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300
299
없다.
세라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현실을 외면하려 애쓰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폭발과 빛무리의 여파로 쓰러졌던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세라는 그 사이에서 눈에 띄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찾으려 했었다.
없다.
이번에는 제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길한 저주가 깨끗하게 날아간 그곳엔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다음은 반쯤 무너져 내린 협곡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에녹이, 없다.
어디를 봐도, 무엇을 봐도,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을 샅샅이 찾고 또 찾아도.
그가 없다는 사실만 확실해질 뿐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숨을 멈춘 세라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시선이 아주 오랜 시간 방황하다 햇빛이 내려앉은 대지. 그 위에 홀로 남은 성검으로 회귀했다.
아직도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검이 길게 공명했다. 그게 세라의 눈에는 꼭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광경을 부인하고 싶은 것처럼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떠올라 버린 말이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세라가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녀는 숨조차 함부로 내쉬지 못했다. 곁에 선 마커스가 계속해서 에녹의 행방을 물어보고 있었으나 답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한마디라도 내뱉으면, 그게 현실이 되어 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소리 내어 내뱉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서 수런거린다.
마커스. 마커스 이상해…. 에녹이 없어.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막는 동안, 그 애가 공격해서 끝내기로 했었거든. 분명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 그 애가 나랑 했던 약속을 어길 리가 없는데….
넋이 나간 것처럼 이어지던 문장의 말미에 어떤 기억이 함께 딸려 나온다.
마지막 남은 방어막으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때, 그녀는 죽음이 자신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곧 죽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억울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에녹을 믿었다.
그녀가 버티는 만큼, 그가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겠다고.
등 뒤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을 때도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세라를 지나쳐 남자에게로 달려들어야 할 빛이 그녀 대신 저주를 밀어내는 것을 느꼈을 때-.
세라는 직감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뒤를 돌아본 곳에 에녹이 있었다. 들어 올린 검 끝은 남자를 겨누고 있지조차 않았다. 성검이 내뿜는 강력한 생명의 힘에 감싸인 그 애는 부서지는 빙하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평소와 똑같이 웃고 있었다.
그것이 작별 인사였던가.
멍하니 성검을 바라보던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작별 인사였던가?
“사, 상처가 나았어!”
“내 다리도…!”
그때, 정신을 차린 길드원들이 소란스럽게 술렁거렸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들의 몸을 더듬대는 그들은 부상이 나았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다들 영문을 몰라 했으나, 세라는 알았다.
에녹이 마지막으로 전부 고쳐 주고 간 것이었다.
언제나 여자만 치료해 준다며 툴툴대던 길드원들의 한이라도 풀어 주고 싶었나. 마지막이라고 인심 좀 썼네.
“…….”
생각이 끊어진다. 반쯤 벌어졌던 입술도 다시 다물고, 세라는 또 순간적으로 호흡을 잊었다.
“세라. 너… 괜찮아?”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마커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세라는 그런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 자신을 걱정하지? 그녀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저주를 막느라 생겼던 상처도 다 나았고 마력도 다시 차올랐다. 지금 당장 남자와 다시 싸우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을 정도다.
이게 다 에녹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세라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웃고 있었지……?
어쩌면 에녹은 세라 대신 자신이 희생하는 게 기뻤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에 나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못 견뎌 하던 녀석이었으니까.
에녹의 희생은 성공적이었다.
세라는 살았고, 남자는 사라지고 있었으며, 길드원들의 부상도 다 나았다. 전쟁이 끝났으니 세라의 형량은 모조리 삭감될 테고, 이제 그녀는 마음 편히 환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만 깊게 남았다.
……왜 웃고 있었던 거지? 뭐가 그리 기뻐서?
이렇게 멋대로 구원을 안겨 주면, 그녀가 고마워서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나?
거기까지 생각한 세라가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개소리.”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가 기쁘게 눈을 감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죽음을 예상하던 때도 들지 않았던 억울함과 분노가 몰려왔다.
에녹의 마지막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왜 웃고 있었지?
너는 그렇게 사라져서는 안 됐다. 그녀는 이런 식의 결말에 어떠한 동의도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런 결과에 닿아서는 안 됐다. 원래라면, 원래라면…….
‘지금 하는 일, 다 끝나고 나면 나랑…… 멀리 가서 살래?’
우리는 남자를 쓰러뜨리고 함께 떠나기로 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것처럼 살 예정이었다. 비록, 그녀가 사라질 결심을 하던 순간부터 이루지 못할 약속이었다고 해도, 너는 그렇게 사라져서는 안 됐다.
‘사랑해. 세라 로젠바움.’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가 너무 좋아서, 마음이 너무 아파.’
나를 너무 사랑해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잖아….
그러니 너는 나를 두고 가서는 안 됐다. 나는 너를 두고 갈 생각을 해도, 너는 그래선 안 됐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너는 어떤 사람이어도 다 괜찮아.’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한 건 너니까. 그 정도로 나를 잘 아는 너니까. 그러니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너는 이해해 주어야 했다.
‘너 하나 잃는 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싫어.’
내가 죽음 앞에서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이유는 너였다. 세상도, 복수심도, 형량이나 환생 때문도 아닌, 그냥 널 잃는 것만큼은 도저히 해낼 용기가 없어서 그랬다. 그런데 네가….
호흡이 자꾸만 가빠졌다. 터져 나갈 것처럼 아파 오는 폐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쓰는 세라의 귓가에서 에녹의 목소리가 사라지질 않는다.
‘사랑해. 세라 로젠바움.’
거짓말.
‘상관없어. 너만 있으면.’
거짓말. 전부 거짓말이다.
네가 정말 날 사랑했다면, 나만 있으면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를 혼자 남겨 둬서는 안 됐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세라가 주먹으로 대지를 내려쳤다. 힘주어 내려친 자리가 움푹 파였다.
여린 살갗에 다시 상처가 새겨졌으나 세라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 상처가 생겼다며 울상을 지을 남자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보다는 갈 곳을 잃은 이 감정을 어떻게든 해소하는 게 더 중요했다.
주먹을 거둔 세라가 다시 한번 대지를 내려쳤다.
그리고 또 한 번, 또 한 번…. 계속해서 주먹을 휘두른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모든 언어를 가져가 버렸다. 그녀는 짐승처럼 울분 섞인 숨만 씨근대며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를 생각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숨 쉬는 법조차 잊은 그녀와는 달리, 그 남자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채, 부서진다.
세라는 제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 미소를 향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돌아와.
돌아와, 에녹 소서!
누가 네 멋대로 사라지라고 했어?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잖아.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너도. 너도 그때는 이해하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자신의 말대로 다 해 줄 것처럼 했으면서, 에녹이 자신을 속였다.
“……용서 못 해.”
꽉 맞물린 잇새로 감정이 지글지글 끓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바닥에 처박혀 있던 시선이 성검을 타고 올라간다. 홀로 남은 성물이 그 남자라도 되는 양 노려본다.
절대 용서 못 해. 이번에는 네가 봐달라고 해도 안 봐줄 거야. 거짓말이나 해대는 너 같은 거. 자기 목숨 챙길 줄도 모르는 멍청한 자식 따위 다시는 거들떠봐 주지도 않을 거다.
홧김에 떠오르는 대로 지껄인다.
너 같은 녀석은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리워하지도 않을 거고 고마워하지도 않을 거다. 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너 같은 건 절대 찾지 않을 거야. 기억 하나 남기지 않고 싸그리 잊어버릴 거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세라. 그만해! 그만! 너, 너 그러다 쓰러지겠어!”
마커스가 식겁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세라는 자신을 말리는 팔을 거칠게 떨쳐 냈다. 그가 자신이 한 나쁜 말들을 들은 것 같았다. 왜 나를 말리는 거야? 잘못한 건 에녹이란 말이야. 하지만 벌어진 잇새로 튀어 나간 건 전혀 다른 소리였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울면서, 무어라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르고, 주먹이 해지도록 땅을 내려치면서, 무언가를 미치도록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길드원들이 슬픈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 눈들이 이제 그들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세라를 말리던 마커스가 더는 그녀를 말리지 못하고 물러났다. 덕분에 세라는 다시 자유가 되었다.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오히려 서러워졌다. 손등에 새겨진 상처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것이 누군가의 상실을 실감 나게 했다.
에녹이 없다.
그 애가 자신을 두고 가 버렸다.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더니, 정말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 버렸다.
“…….”
오래도록 울부짖던 세라의 어깨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던 그녀가 일순 매서운 눈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성검의 칼날을 바라본다.
지금 죽으면, 그 애를 볼 수 있을까?
그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이 그녀를 움직였다. 앞으로 달려간 세라가 겁도 없이 덥석 검날을 움켜쥐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