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60
59
그렇게 서로를 물어뜯다 보니 밤이 훌쩍 찾아왔다.
예상했던 목적지보다 훨씬 덜 미치는 곳에 마차를 세운 일행들은 적당한 곳을 찾아 노숙을 하기로 했다.
“지붕 없는 곳에서 자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모닥불을 바라보던 비제가 우아하게 차를 들이켰다. 처음 겪어 보는 노숙이 불만스러울 만도 한데, 은근히 들뜬 목소리를 듣자하니 내심 기대가 되는 눈치였다.
“앞으로는 쭉 노숙이야. 마차 때문에 산을 넘지 못하니까, 먼 길로 빙 둘러 가야 하거든.”
아주 불편하고, 피곤하지.
에녹은 적나라한 현실을 알려 줌으로써, 설레는 소녀의 마음에 초를 쳤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요?”
“오늘 같은 속도면 앞으로 일주일은 더.”
일주일이나 노숙할 생각에 세라는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했다.
“시그너스 길드는 생각보다 더 멀리 있었군요.”
하지만 비제는 여정이 길어진다는 소식에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타르딘에서 멀어질수록 신이 나는 모양이다.
그러다 표정을 갈무리하고 짐짓 도도한 척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저 같은 인재를 데려가다니. 영웅님은 운이 좋네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자화자찬이었다.
역시 만났어야 할 운명이라서 그런가, 과연 그 길드장에 그 길드원이었다.
“그냥 대장이라고 불러.”
반면 에녹은 ‘영웅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호칭을 바로잡아 주었다. ‘영웅님’이라고 불리면 한껏 거들먹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길드원은 다 그렇게 부르니까.”
“……!”
무심하게 덧붙인 말에 비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의 감정을 대변해 보자면, 아직 길드에 입성하기도 전에 일원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뻐하는 중이었다.
“언니는 면역자인데 어쩌다 길드에 들어갔어요?”
비실거리는 입꼬리를 눌러 삼킨 아이가 이번에는 세라를 향해 관심을 돌렸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에는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어서 혼났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신의 길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세라가 최대한 핵심만을 담아 대답했다.
“너랑 비슷해.”
“오오-.”
“목숨값을 노동력으로 갚고 있는 중이야.”
“오오오-.”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제는 세라를 향해 짙은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를 보면서도 말이다.
아이가 세라에게 바짝 다가 앉는다.
그리고 확실히 아까보다는 더 친근해진 어조로 속삭였다.
“돌아가면 계약서 구경시켜 주세요.”
“응?”
“언니가 목숨값을 갚기로 약속한 계약서요.”
노예 증서랄지, 목숨값을 얼마 정도로 측정을 했는지, 어떤 식으로 갚을지, 언제까지 갚을지, 일정 수준의 노동력을 얼마의 가치로 치환하기로 했을지 어쩌구저쩌구…….
난데없이 계약서를 구경시켜 달라고 한 비제가 막힘없이 술술 궁금한 사항을 하나하나 꼽아 나갔다.
“……?”
물론, 세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예가 그냥 노예지. 증서가 필요해? 그녀가 살았던 시절에는 아무나 잡아서 너는 오늘부터 내 노예다. 라고 하면 노예가 되었다. 증서 대신 몸에 지우지 못할 낙인을 새기는 게 계약서라면 계약서겠지만…….
세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거, 없는데?”
“예?! 아니, 언니. 그런 것도 제대로 안 정해 놓고 순순히 노예가 된 거예요?”
그래서 없는 대로 이야기했더니, 비제가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한심함과 가여움이 적당히 섞인 눈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언니, 좀 순진하구나?”
“……?!”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표현에 이번에는 세라가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에녹이 끼어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만 자.”
단호하게 대화의 맥을 끊어 버린 그는 비제에게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느냐며 눈치를 주었다. 하필 이 순간에 끼어들다니. 참으로 공교로운 타이밍이다.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예에…….”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비제가 힘내라는 듯이 세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잘 자요. 언니.”
그냥 들어가서 자도 되는데, 굳이 손까지 흔들며 밤 인사를 건넨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아이다. 진짜 순진한 사람이 누군데. 마차의 짐칸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세라가 태연히 잠자리를 준비하는 에녹을 호명했다.
“주인님.”
뭔가 켕기는 게 있는지, 침낭을 펼치던 에녹의 등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시간 차를 두고 에녹을 바라본 세라가 방금 생긴 의혹을 입 밖으로 꺼냈다.
“비제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에 에녹이 언제 멈췄냐는 듯 자연스럽게 동작을 이어 가며 대꾸했다.
“시효가 한참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으음.”
다소 뻔뻔한 말이었으나, 놀랍게도 불만스럽다거나 하지 않았다. 만약 며칠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제대로 된 계약서를 쓰자며 달려들거나, 난 당신의 노예가 아닌 거라며 관계 청산을 주장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에녹의 곁이 얼마나 안전하고 쾌적한지 깨달은 게 바로 어제였다. 세라는 굳이 이제 와서 공짜로 영웅에게 빌붙을 수 있는 자리를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예 취급당하는 게 기쁜 건 아니다만, 어차피 길어 봐야 3년뿐일 테고…….
갈수록 늘어가는 자기 합리화 실력에 감탄하며,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벌써 침낭 속에 들어간 에녹에게 다가갔다.
“……왜?”
에녹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세라를 올려다봤다.
방금 전의 일로 제게 해코지라도 하려는 줄 오해한 것이다.
이젠 그럴 생각 따위 추호도 없는 세라가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추워요.”
에녹이 설핏 미간을 찌푸린다.
“어쩌라고.”
그는 이번에도 아무거나 주워서 덮고 자라는 듯 주변을 턱짓했다.
누가 뒤끝 긴 영웅 나리 아니랄까 봐, 말을 좆같은 몬다는 비난을 아직까지도 분해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위대한 대마법사 세라 로젠바움은 그릇이 큰 위인이었기에, 방금 전의 앙금 따위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얼굴로 재차 말했다.
“추워요.”
그녀는 오늘도 춥게 잘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숲이 멀고, 주변 풀이 전부 젖어있어서, 마땅히 덮고 잘만한 게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에녹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겠지만, 세라는 과거의 원한을 벗어버리고 그를 유용하게 써먹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세라는 에녹이 인간 난로로써 탁월한 기능이 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게다가 오늘 밤 그와 함께 자면, 언제 다쳤는지 모르게 생긴 상처들도 전부 치유되어 있겠지. 물론, 몸을 맞대고 자면 기분이야 조금 이상해지겠지만.
모름지기 희생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법이니, 그 정도야 눈감아줄 수 있었다.
“…….”
이렇게 대놓고 판을 깔아 줬는데도, 에녹은 답지 않게 그 말을 한참이나 못 알아들었다. 시커먼 속내를 감춘 세라는 그의 답을 기다렸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침묵 끝에, 그가 단단히 여미고 있던 침낭을 슬쩍 열어젖히며 물었다.
“그래서 뭐, 여기로 들어오겠다고?”
“감사합니다.”
세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제안을 덥석 물었다.
에녹의 품으로 날름 파고든 그녀는 제대로 자세를 잡고 누웠다. 다행히 침낭이 꽤 널널해서 두 사람이 들어가도 공간이 조금 남았다.
“햐아-. 진짜 효율 좋네요.”
에녹의 가슴팍에 코를 묻은 세라는 진정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잠들었다.
에녹에 대한 모든 경계심을 풀어 버린 세라는 그렇게나 빠르게 꿈나라로 직행했다. 고로롱. 고롱. 숙면을 취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비제도 자고, 세라도 잔다.
잠들지 못한 사람은 단 한 명, 에녹뿐이었다.
“…….”
그는 아주 잠이 싹 달아난 눈으로 모닥불을 한 번, 제 품에 잠든 세라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다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대체, 날 죽이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애매한 상황에 에녹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세라를 훑었다.
사실, 그는 여행길에 오른 첫날부터, 그녀가 자신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
본인은 잘 숨겼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을 타고 여행하는 내내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게 너무 티가 나서. 뒤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노예는 평소처럼 똑같이 툴툴대다가도, 이따금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분명 에녹의 목숨을 노리는 자의 눈빛이었다.
누군가가 에녹의 죽음을 바라는 건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몹시 오래 살았고, 수많은 전쟁을 겪었으며, 적도 그만큼 많았다.
이제 와서 제 노예가 살심을 품었다는 사실에 무언가를 느낄 정도로 감성적인 인물이 못 되었다.
오히려, 한주먹 거리도 안 될 게 그런 대담한 생각을 하다니, 우습고 기특해서 언제 칼을 들고 달려들려나 기대가 되기까지 했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상대가 원하는 바는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럼 그냥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곤히 잠든 노예를 향한 주인님의 눈초리가 차갑게 식었다. 제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에녹은 그녀가 마음에 품은 뜻을 행동으로 옮긴 순간 잘라 내려 했었다.
자신을 증오하는 이를 곁에 두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노예가 시도하기 편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기까지 했었다. 말을 몰 때 일부터 틈을 보이고, 찌르기 좋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등을 맡기고, 저택에서 잠들 때에는 문을 잠그지 않으면서, 헤타를 잡으러 갔을 때에는 보란 듯이 절벽을 등지고 앉기도 했고…….
하지만 노예는 그 수많은 기회를 전부 흘려보냈다.
죽이라고 기대게 해 주었더니 진짜로 잠만 잤고, 등을 내어 줬더니 열심히 감상만 했다. 몰래 침입하기 좋게 방문을 열어 놓아도, 밤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독 열매를 따서 입에 밀어 넣어 보려고는 했었지만 그마저도 에녹의 이야기를 듣고 제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고서는 그의 무릎 위로 굴러들어 와 애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살려 주실 수 있나요?’
수백 년을 산 에녹도 순간적으로 당황할 정도의 뻔뻔함이었다.
보통 본인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안 매달리지 않나. 에녹은 일반적인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난 그 행동이 아직도 기가 막혔다.
뿐이랴, 건방진 노예는 감히 에녹을 동정하기까지 했다.
헤타르딘 때문이었다. 그곳에 사는 놈들은 그에게 언제나 무례하게 구니까.
충성심이나 유대감 따윈 조금도 없는 주제에, 노예는 자신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확인할 때마다 불쾌함을 드러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웃기는 일이었다.
“저는 죽이려고 했으면서.”
틈만 나면 그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기회를 줘도 받아먹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면 들어주고, 그에게 원인 모를 동질감을 느끼면서, 고작 말 몇 마디에 계획했던 일을 포기한다.
그리고 지금은 에녹의 품에서 잠들어 있고 말이다.
여태 에녹의 목숨을 노렸던 사람 중에 이토록 게으르고, 일관성 없고,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는 암살자는 처음이었다.
이쯤 되면, 자신을 정말 증오하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냥 죽일까?’
그리하여, 에녹이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필요 없이 말끔하게 원인을 제거해 버릴까 고민하던 그 찰나였다.
“……?”
불현듯, 이 비슷한 상황을 예전에도 경험한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정확히는 에녹이 직접 겪은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일을 전해 들었던 일이었다.
그러니까, 몇 년 전에. 스노우의 오랜 애인이 칼부림을 하면서 그에게 달려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목격담에 따르면, 스노우의 애인은 진심으로 그를 죽일 기세로 검을 뽑았다고 했다.
‘스노우, 살해당할 뻔했다면서.’
그 소식을 하루 늦게 전해 들은 에녹이 물었다.
‘그래서, 네 애인은 어디에 묻었어?’
에녹은 당연히 스노우가 애인을 해치웠다고 생각했다.
‘에이, 대장. 무슨 그런 살벌한 소리를 해.’
하지만 스노우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과장스럽게 놀랐다.
‘질투가 다 그런 거지.’
팔과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꼴을 하고도, 그는 아직도 사랑에 빠진 얼굴로 환히 웃었다.
‘너무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당시에는 너무 좋아해서 죽여 버리려고 하다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나 싶었다.
하지만.
“…….”
에녹은 스노우의 말을 곱씹으며 지난 며칠간 그를 고민케 했던 노예의 일관성 없는 행동들을 돌이켜 보았다.
경계하다가도, 몸을 기대고, 죽이려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포기하고,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굳이 침낭이 하나 더 있는데도 품을 파고든다.
그동안, 에녹의 머릿속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 하나가 똬리를 틀었다.
만약, 노예가 자신을 정말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저 스노우의 애인처럼 질투했을 뿐이라면?
그러고 보니 노예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게, 그녀가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에 잘되었다고 한 직후였다. 그 말이 못내 서운해서 투정을 부린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마냥 증오와 분노가 섞였다고 보기에 애매했던 행동들이 착착 앞뒤가 맞아떨어져 갔다.
“아니라더니.”
마침내 해답을 찾아낸 에녹이 허탈한 웃음을 내쉬었다.
길게 고민했던 만큼 개운한 표정을 한 영웅이 기꺼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얘, 나 좋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