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99
099 아빠
‘···이게 예나의 마음이구나.’
처음에는 예나가 뭘 하려는 건지 잘 몰랐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었으니 그저 지켜봤을 뿐.
그러다 예나가 자신을 형상화한 갓난아기를 완성한 순간, 김하영은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몸이 붕 떠오르며 예나와 자신의 영혼이 직접 연결되는 듯한 느낌. 아주 오래전에 느껴봤던 무척이나 그리운 감각.
“···아.”
저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직후 김하영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감각을 입 밖으로 토해내면 신기루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이 느낌을 영원히 남겨두고 싶어.’
김하영은 반사적으로 예나가 건넨 펜을 받아들었다. 직후 도화지 앞으로 걸음을 옮겨 드로잉을 시작했다.
자신의 색으로 세계를 물들인다. 언젠가 예나를 임신 중이었을 때를 떠올리면서.
‘···그때도 예나에게 위로받았었지.’
우울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런 자신을 타이르던 예나의 거센 발길질을 떠올렸다.
덕분에 손에 쥔 칼을 바닥에 내던지고, 밤새 예나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던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이대로는 엄마 실격이야.’
그때도, 지금도.
예나에게 위로만 받고 있다.
이래서야 엄마라고 할 수 없지.
각오를 다진 김하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손에 쥔 펜을 쉼 없이 움직이며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자신도 누구에 비할 바 없이 힘든 삶을 살아왔다. 어디 가서 자랑할 건 아니지만, 그저 받기만 하는 나약한 사람이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다.
‘당신도 보고 있지?’
문득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평생 고독하게 살아왔던 자신에게 사랑을 알려줬던 사람. 유일한 가족으로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던 사람.
이제 그는 떠나고 없지만. 왠지 어깨 위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분명 그도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으리라.
‘오랜만에 딸이랑 대화 좀 해.’
선이 이어진다.
자신을 뒤에서 안아주는 그이의 모습. 모두가 함께 힘든 시간을 견뎌냈던 그때로 잠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불 하나가 전부인 시린 단칸방 안에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세상 따뜻했던 우리들만의 시간을 이곳에 재현한다.
“······.”
“······.”
옆에서 묵묵히 그림을 바라보는 예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더 이상 서로에게 말은 불필요했다.
탯줄을 통해 이어진 눈앞의 그림처럼 두 사람은 이미 한 몸이나 다름없었으니.
김하영은 조용히 펜을 건넸다.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넘겨받은 예나는 잠시 멍하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예나의 아빠.’
사진조차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얼굴도 알 수 없고.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눈에 선명하다. 그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엄마와 자신을 안아주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따뜻해.’
누군가 실제로 안아주는 듯한 기분. 의외로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면 아빠는 항상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닐까. 예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 잠시 멈췄던 붓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예나랑 같이 있었어.’
장난감으로 탑을 쌓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는다. 예나 자신에게는 무척이나 가슴 아팠던 기억 중 하나였으나.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
스슥-
예나의 그림이 멈추기도 전에 김하영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또 다른 붓펜을 손에 쥔 채로 예나와 동시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으나, 두 사람이 떠올리는 장면은 놀라울 정도로 동일했다.
분명 두 자루의 펜이 움직이고 있는데, 마치 한 사람이 그린 것처럼 서로의 그림이 이어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예나와 김하영은 같은 생각을 하며 새하얀 도화지를 자신들만의 색으로 물들여나갔다.
함께 할 수 없었던 시간을 모두 모아 새롭게 재탄생시킨다. 멀리 떨어져 있던 서로의 몸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
예나의 가족은 이 세상 속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놀이동산을 다니며 미소를 지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함께야.’
시공을 뛰어넘어 서로의 추억이 이어진다. 또 다른 세계를 현실에 덮어씌우며 서로를 멀리했던 공백을 채워나간다.
넓디넓은 도화지를 빽빽하게 채울 때까지. 두 사람의 손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 * *
‘···숨 막히네.’
나는 두 모녀의 그림을 지켜보며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언젠가부터는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몰입해서 두 사람을 지켜봤던 것.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한 감정인 듯했다. 강바다와 박정호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으니까.
‘태리도 스위치가 켜졌네.’
어느 순간부터는 이태리도 이젤을 가져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캔버스에는 함께 그림을 그리는 예나와 김하영 모녀가 자리 잡았다.
이태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붓을 놀렸고, 엄숙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나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바다 씨, 괜찮아요?”
“아, 네···. 고마워요.”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강바다의 눈물을 닦아주자, 그녀가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머리를 내 가슴팍에 기대며 숨을 몰아 내쉬는 강바다. 그녀의 묵직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앞서 예나가 김하영을 따라가도 별 상관이 없다고 씩씩하게 말하긴 했으나, 그녀도 사람인 이상 완전히 감정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
“섭섭해요?”
“아니···. 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이런 걸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하늘 씨는 괜찮아요?”
“저야 뭐···.”
나도 강바다와 비슷했다. 실제로 예나와 함께 있었던 건 나였는데 싶기도 하고. 공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만.
‘이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할 말이 없어지겠지.’
두 모녀의 콜라보 드로잉은 그만큼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런 장면을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일 정도로.
당장 나도 이태리처럼 손이 근질거렸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고 싶었다.
허나 아직 두 모녀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고. 나는 마지막까지 이를 지켜볼 작정이었다.
“하늘 씨, 저기 보세요!”
“음?”
톡톡-
강바다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덕분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예나의 그림을 확인했고, 이내 두 눈이 커졌다.
“저거 하늘 씨 아니에요?”
“어···. 그런 것 같네요.”
“분명해요. 저 날카로운 눈매는 하늘 씨의 전매특허니까요!”
···그런 이미지였나?
잘은 모르겠다만 강바다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오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며, 다시금 그림에 집중했다.
“저건 바다 씨겠네요.”
“아이, 예나도 참···.”
그제야 강바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우리도 함께 있다는 증표나 다름 없었으니까.
우리와 김하영 커플, 그리고 이태리까지. 모두가 한 가족처럼 해변 위를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는 따뜻한 그림.
이후로도 우리는 계속 예나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고, 김하영도 당연하다는 듯 우리를 한 가족처럼 표현했다.
“···저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뭐랄까 다 같이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요. 실제로 함께 시간을 보낸 것 같달까요?”
“저도 그래요.”
이게 예술의 진정한 힘이겠지.
시공간을 뛰어넘어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언어와 인종, 나이 등 모든 요소를 초월한 진정한 의미의 소통.
작가로서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뭔가 내 영혼이 한 단계 더 성숙해진 기분이랄까.
‘···지금이라면 완성할 수 있겠어.’
일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 초고는 완성되었으나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퇴고 중이었는데.
지금이라면 왠지 그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전부 갈아엎어야 하겠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실마리가 눈에 보인 것만으로도 마음이 끓어올랐다. 이 감정을 잘 간직해뒀다가 자판 위에 쏟아내야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두 모녀의 드로잉이 막바지에 치달았다. 몇 시간에 걸친 대 서사시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후, 후아아···.”
“예나···. 방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펜을 놓고 주저앉았다. 이후 참아왔던 가쁜 숨을 몰아쉰다.
우리는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가 물을 건네주었고, 박정호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수건이나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간단한 간식을 가져왔다.
“고생했어. 예나야.”
“하영 씨도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두 분 모두.”
“엄마는 울보야.”
푸하하-
김하영은 우리를 보자 새삼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물을 쏟아냈고, 예나의 신랄한 표현에 다들 웃음을 쏟아냈다.
“스승님은?”
“태리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이네.”
모두의 시선이 이태리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양손에 붓을 든 것으로도 모자라, 입까지 사용해서 삼필류(三筆流)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도저히 한두 시간 내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아무래도 별장에서 하루는 더 묵어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예. 이사님께는 제가 미리 연락을 넣어놨습니다. 소식을 들으시고는 곧장 달려온다고 하셔서 조금 곤란했습니다만.”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잠깐 사이에 폭삭 늙어버린 박정호를 보니, 강별이 얼마나 투정을 부렸을지 눈에 선했다.
강별은 지금 해외로 출장을 나간 상태였다. 지난번에 개최했던 예나의 전시회가 대박을 쳐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정신없다고.
예술에 대해 누구보다 진심인 강별이기에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헬기라도 타고 날아왔겠지. 나중에 따로 영상을 편집해서 보내드려야겠다.
“아빠, 예나 졸려.”
“어?”
“응?”
예나가 칭얼거리며 내 품으로 안겨들었다. 반사적으로 안아 들기는 했으나, 방금 내가 뭘 들은 건가 싶어서 잠시 멍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표정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예나야, 방금 뭐라고 했어?”
“졸려.”
“그전에.”
“예나 졸려.”
“아니, 그전에.”
찌릿-
에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잠깐 말이 없던 그녀가 내 품에서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곧장 김하영에게 안겨들었다.
“엄마아, 아빠가 나 괴롭혀.”
“···에?”
김하영이 예나를 안아주며 바보 같은 목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들도 목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
예나는 명확하게 ‘아빠’라고 발음했다. 모두가 두 번이나 들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나올 수가 없다.
“예나야, 갑자기 그게 무슨···.”
다급히 사태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예나는 모든 힘을 다 썼다는 듯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폭탄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끼긱- 끼기긱-!
옆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목에서 그런 소리가 날 리는 없으니 분명 환청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확실히 들었다.
“하영 씨가 엄마고···. 하늘 씨가 아빠?”
끼긱- 끼긱-
다시금 들려오는 환청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뚜렷한 살기.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험난한 운명을 직감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