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417
418화 동량지재(棟梁之材) (3)
고진무는 말없이 주변을 정리했다.
기산삼흉도 그렇지만, 여러 살수의 시신은 끔찍할 정도로 훼손당했고, 독 바른 칼날 조각이나 은사 등이 어지럽게 널브러졌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나중에라도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모를 일이었다.
상황은 단 한 걸음에 끝내 버리고서는 막상 주변을 정리하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고진무는 결국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즈음에야 흙투성이 손을 털면서 허리를 세웠다. 삽을 대신한 삼흉의 큼직한 칼날을 땅에 거꾸로 꽂아 놓고서 숨을 돌렸다.
그는 잠깐 묘한 표정으로 정리한 주변을 살폈다.
한참 어수선했다. 그래도 설마 피를 뿌리고 시신이 널브러졌던 자리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산영 마운곡, 그곳을 찾던 중에 생각지도 못한 일을 연이어 마주할 줄이야. 태평에서 남궁완을 마주하였던 것도 물론이요, 오늘의 일도 역시 예상치 못한 사달이었다.
그래도 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고진무는 살짝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면서 고개를 슬쩍 비틀었다. 그는 자리를 정리하면서, 살진의 진체를 새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물처럼 얽힌 은사가 솟구쳤고, 곳곳에 은신하였던 살수가 한 호흡에 움직였다.
일대를 이목 아래에 두고 있었음에도, 살진이 발동하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했다.
고진무는 자신이 죽고 동료가 죽는 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목표를 죽이기 위해서 몸을 던지는 살수들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집중된 살기를 정면에서 맞이했다.
아직 살정이라고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고진무는 살정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전에 마주한 살정 살수들과 흡사한 살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정 살수는 그저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살의에서 비롯한 살기만 가득했다. 명검보도가 서릿발 같은 예기를 품듯이, 살정 살수에게는 다만 살기만이 맴돌 뿐이었다.
그렇게 뒤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상대의 멸살만을 위해 철저히 계산한 살진을 준비할 수 있는 곳이 살정 말고 또 어느 곳이 있을까.
‘교’라도 어려울 터였다.
“시위근원의 요결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겠지.”
고진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른 수였다면, 이렇게 상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했을 터였다. 자칫 남궁완이 휩쓸렸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독문요결이라고 할 수 있는 태극세를 아낌없이 베풀어 준 장사원,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새삼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일선회풍결이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성취를 확인하는 동시에, 고진무는 살정에 대해서 한층 경각심을 가졌다. 다른 살진, 또는 살법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지 않겠는가.
고진무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이 붉었다.
“이런, 이런.”
주변을 정리하는 데에도 한참이 걸리기는 했지만, 살수들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적잖이 시간을 흘려버린 것이다.
고진무는 적잖이 난처했다. 날은 늦었는데, 그렇다고 태평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모를 길을 더듬어서 나아갈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길을 잡아 줘야 할 남궁완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멍한 상태였다.
고진무는 남궁완의 탁한 눈동자를 힐끔 보았다. 역시 가문의 일로 크게 상심한 탓이리라.
이러면 꼼짝없이 풍찬노숙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면 주저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한밤을 산길에서 보내려거든, 한층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했다. 고진무는 기대고 있던 삼흉의 칼자루를 휙 던져 버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내내 멍한 남궁완을 챙겨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남궁완은 부축하는 손길을 마다치 않고 순순히 따랐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고진무는 익숙하게 밤이슬을 피할 자리를 찾았고, 찬바람을 막아 줄 만한 산 바위 아래에서 대강 자리를 잡았다.
남궁완은 가문의 검이라는 낡은 철검을 꼭 쥐고서 내내 초점 흐린 눈으로 있었다.
어둑한 자리에서 모닥불이 화르르 타올랐다. 흐린 눈동자에서 불빛이 어른거렸다.
불 위에는 솥을 올려서 죽을 끓였고, 주전자를 같이 걸어서 물이 끓었다. 부글부글거리는 소리가 바람 아래에서 맴돌았다.
이렇게만 보면 한참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불꽃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남궁완의 가슴은 황량하여서, 마른 지옥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또한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황량한 지옥이다.
불가에 앉아 있었지만, 온기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더한 한기가 스며들면서, 남궁완은 작은 몸을 더욱 웅크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분명 가문의 울타리를 벗어나 강호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 뛰쳐나왔다. 그건 온전히 자기 뜻이었다. 아니, 지금까지는 그런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오자마자 기산삼흉을 마주한 것이 불운도, 우연도 아니었다면, 그것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내 기억을 더듬어 가던 남궁완은 곧 몇몇 얼굴과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에게 강호의 바람을 가슴에 불어넣어 주었고, 가문을 나설 방도를 일러 준 이들이었다.
그중에서 과연 누구일까. 아니, 그중에서 과연 누가 아닐까.
“우으윽!”
남궁완은 더 참지 못하고, 주먹 쥔 손으로 두 눈을 꾹 눌렀다. 울음이 앙다문 입술 속에서 윙윙 맴돌았다.
‘아무리 내가 눈엣가시였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하다니.’
남궁완은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남궁 소협.”
바닥이 없는 우울과 절망 속으로 녹아 들어갈 참에, 문득 차분한 목소리가 귀를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큰 목소리도 아니었고, 그렇게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속닥거리는 것보다 한층 또렷하게 들렸다.
남궁완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고진무가 불가 너머에서 쓴웃음을 지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으, 은공.”
“그만 정신 차리고. 이것 좀 들게.”
그는 멍하니 있는 남궁완에게 막 퍼 담은 죽 한 그릇을 길게 내밀었다.
뜨끈한 죽에서 김이 솟아올랐고, 불빛 받아서 한층 윤기가 흐르는 듯했다.
가만 생각하면, 새벽 나절에 요기나 가볍게 하고서 내내 물 한 모금 하지 않았다. 이런 때에 죽 한 그릇이라니.
머리는 복잡했고, 심정은 참담하건만, 몸은 솔직하여서 당장 꾸르륵하고 뱃소리가 힘차게도 울렸다.
남궁완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불길 건너에서 내민 죽 그릇을 어찌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고진무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배를 채우고 볼 일이었다. 마음 쓰는 데에도 체력이 이만저만 소모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막 끓여 낸 죽이었다. 한참 뜨거울 테지만, 남궁완은 냉수라도 마시듯이 후르륵 삼켰다. 주린 탓이었다. 그리고 워낙에 추웠다.
가슴으로 스산한 한기가 파고들었으니. 이 정도 뜨거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고진무는 꿀떡꿀떡 죽을 삼키는 남궁완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죽을 퍼주었다.
남궁완은 죽 세 그릇을 연거푸 비우고서야 정신을 다잡았다. 온기가 맴돌았다. 비록 뜨거움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고 하지만, 입천장이고, 혀끝이고 홀라당 데었다.
남궁완은 입 안쪽에서 계속 혀끝을 굴리면서 일어난 허물을 툭툭 밀어냈다. 그러면서 고진무의 눈치를 살폈다.
고진무는 자신의 죽을 천천히 비우고 있었다.
‘으으, 사죄를 드려야 할 텐데…….’
남궁완은 고진무에게 한참이나 면목이 없었다.
자신 때문에 괜히 고진무가 발목을 잡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이 벌어지고, 대흉의 원독 어린 울부짖음을 들은 뒤로는 정신이 쏙 빠진 탓에, 내내 주저앉아만 있었으니까.
남궁완은 자책이 가득한 채,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응? 남궁 소협. 괜찮은가?”
고진무는 남궁완의 한숨이 하도 무거운 것이 의아해서 물었다.
“은공, 죄송합니다.”
“응? 죄송하다니?”
“오늘 일은 제가 원인이지 않습니까. 저 때문에 또다시 말썽에 휘말리셨으니.”
“하하, 어디 그런 말을 하나. 그저 강호의 흔한 은원일 뿐이니, 온전히 남궁 소협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지. 자네를 탓할 일이 아니야.”
고진무는 그늘 짙은 아이를 보면서 손을 내저었다. 모닥불 때문인지, 아이의 얼굴에는 음영이 짙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아랫입술을 삐죽하고 내밀었다. 당장에라도 왁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그렇더라도.”
“인연이 그리된 것이고,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인데,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사람은 자네가 아니었으면 분명 지금도 황산영, 마운곡이라는 곳을 찾아서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을 걸세.”
고진무는 별말 다 한다는 듯이 말했다.
위로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엉뚱한 곳을 찾아서 계속해서 허송세월할 뻔한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일은 마다할 바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교’의 만행이 다시 벌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지금도 하동의 상황이 어떨지 걱정이었다.
이런 와중에 동구호가 남긴 전언 한 줄로 마냥 허송세월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만큼, 남궁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진무는 큰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그는 불길 너머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남궁완을 보면서 거듭 말했다.
“남궁 소협, 이 사람은 괜찮네. 그리고 종남의 검객으로서도 그때 자네를 도운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이후의 일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바일세.”
“으, 은공…….”
눈물이 다 글썽거릴 판이었다.
가문의 사람은 자신을 어찌할 꿍꿍이뿐인데,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이에게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듣다니. 큰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할 판이었다.
“남궁 소협, 기산삼흉이 괜한 말을 떠든 것 같지는 않네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알겠는가?”
“……그것이…….”
고진무는 문득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남궁완은 어색하게나마 웃는 얼굴을 하였다가, 말을 삼켰다.
혀뿌리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는지,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고진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알기 때문에 말할 수가 없다.
“그렇군.”
고진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괜히 모닥불을 들쑤셨다. 불길이 다시 화르륵 일어났다.
두 사람은 그리고 말없이 밤을 지새웠다.
고진무는 남궁완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남궁완은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말을 꺼낸다면, 깊이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가문의 치부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지만, 제대로 눈 붙이지 못한 남궁완은 그저 퀭한 눈으로 새벽어둠이 물러가기 시작한 흐릿한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남궁완은 길을 잃어버렸다. 지금까지 따라서 걸었던 길은 뒤틀렸고, 나아갈 길조차 잃어버렸다.
도중에 멈춰 선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저 가슴속에서 복잡하게 뒤채는 오만의 감정에 자신이 붙들려 있을 뿐이었다.
부친의 검을 들고 가문을 나설 때만 해도 남궁완은 당당한 무인이요, 검객으로 인정받고서 돌아오리라 다짐했건만, 이제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잦아든 모닥불에서는 하얀 연기 한 줄기가 가늘게 솟아올랐다.
남궁완은 어렵게 한숨을 깊이 삼키고서 고개를 들었다. 어떻든 날이 밝았으니.
남궁완은 문득 짙은 눈썹을 바짝 모았다.
자리 잡은 이곳은 큼직한 산 바위를 등 뒤에 두고, 주변으로는 수풀이 무성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약간의 경사가 진 곳이었다.
그런데 새벽 햇빛이 바위 너머로 비추어 들어오는데, 수풀 사이에서 부자연스러운 빛 무리가 번뜩였다.
남궁완은 그 번뜩임을 눈에 담는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날붙이의 반사광이었다.
‘습격!’
가슴 깊은 곳에서 비명에 가까운 한마디가 왈칵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전날의 살수 때문에 찾은 자들일까.
남궁완은 경솔하게 굴기보다는 눈을 크게 뜨고, 이를 악물었다.
‘으, 은공께서는!’
남궁완은 고진무의 안위를 걱정해서 겨우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리를 참지 못했다.
“엥?”
분명 촌각 전만 해도 누워 있던 고진무의 모습이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