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귀검(鬼劍) (1)
상주 와가숙의 숙두, 백매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신의 처소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밤을 하얗게 지새웠지만 피로한 기색보다는 고민이 깊었다. 그는 현이 끊어진 금을 앞에 두고서 쉽게 손을 들지 못했다.
대강 일을 마무리한 지금에도 쉽게 평정심을 지킬 수가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우선은 외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래서 함부로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 거란 말이지.”
백매는 고개를 흔들었다.
와가숙 다른 어른들께 좋은 소리 듣기는 글렀다.
그래도 설야원이 털려서 비전을 잃는 것보다야 백배 나은 일이기는 하겠다만.
백매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숙두.”
조용히 찾아온 가기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 무쌍장 상황은 어떻더냐?”
“살피기에는 큰 소란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남검귀 고 소협 혼자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 그래.”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거래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 원하는 걸 고스란히 내어주고 말았으니. 그뿐만이 아니라 등주 지역의 와가숙과 접선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정도 내용이라고 하면 정말 와가숙 내부 인사이거나, 일급 용부에 버금가는 이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쌍귀유의 압박도 무시할 건 아니지만, 역시 도움 받았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백매는 두 손을 소매 사이에 찔러 넣고서 고개를 한껏 기울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만도 그렇지만, 다음은 심상치 않은 불안이 밀려왔다.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체 어떻게 알고 설야원을 노린 것이지?”
설야원이 분명 지역에서 손꼽는 기원이라고 하지만, 첫째 가는 곳은 아니다.
와가숙에 속한 곳에서 따져보아도 나은 곳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리타라고 하는 서장 승려와 반쪽짜리 실혼인 무리로 시선을 단단히 끌고, 진짜는 내부로 파고들어서 와가숙의 비보를 노렸다.
무슨 뜻이겠는가.
백매는 영 착잡한 기색으로 눈빛을 고요하게 번뜩였다.
‘정보가 새었어. 정보가…….’
과연 어디에서.
생각이 한없이 깊어지는 그때에, 한 손님이 한낮의 설야원을 찾았다. 기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였지만, 그에게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붉은 수실을 드리운 검을 등에 멘 도고 한 사람이었다.
***
고진무는 꽤 서둘러서 등주로 홀로 향했다.
설야원에서 대강을 파악하고 남은 사정은 무쌍귀유 천진공에게 부탁할 뿐이었다.
그는 무쌍사수를 붙여 주려고 했지만, 고진무는 극구 마다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무쌍장에 이어서 상주 와가숙까지 노린 무리였다.
또 어떻게 몰려올지 몰랐다.
지금 고진무가 ‘교’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해서 나서는 것도 아닌 바에야. 어디까지나 적정을 살피고 개방 거지들의 안위를 돌보는 게 목적이었다.
그 차이는 분명했다.
아직 사문의 허락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상황을 대강이라도 알렸으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길을 재촉하면서 고진무는 만검산장,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다는 개방제자들을 떠올렸다.
처음 그들 소식을 말할 때에 회발개는 한참이나 기운이 없었다.
등주에는 상주와 달리 제대로 된 분타가 있다고 하는데, 그곳만 하여도 개방에 몸담은 거지가 일백을 헤아리지만, 막상 고수라고 할 만한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가능하면 그들을 먼저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개방에서도 나름대로 수를 내기야 하겠지만.”
어느 것이든 일조일석에 뚝딱 답을 낼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고진무는 고민을 거듭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백매에게 당장 들은 것만 보면 지금 만검산장을 차지하고 앉은 자는 장주의 이복형이라고 했다.
“파검이라 하였지…….”
그가 ‘교’에 속한 사자나 사령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다른 곳에서처럼 ‘교’의 꼬임에 넘어간 자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일신의 능력만은 확실한 고수라는 건 분명했다.
고진무는 이내 눈썹을 치켜들었다.
상현을 나설 때에는 눈바람이 스산하게 맴돌더니 한 지역을 넘어선 덕분일까, 눈발도 바람도 잦아드는 듯했다.
아울러 날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상현을 찾을 때에는 그래도 버려진 사당이라도 있었지만, 등주에 가까워서는 주변에 변변한 자리가 하나 없었다.
향하는 길목을 신중하게 검토하였다고 하지만, 오차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진무는 멈춰 서서 주변을 대강 둘러보았다.
노을이 끝 무렵에 이르러서 어둠이 내리는 건 순식간이겠다.
“어쩔 수 없군. 풍찬노숙은 피할 수 없겠어.”
결정했으면 바로 움직인다. 서둘러야 그래도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진무는 길목 한쪽으로 들어서서 수풀을 치우고 밤 지새울 준비를 차차 갖추었다.
너른 땅에 마른 수풀을 급히 찾아서 불을 피웠다.
고진무는 어둠이 쏟아지기 직전에 작은 모닥불을 빠르게 피웠다. 그제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불기운을 쬐었다.
훈훈한 온기가 서서히 맴돌았다.
고진무는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꽃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끝도 없이 뻗어 있는 칠흑의 야공(夜空)에 무수한 별빛이 반짝거렸다. 불티가 연기를 타고 하늘 향해서 솟아오르고 이내 흩어졌다.
지금 향하는 길목 끝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두 짐작뿐으로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등주와 만검산장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가 드러나는 셈이었다.
그래도 고진무는 당장의 평온함에 마음을 내려놓았다.
“후우…….”
숨소리가 가늘게 흘렀다.
한밤의 고요함 속에서 고진무는 문득 자세를 다잡으며 명상에 들었다.
규칙적인 호흡에 집중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종남산을 내려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참 별별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렬한 기억은 십병사령을 마주하였을 때와 무쌍귀유를 마주하였을 때였다.
단지 죽을 뻔하였다든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나타났든가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두 경험 속에서 고진무는 더욱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폐관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실로 겨자씨만 한 성취였음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이제 알았느냐?
혀 차는 목소리가 불현듯 귓가에서 맴돌았다. 쓴웃음이 절로 맺혔다.
“정진해야지요.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고진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문득 무릎에 올려둔 철검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검자루에 검수를 매었는데, 그 끝에 작은 백옥 조각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장식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옥 조각이었다. 손때가 탄 백옥으로 빛깔은 탁했다.
싸구려 옥 조각, 그러나 이것이 등주 와가숙을 찾을 수 있는 징표였다.
석 사형에게 받은 개방의 동전과 비슷한 용도라고 할 수 있었다.
고진무는 옥 조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모닥불 빛을 받아서 탁한 옥 조각이 붉게 물들었다. 여하간 와가숙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다만.
고진무는 곧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원무산이 그렇게 멀지 않을 텐데.”
원무산이 자리한 균주가 코앞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화룡진인 장사원이 수행하는 곳으로 강호에 유명했다.
고진무는 장사원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지금도 산중도관(山中道觀)에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따로 없을 터였다.
하지만 고진무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계실지도 모를 일이고, 원무산을 찾아서도 한참을 헤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니.”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만검산장과 그 일대는 이미 한참 전에 ‘교’의 손에 떨어진 셈이었다.
지금 그곳 상황은 물론 개방 거지들 안위까지 살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고진무는 생각을 접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그는 입을 꼭 다물었다.
만검산장 그곳을 차지한 자는 또 어떤 자일지.
전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세를 지키고 있는 만검산장이다.
그곳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대를 장악한 것만 보아도 분명 무시무시한 자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십병사령이었다.
그는 감히 손 쓸 수 없는 상대였다. 고진무는 그저 그 앞에서 버티는 데에만 전력을 다했었다.
상대가 자신을 얕잡아 보지 않았다면, 또는 황 사형이 한 걸음이라도 늦었다면.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났을 일이다.
고진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설사 그런 상대가 있다고 한들 물러서거나 주저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할 일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지.”
고진무는 자신을 다독이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서는 급히 손을 뻗었다.
“으윽! 타겠다!”
불가에 꽂아둔 육포가 검게 그을리는 걸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눈으로는 불가를 보고 있지만,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다행이랄까, 고진무는 그래도 저녁거리를 홀라당 태우는 불상사는 면했다. 그는 타버린 조각을 조심조심 뜯어내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불현듯 가슴이 들썩거렸다.
그러더니 품에서 단검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스르르, 파란 예기가 흐르는 단검은 혼자 허공을 날았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불길 위로 맴도는 단검의 모습은 한참이나 괴이쩍었다.
그래도 고진무는 육포 조각을 입에 문 채 피식 실소했다.
“그래, 오랜만에 한번 어울려 볼 테냐?”
지이잉.
고진무가 말 건네기가 무섭게 단검이 홱 돌아섰다.
단검이 부르르 몸을 떨어서 우는소리를 냈다. 그러자 고진무는 육포를 우물거리면서도 두 손가락을 꼿꼿이 세웠다.
맺은 검결지에 공력을 집중했다. 그 하나로 귀동이 스며든 단검을 상대한다.
귀동은 그대로 움직였다.
스팟!
“오호, 제법.”
고진무는 훌쩍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검결지로 살짝 검 끝을 내리눌렀다.
재빠르게 파고들었지만 고진무는 여유를 잃지 않고 검로를 읽어 냈다.
날아드는 여력을 받아서 누르고, 돌리고, 튕겨 낸다.
단검은 속절없이 흩어지기도 하지만, 바로 검세를 수습하여서 재차 고진무를 노렸다.
주변을 맴돌면서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 수법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천하검법이다.
단검에 스며든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자체로 능수능란하게 부릴 수 있는 정도는 또 아니었다.
귀동도 자신을 유지하고 힘을 내는 데 필요한 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귀동의 상태는 종남산, 특히 정무관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르다.
그래도 이렇게 기운을 내어서 단검을 움직이고, 주변을 살피고 다시 돌아오는 등의 일을 해낸다는 건 한참 놀라운 일이었다.
혹여 술법에 정통한 자가 있어서 이를 알았다면 기함할 터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줄은 서로 모르고 있었다.
지이잉!
단검이 흐린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꽤나 즐거워하는 기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진무는 웃음을 삼키면서 다시금 검결지에 공력을 집중했다.
고진무는 고진무대로 귀동 또한 귀동대로, 일인일귀(一人一鬼)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내내 수 싸움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