 티를 낼 일인가.
“그래서, 이제 속이 후련하십니까?”
쥐꼬리만 한 신의 배려심에 세라의 입매가 절로 비틀어졌다. 신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심드렁히 대꾸했다.
“무엇 하러.”
“안타까운 척이라도 좀 하세요. 제가 능력을 잃으면, 형량 깎는 데 지대한 영향이 있는 거 아시면서.”
“우스운 착각을 하고 있구나. 세라 로젠바움.”
세라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신이 단호하게 상황을 바로잡아 주었다.
“너는 잃은 게 아니라, 네 것이 아닌 것을 드디어 떨쳐 낸 거다.”
설마 고작 그거 하나 믿고 널 지상에 올려 보냈을까.
신이 어쩜 그렇게 한 치 앞도 모르냐며 세라를 타박했다. 애초에 그녀가 가진 저주의 힘 따위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다는 태도다.
“뭐야, 제 마법을 믿고 냅다 쫓아 보낸 게 아니라고요?”
그에 세라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비틀린 운명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며 별의 조각만 덜렁 들려서 그녀를 다짜고짜 지상으로 올려 보냈을 때, 세라는 신이 그녀가 지닌 마력 회로의 힘을 믿고서 그렇게 행동한 줄 알았다.
아무래도, 세라 로젠바움이 가진 가장 큰 무기가 바로 흑마법이었으니까. 그래서 서슴지 않고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신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세라의 흑마법은 형량을 깎는 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다 세라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다. 뒤통수가 다 얼얼할 지경이다.
“그럼, 대체 뭘 믿고 절 지상으로 올려 보내신 거죠?”
“갑자기 아둔한 질문을 하는구나. 당연히, 비틀린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서지.”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다 알면서, 신은 부러 모르는 척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곧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빙빙 돌리는 이유야 뻔했으나, 세라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고요!”
그건 그녀가 남자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챈 순간부터 자리 잡은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아무리 운명이 엉망으로 비틀렸다고는 하나, 신의 방식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결국 남자가 원한 건 그가 오래전에 세라에게 넘겨준 마력 회로와 영혼이었다. 신이 정말로 지상을 수호하고 싶었다면, 세라를 그가 있는 곳으로 올려 보낼 것이 아니라 영영 남자의 손에 닿지 못하는 지옥에 처박아 두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신은 남자가 활개 치는 지상에 세라를 떡하니 들이밀었고, 남자는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 그녀가 남자에게 영혼을 빼앗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세상은 매분 매초 종말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라의 영혼이 완전히 그의 손에 넘어가면, 이 세상은 멸망하겠지.
이게 다, 그녀가 지상에 올라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도 신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듯 담담하기만 했다. 다급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은 세라뿐이었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뭐, 결정적인 순간에 짠, 하고 나타나서 해결해 주시려고요?”
그녀는 그가 대체 무엇을 믿고 저리도 태평한지 궁금했다. 그래서 내심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가장 희망적인 가능성을 입에 올렸다. 신 또한 지상이 사라져서 좋을 게 없으니, 여차하면 그가 직접 강림하여 남자를 쓰러뜨려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부서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라 로젠바움.”
야속한 절대자는 간절한 피조물의 마음도 모르고, 이 세상에 그런 손쉬운 해결책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운명은 너희가 스스로 이겨 내야 하는 물살이다. 거기에 내 도움이 끼어서야 의미가 없지.”
“…….”
말을 마친 신이 세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결국, 이 난관 또한 세라가 알아서 이겨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할 테지만, 그게 기쁘다기보다는 무겁게 느껴졌다. 신의 의지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세라가 미미하게 얼굴을 굳혔다. 답지 않게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내키지 않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신을 힐끗 올려다보며 작게 웅얼거렸다.
“그러다…… 제가 또 망치면요?”
저는 나라도 두 번이나 팔아먹은 나쁜 년인데요.
자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세라가 조마조마한 눈으로 신을 올려다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라 로젠바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더러운 흑마법사에, 나라를 두 번이나 팔아먹어 지상을 개판으로 만든 형량 5억 년짜리의 죄수일 뿐이다.
“너를 줄곧 지켜보았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가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가 손짓하자 허공에 황동으로 만들어진 액자가 주르륵 나타났다. 반듯하게 줄 맞춰 선 액자 안으로 서서히 상이 어렸다. 그건 세라가 지상에서 보냈던 지난 1년에 관한 기록이었다.
되살아난 그녀가 가장 처음 구한 사람은 부상을 입고 가시에 갇힌 세이옌이었다. 그다음은 과로사를 앞둔 레니스. 그다음은 습격받아 위험에 빠진 시그너스 길드원들. 에녹을 덮어서 막아 낸 폭발, 헤타의 눈보라에 고통받는 북부 마을 사람들, 파산의 위기에 빠진 시그너스를 위해 데려온 비제, 오빠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한 아퀼라, 회로가 뜯겨 나간 에스텔라, 낙인이 찍혀 영영 잠들어 버릴 뻔한 길드원들, 불에 타들어 가던 요정의 숲, 스스로를 바쳐 저주를 막으려던 진,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호하던 까망이를 제 품속에 고이 품어 낸 것까지…….
그 외에 사소한 실수로 생을 잃을 뻔한 자들을 구해 낸 건 셀 수도 없었다.
“…….”
이렇게나 많았던가……?
기억을 더듬던 세라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낯익은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충분히 돌아볼 시간을 준 신이 다시 한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빼곡히 자리 잡은 얼굴들이 사라지고, 근엄한 신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많은 이들을 구원했다.”
“…….”
“그게 오롯이 형량 때문이었을까?”
그는 세라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지상으로 돌아간 세라 로젠바움은 형량을 줄이기 위해 살았다. 그러나 정말 그게 전부였다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손해 보지 않고 살려만 둘 방법은 충분히 많았다.
하지만 세라는 자신이 편할 수 있는 길을 두고,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을 지켰다.
“너는 스스로를 증명했다.”
그 내면에 선의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떠한 계산도, 거짓도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 그것이 세라 로젠바움이 숨기고 있던 그녀의 본질이었다.
“그거면 충분하겠지.”
시원하게 결론을 낸 신이 이만 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세라의 머리 위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땅에 잘 붙어 있던 두 발이 떨어지며, 세라의 영혼이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가 가고 싶지 않다는 듯 사지를 허우적거렸다.
“자, 잠깐! 저 진짜 그냥 보내시게요? 하다못해 영혼이라도 좀 고쳐 주시든가!”
이 꼴로 돌아가서 뭘 어떻게 하라고…!
그녀의 간절한 요청에도, 신은 여전히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하거라.”
“하던 대로 어떻게 해요! 이젠 흑마법도 못 쓰는데!”
대화가 자꾸만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녀가 보기에, 신은 자신을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라의 영혼은 착실히 빛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으아악! 안 돼! 결국 신과의 만남에서 얻은 수확이라곤, 그에게 착한 아이라며 칭찬받은 게 전부였다.
그걸 어디다 쓰냐!
세라가 절규했다.
그게 가여워 보이긴 했는지, 신이 선심 쓰듯 힌트 비슷한 말을 던져 주었다.
“조급해하지 마라. 너는 이미 방법을 알고 있으니.”
“제가……?”
세라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두 손을 가슴에 포갰다. 자신이 뭘 알고 있는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운명은 강물과도 같아서 생이 끊어져도 계속해서 이어지지.”
신이 점점 멀어진다.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리고, 영혼이 무언가에 낚인 듯 하늘을 향해 쑤욱, 솟아오른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모든 감각이 안개가 낀 듯 희미해졌다.
“그러니 한번 잃어버렸다고 절망하지 마라.”
하지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신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다. 진리인 것도 같고, 예언인 것도 같은 신의 전언이 이어지는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손을 놓치더라도 그 흐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 한,
돌고 돌아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