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98
098 콜라보 드로잉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와우. 역시 사장님 별장답네요.”
“···오해라니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예나의 부탁. 이후 우리는 박정호에게 작업실을 안내받았다.
예술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별장답게 큼지막한 작업 공간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고, 그림 도구도 충분한 상태.
“이 정도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잠시만요. 예나···.”
나는 뒷말을 삼켰다.
오늘의 주인공인 예나에게 의사를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녀는 진즉에 김하영을 데리고 도화지 앞으로 달려나간 상태였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감사합니다.”
“필요한 게 생기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고개를 숙여 보인 박정호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중세 판타지 귀족의 집사장이나 보일 법한 움직임이라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간신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강바다가 말을 걸어왔다.
“예나가 어떤 그림을 그리려는 걸까요?”
“···글쎄요.”
강바다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으니.
일단 작업실까지 따라오기는 했으나, 예나를 제외한 어른들은 모두 얼떨떨한 상태였다.
“···설마 예나가 먼저 눈치챌 줄이야. 평소에도 비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이태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하영이 친모라는 사실을 어떻게 전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으니까.
원래 아이들은 눈치가 좋은 편이고, 그중에서도 예나의 관찰력이나 사고력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기는 했다만.
“뭐, 좋게 생각하면 예나의 재능이 단순히 그림에만 치우치지 않았다는 증거겠지.”
무엇보다 특수한 환경에서 자라난 영향이 크겠지만. 굳이 뒷말까지 내뱉지는 않았다.
조금 전부터 강바다의 표정이 무척이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나와 김하영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삼켰다.
“···저는 예나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지는 않길 바라는데. 이미 늦어버린 걸까요?”
강바다의 목소리 축 처졌다.
확실히 혼란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김하영을 다독이는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지.
만약 내가 예나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어떻게 행동할지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만큼 예나가 살아온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증거이기에 모두가 침묵을 삼켰던 거고.
“그래도 너무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고 봐요. 예나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니까요.”
“처음에는 어땠는데요?”
“아, 바다 씨는 잘 모르시겠구나.”
“사장님, 저도 알고 싶어요!”
“으음. 대략 1년 전인데···.”
나는 예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늘어놨고. 설명이 끝날 때쯤에는 두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에이, 설마요.”
“···정말 그 정도였다고요!?”
“예전에 예나가 저랑 바다 씨 사이에서 고민했을 때, 제가 왜 삐졌던 건지 이제 아시겠죠? 그때는 진심으로 섭섭했다니까요.”
키킥-
일부러 장난스럽게 투덜거리자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후후. 하늘 씨가 삐질 만했네요.”
“사장님, 혹시 저한테도 질투하세요?”
“가끔.”
“크큭. 역시 그랬군요!?”
···얘도 가끔 보면 무섭다니까.
나는 중2병에 걸린 학생처럼 크큭거리기 시작한 이태리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예나가 저런 건 안 배웠으면 좋겠는데.
“뭐, 아무튼. 여기 모인 사람들 한정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어리광도 곧잘 부리게 됐으니까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저게 예나 만의 표현 방식이겠죠.”
“저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구요? 크큭.”
예전부터 말하는 것이 서툴렀던 예나에게 ‘그림을 그린다’라는 행위는 단순한 의사 표현을 넘어 그녀만의 소통 수단일 터.
‘예나의 그림이 그 증거지.’
처음에는 단순히 거장들의 발자취를 뒤쫓을 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었으니.
“일단은 지켜봅시다.”
“네!”
두 사람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는 예나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지금처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채로 그녀가 나아가는 길을 지켜보면 되는 거다.
‘예나는 충분히 강해.’
그녀는 눈앞에 닥친 역경을 헤쳐나갈 힘을 가지고 있다. 만약 홀로 맞설 수 없는 벽이 나타났을 때는 우리가 뒤를 받쳐주면 되고.
‘그게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집안을 다 말아먹은 후에도 나를 내버리지 않고 오히려 다독여 주셨던 우리 부모님들처럼.
가끔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분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밑바닥에서부터 아득바득 기어 올라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예나도 할 수 있을 거야.’
당신들께 배운 그대로.
나는 예나를 믿어주기로 했다.
이러한 내 각오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놓지는 않았으나, 강바다와 이태리도 비슷한 심정이었던 듯 말을 아꼈다.
“엄마.”
“···으응?”
그때, 도화지를 눈앞에 두고 한참이나 말이 없던 예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김하영은 아직 ‘엄마’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었으나, 무언가 각오를 다진 듯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뭘 그리고 싶은지 생각났어?”
“응. 엄마가 예나를 도와줬으면 해.”
“···흡!”
예나의 말에 복잡한 감정이 솟구치는지 입술을 깨무는 김하영. 그녀는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엄마가 어떻게 도와줄까?”
“예나랑 같이 그리는 거야.”
“같이?”
“응.”
고개를 끄덕인 예나는 대뜸 도화지 중앙에 펜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지휘 아래 거침없이 움직이던 검은 선이 점점 형상을 갖춘다.
“저건···. 아기인가요?”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이네요.”
줄곧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강바다와 이태리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말대로 예나가 처음으로 그린 것은 ‘갓난아기’의 형상이었다.
“등에 붓을 매달고 있네요.”
“아마 예나 본인을 표현한 게 아닐까?”
“아하, 듣고 보니 동화 속 주인공이랑 느낌이 비슷하네요!”
스케치도 없는 그림인지라 다양한 추측이 난무했고. 흥미로운 대화에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상황을 지켜봤다.
“흠. 평소와는 드로잉 방식이 다르네요.”
“어떤 면에서?”
“예나는 평소에 두꺼운 붓으로 과감한 터치를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붓펜을 들고 세밀하게 그리고 있어요. 만화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듣고 보니 그렇네.”
이태리의 설명에 나와 강바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소 예나의 그림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전에는 인상파의 시조인 ‘클로드 모네’처럼 다양한 색채를 활용했는데, 오늘은 흑색만으로 그림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자, 이제 엄마 차례야.”
“······!?”
이어진 행동에 다시금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예나가 도화지에서 물러나며 자신이 들고 있던 붓펜을 김하영에게 건넨 것.
“호오, 그런 거였어?”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구나.”
“콜라보 드로잉이라니. 역시 내 제자야!”
콜라보 드로잉.
흔하게 쓰이는 말은 아니었다. 그나마도 특정 브랜드의 캐릭터나 이미지를 토대로 그림을 그릴 때 쓰이는 단어지만, 지금은 살짝 의미가 달랐다.
여기서는 복수의 화가가 합작품을 만든다는 뜻의 콜라보다. 예나는 김하영과 함께 그림을 번갈아 그리고자 하는 것.
“···이건 정말 귀한 장면이네요.”
강바다의 말대로다.
화가마다 그림체가 천차만별이기도 하고, 설령 비슷한 분위기라도 서로의 생각이 다르면 온전한 그림이 나오기 힘드니까.
특히 예술가를 평가할 때 ‘개성’이 굉장히 높은 가치로 취급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모습임은 분명했다.
“사장님! 촬영! 이거 영상으로 남겨야 해요!”
“어어···. 그래!”
이태리의 성화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박정호를 불렀고, 이후 부리나케 뛰어온 사용인들이 각종 촬영 장비를 설치했다.
예나와 김하영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빠르게 설치하기는 했으나, 이태리는 그마저도 아쉬운 모양이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의 시작을 못 남기다니!”
“그건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방 안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앞부분의 영상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정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박정호의 말에 이태리가 연신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는 별개로 나는 당연하다는 듯 우리를 관찰했던 게 신경 쓰인다만.
‘···뭐. 여기는 작업실이니까.’
침실이나 화장실 같은 개인적인 공간에는 일체 CCTV가 없음을 확인받았다. 덕분에 소중한 영상을 얻었으니 일단은 넘어가자.
그렇게 우리가 떠들어대는 사이, 얼떨결에 붓을 넘겨받은 김하영은 예나와 아기의 그림을 번갈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
“······.”
꽤나 긴 시간이었으나 예나는 김하영과 담담히 눈빛을 교환할 뿐, 절대로 재촉하거나 그림의 방향성에 대해 설명하는 법이 없었다.
“사장님, 지금 두 사람 모두 ‘존(Zone)’에 들어갔어요.”
“그래, 정말 놀라운 집중력이야.”
주변의 수많은 시선과 카메라들이 신경 쓰일 법도 한데, 둘은 단 한 번도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공간이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인간 무의식의 한계까지 집중한 상태.
이태리는 이것을 농구 선수들이 종종 언급하는 ‘Zone(영역)’에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었다.
“···후우.”
그때 길게 심호흡을 내뱉는 김하영. 그녀는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펜을 굳게 쥐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김하영은 과감히 펜을 들어 도화지에 점을 찍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펜이 닿은 것은 다름 아닌 예나의 그림 위.
길게 고민했던 만큼 확실하게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는지, 거침없이 선을 이어나가는 김하영. 그녀의 그림이 빠르게 완성되었다.
“···우와.”
“···저 지금 소름 돋았어요.”
“···여러분 덕분에 눈 호강을 하는군요.”
박정호는 어느새 우리 곁에 자리를 잡은 채 함께 드로잉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용인들 또한 마찬가지.
허나 그것에 딴지를 거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만큼 눈앞의 광경이 압도적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그림이 이어졌어.’
예나가 그린 갓난아기.
김하영은 아기의 배꼽에서부터 선을 이었다.
이어진 선은 곧 배가 잔뜩 부른 만삭의 어머니가 되었는데,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굳이 누가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예나와 김하영, 두 사람의 그림이 한데 어우러지며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품게 되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김하영의 차례가 끝나면 예나는 자연스럽게 펜을 건네받아 그림을 이어나갔고. 그게 끝나면 다시금 김하영이 앞으로 나선다.
무협지에서 나오는 고수처럼 상대방의 눈빛과 호흡, 몸짓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그림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읽어낸다.
“···마치 바둑을 보는 듯하군요.”
이후로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두 모녀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모든 집중력을 쏟아내야만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