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무쌍불굴(無雙不屈) (2)
기은령과 기철, 두 남매는 정말로 텅 비어 있는 객방을 둘러보고는 얼굴을 단단히 굳혔다.
“고 소협이 대체 왜?”
“쳇!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거겠지!”
“그래도…….”
기은령이 혼란한 기색이라면, 기철은 화가 잔뜩 나서는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정말로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기철은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기은령은 다시금 객방을 살폈다.
텅 빈 객방, 그러나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 걸쳐 놓은 짐과 장삼도 그대로였고, 침상에는 아예 누운 흔적조차 없었다.
무쌍장을 염탐하려고 했다면, 이런 식으로 사라지지는 않았을 터인데.
고진무가 남긴 짐에도 정말 별것이 없었다. 그저 먼지 앉은 옷가지와 약간의 여비 정도가 전부였다.
기철은 고진무에게 속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생각에 빠진 기은령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어금니를 단단히 깨물고는 문가에 등을 기댄 채 바깥만 노려보았다.
“에잇, 정말이지…….”
한마디 불평만 겨우 내뱉었다.
이렇게 둘러본다고 해서 없는 고진무의 행방을 찾을 것도 아닐 텐데.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 서둘러 다가왔다. 기철은 허리를 세웠다.
“육 공녀, 칠 공자.”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기은령은 고민을 잠시 접어 두고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오?”
다가온 것은 십권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날 고진무에게 손님의 소식을 알려 준 바가 있기도 했다.
“실은 간밤에 여기 고 소협을 찾아온 손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손님? 손님이라고?”
기철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막 상현에 들었다는 이를 누가 찾아왔단 말인가.
“예, 꽤 지저분한 꼴이었는데. 고 소협이 상현에 들자마자 머물렀던 주점의 점원이라고 하더군요.”
“점원이 굳이 찾아왔단 말인가? 그래서 무얼 하였습니까?”
“예, 짧게 몇 마디만 나누고서 바로 끝났습니다. 점원 아이는 서둘러 돌아갔고, 고 소협도 바로 객방으로 돌아갔지요. 제가 길을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고 나자 객방은 보는 바대로 비어 있다.
십권사는 자신이 뭔가를 실수한 게 아닐까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기은령은 힐끔 기철을 돌아보았다.
“몇 마디, 몇 마디 정도라면, 대체 무슨 말을 주고받았던 걸까?”
“그게 뭐가 중요해요? 어차피 모습을 감추었으니까 본 장에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걸 텐데.”
기철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불만이 얼굴에 가득했다. 고민하기도 싫다는 기색에 기은령은 쓴웃음을 살짝 머금었다.
다른 것보다 고진무에 대한 앙금이 남은 상태에서 이런 일까지 벌어졌으니까. 날 선 모습을 탓할 건 아니었다.
기은령도 내심은 끓어오르기 마련이었다. 다만 무언지 모를 상황에서는 냉정해야 할 터였다.
“그래, 그러니까 중요하지 않겠느냐. 무슨 꿍꿍이인지를 알아야 대처를 하지. 늦었다고 손 놓고 있을까.”
“으음…… 그건.”
기철은 말끝을 흐리고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은령은 그런 기철의 어깨를 말없이 다독이고서 몸을 돌렸다.
그는 고진무를 찾아왔다는 아이의 생김새를 들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상현 내에 있는 주점이라는 건 분명한 일이다. 내려가서 찾아볼 필요는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정문 앞에 닿았을 때에 생각지 못한 상황과 마주하고 말았다.
정문에서 길이 막혔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은령은 황당했고, 기철은 얼굴이 확 일그러뜨렸다.
“뭐야! 지금 뭐하는 짓이야!”
“…….”
기철이 다그쳤지만, 정문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둘은 대사형 육손을 따라서 무쌍장에 들어선 외부인, 사흑의 두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장포에 두건을 깊이 눌러쓴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자리만 지켰다.
“이것들이…… 당장 비키지 못해!”
“…….”
역시나 묵묵부답.
둘은 팔짱을 낀 채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기철은 이를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속에서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차였다.
이때에 딱 성질을 건드려 주다니.
기철은 흐, 흐흐, 험하게 웃었다. 천천히 목을 돌리고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둘 앞에 섰다.
“지금 해 보자는 거지?”
“아철, 진정해라.”
“아니, 이 판국에 진정은 무슨 진정이야. 이 정신 나간 것들이 대사형 말만 믿고 지금 우리를 무시하고 있잖아.”
기철은 이제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눈가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기은령은 한숨을 삼켰다. 그 역시 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기철만큼이나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사형 육손의 명을 충실하게 따르는 이들과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사형께 먼저 말씀드리자꾸나. 괜히 힘 뺄 것 없어.”
“괜히 힘을 빼다니. 마침 힘쓸 일이 생긴 거지.”
기철은 차갑게 말했다. 그는 걸친 장삼의 소매를 턱턱 걷어 올렸다. 단단한 팔뚝에서 근육이 꿈틀거렸다.
기은령은 내심 아뿔싸! 당황했다. 기철이 이 정도면 정말 말릴 수가 없다.
단순히 화가 난 정도가 아니었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기철은 둘 사이로 성큼 다가섰다. 두 흑의인은 처음 길을 막아섰을 때처럼 딱 어깨를 붙이면서 기철 앞을 막았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철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에 앞뒤 가릴 것 없이 두 주먹을 동시에 내질렀다. 그러나 밀려난 건 오히려 기철이었다.
주르륵!
먼지를 일으키면서 밟은 발이 뒤로 밀려났다.
거리로 치면 족히 두어 걸음이었다. 기철은 두 주먹을 한껏 뻗은 채 굳었다.
옆에서 기은령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오히려 손을 쓴 기철이 속절없이 밀려나다니.
조금의 충격도 없는 듯이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은 자리만 지켰다.
아니, 어깨를 맞대었다가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기은령은 눈썹을 바짝 모았다.
‘이상하다. 아니, 이건 이상한 정도가 아니야.’
기철이 다잡은 주먹이 어떤 주먹인지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스승의 절기 중 하나, 상승의 외문공부인 금강포(金剛袍)를 근 칠성 경지까지 완성했다.
금강으로 자아낸 포삼을 걸친 듯하다고 해서 금강포. 그 공력을 칠성까지 이루어 내었으니, 기철이 집중한 주먹은 그 자체로 쇳덩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마구잡이 주먹질이 아니었다.
천심쌍권(穿心雙拳), 파고드는 지르기에는 완벽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럼에도 밀려난 건 기철이었고, 무방비한 모습으로 주먹을 받아 낸 흑의인 둘은 조금의 충격도 받지 않은 모습이다.
기은령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철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걸 당혹감을 떨쳐 내고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 하하! 그래 제법 수단이 있으시단 말이군!”
그냥 자리에서 밀어내려고만 했지만, 그런 정도로는 안 된다는 걸 이제 알았다.
기철은 쿵쿵, 발을 굴렀다. 그리고 새삼 자세를 다잡았다. 기은령도 더는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한 손을 늘어뜨렸다.
그때였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
버럭 다그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씨 남매의 고개가 돌아갔다. 자리에는 넷째 낭아조 금이산이 성난 얼굴로 있었다.
“그, 금 사형.”
“사형.”
금이산은 번뜩이는 눈초리로 기씨 남매를 노려보았다.
“대사형께서 누구도 장원 밖을 걸음하지 말라 한 말을 듣지 못했느냐?”
“그것이…….”
“다른 변명은 필요 없다. 괜한 소란을 피우지 말거라.”
“…….”
기은령은 한층 차분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손을 뻗어서 기철을 붙잡았다.
기철이 울컥한 심정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지만, 붙잡는 강한 손짓에 애써 참았다.
고진무는 흐린 불빛을 밝혀놓고서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 상무각 지하의 밀실은 분명 폐관을 위한 공간이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격리된 곳은 아니었다.
살피고자 집중하면, 상무각 주변 동정은 살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장 주변에서 다른 소란은 들려오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무쌍장을 모두 제압하겠다던 육손이 아직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흐음, 빈방은 들켰을 텐데. 그것 때문에 조심하는 건가?”
그렇다고 달리 장원 내부를 살피느냐 하면, 그도 아닌 듯했다.
고진무는 일단 육손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고개를 돌리자, 뒤에 놓인 팔각의 단에서 천진공이 운공삼매에 빠져 있었다.
고진무가 약간 거들었을 뿐이지만, 그것으로 천진공은 빠르게 호전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끊어 낸 손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무쌍귀유, 강북삼대권사인 동시에,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고진무는 운공하면서 천진공의 낯빛이 점점 변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란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가, 다시 파랗게, 붉게, 이제는 그래도 사람 얼굴이라 할 정도로 돌아왔다.
고진무는 그제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고비는 확실히 넘겼기 때문이었다.
천진공이 운공을 마무리한 것은 해가 중천에 이를 즈음이었다.
좌정하고 있는 팔각의 단 주변으로 농밀하게 맴돌던 기파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천진공은 눈 감은 채 물었다.
“고 소협, 그래, 바깥 동정은 어떠한가?”
“아직은 조용합니다. 귀를 세웠지만 큰 말썽은 일어나지 않은 듯합니다. 지난밤에 듣기로는 무쌍장을 정리하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만.”
“그래, 하긴 하겠지. 육손 녀석.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게 분명하군.”
천진공은 쯧, 혀를 찼다. 그는 눈을 떴다. 흐린 빛이 노인의 눈가에 잠시 맴돌았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는 왼손이 허전했고, 뼈마디가 뻣뻣했지만, 몸을 가누기는 어려움이 없었다.
“노선배.”
“아아, 괜찮네. 그보다 고 소협. 잠시 어울려 주지 않겠나?”
“예?”
“공력은 그런대로 회복했지만, 일단 몸에 적응해야겠네. 왼쪽 손이 이 꼴이기도 하고 말이지.”
천진공은 마치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왼쪽 소매를 흔들어 보였다.
말문이 막힐 일이었다. 그래도 고진무는 억지로 두 손을 맞잡으면서 고개 숙였다.
“예, 제가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하하, 고맙네. 그럼…….”
천진공은 가볍게 몸을 흔들면서 단 아래로 내려왔다.
지금까지 독을 밀어내고, 남은 여독을 억누르기 위해서 운공에 매달렸다면, 지금은 공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 위한 운공이었다.
아직 팔다리가 뻣뻣했다.
몸을 풀고 달라진 몸 상태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면 실전에 가까운 비무만 한 것이 없었다.
천진공은 눈을 번뜩였다.
살기에 가까운 안광 앞에서 고진무는 잠시 어깨를 들썩거렸다.
“노, 노선배?”
“하하, 긴장하지 말게. 긴장할 것 없어. 그런데 자네가 우리 막내들을 제압했었다고 하였지?”
“그건 요, 요행으로.”
“하하, 그래, 요행이라 하였지. 여하튼 선수는 굳이 양보할 필요 없겠…… 지!”
마지막 말은 바로 코앞에서 울렸다.
“으익!”
제대로 선수를 빼앗겼다. 고진무는 기겁하면서도 발 빠르게 유운보를 밟았다.
화르륵!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