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806
3부 221화 대한, 국민의 시대
6월 10일로 예정된 대관식을 앞두고, 전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태시,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대한국 만세!”
마침 태시(太始)에는 태초이자 만물의 근본이란 의미가 있었으므로,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기에 적절했다.
곳곳에 태시라는 단어가 쓰였다.
예컨대, 대한제국 최초의 국산 자동차 명칭에도 태시가 붙었다.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자동차, 태시 자동차!”
근대화 이후에도 사람들의 생각에서 교통이란 기차와 전차였고, 그동안 자동차는 상류층의 사치품으로나 인식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야 실용성을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이선과 헨리 포드의 오랜 협력관계로 인해, 일찌감치 포드 모터 컴퍼니가 한국에 진출했다.
포드는 한국에 지사와 생산 공장을 설립하고 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한국은 생산 기술과 운용 노하우를 터득해 갔다.
포드의 성공은 다른 자동차 회사들에도 자극을 주었고,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브랜드도 한국 진출을 타진했다.
헨리 포드가 이선의 도움을 받아 연방 상원의원에 진출하면서, 포드가 꺼리던 기술이전도 성사되었다.
미제 기술과 부품을 토대로 라이센스 자동차 생산이 이루어지다, 마침내 광무 28년 내국기술박람회에서 한국인이 스스로 설계·제조한 부품을 사용해 한국에서 제조한 순국산 자동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보다 공업화를 훨씬 먼저 시작한 일본이 최초로 순국산 자동차를 개발하여 양산한 게 불과 1924년의 일이니, 한국이 얼마나 단기간에 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국산 자동차를 개발한 대한자동차회사는, 명칭을 최초라는 의미에서 시발(始發) 자동차로 상정했다.
“으음, 시발 자동차는 어감이 좀…….”
“아니, 의미를 봅시다. 최초란 의미가 중요하지 않소?”
그런데 때마침 연호가 태시로 개원하는 발표가 이뤄지자, 급하게 명칭을 태시 자동차로 바꾸었다.
“태시는 시발하고 뜻은 같은데 어감이 훨씬 좋구먼.”
“국산 기술화, 이야말로 국책에 딱 어울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태시 연간을 상징하게 되겠군.”
태시 자동차는 태시 원년부터 본격적인 생산과 판매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현대적인 판촉으로 라디오 광고도 제작되었다.
「태시, 태시 자동차,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자동차! 우리의 태시 자동차를 타고 종로 거리를 달리자~ 사천리 강토를 달리자~」
호황의 영향으로 상류층 사이에서는 자동차 열풍이 불었고, 국산 기술화와 저렴한 가격을 강조한 태시 자동차는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했다.
꼭 자가용이 아니더라도 대중교통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여 서울 시내 곳곳에 택시가 등장했다.
“전차 타고 신기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비싼 자동차를 돈 내고 탈 수 있다니.”
“세상이 정말 좋아지긴 좋아졌다니까.”
전차에 이어 대중교통수단으로 버스도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포드의 트럭인 TT형을 개조한 11인용 버스를 시작으로, 서울에 버스노선이 생겨났다.
기차, 전차, 버스, 택시가 시내 곳곳을 누비는 서울은, 동양 3대 도시이자 서양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교통망을 갖추게 되었다.
“대전쟁에서 얻은 전훈은, 차량화가 시급하다.”
“하물며 대한은 만주와 연해주라는 드넓은 지역을 방위해야 하니 더욱 그러하다. 이 넓은 지역을 철도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자동차 산업의 중대한 큰손은 바로 군부였다. 군부는 현대전에서 차량화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자체적으로 트럭과 장갑차 생산에 나섰다.
용산과 부평 조병창에는 차에 장갑을 두른 초기형 장갑차와 트럭이 생산되었다.
1920년대 초, 국군기술본부는 프랑스 르노 FT-17 경전차와 영국의 Mark A 휘펫(Whippet) 중전차를 분석하여 독자적인 전차 개발에 나섰다.
전차 개발은 오랜 세월과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해 완성된 전차를 수입하자는 주장도 만만찮았으나, 이선은 독자적인 전차 개발을 추진하도록 명령했다.
만주와 연해주의 드넓은 지역을 전장으로 상정한 전차가 개발되기 시작했고, 대한제국 수립 30주년이 되는 광무 31년(태시 2년으로 변경)까지 시제 전차의 실험에 돌입한다는 목표에 들어갔다.
차량화 및 전차 개발에 관한 한 대한제국군은 아시아 최고급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수위에 꼽히는 나라가 되었다.
「태시 원년 전국인구조사 발표. 전국 2부 15도 인구 2,920만!」
「마침내 한민족 3천만 돌파!」
광무 29년에 조사한 전국 전국인구조사가 발표되었다.
전국 2부 15도 인구 2,920만.
불과 6년 전인 광무 23년에 2,500만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빠른 성장이었다.
의학의 발달로 인한 영아사망률 급감, 수명 증가, 그리고 1910년대부터 본격화된 베이비붐의 영향으로, 대한제국의 순 인구는 매년 70만 내외로 늘어났다.
법적으로만 청국령일 뿐 사실상 한국령이나 다름없는 남만주 자치령의 100만 한국인들까지 합치면, 한민족의 인구는 물경 3천만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웃나라인 중국의 인구가 4억이고, 일본의 인구가 6천만이라 적게 느껴질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1920년대 기준 3천만 인구는 결코 적은 게 아니었다.
원역사의 동시대 조선보다 7백만이 더 증가했고, 당장 이웃나라 청국만 봐도 그 광활한 만주의 인구는 2천만가량이었다. 법적으로 청국령인 만주-몽골-신강-티베트를 모두 합쳐도 3천만이 되지 않았다.
서양 열강을 기준으로 해도, 1925년 기준 프랑스가 4천만이고 이탈리아가 3,900만이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인구 4천만을 돌파한 게 1893년의 일이니, 극심한 인구정체에 빠진 상태였다.
유럽은 대전쟁으로 청년세대가 엄청나게 죽은 것도 큰 인구학적 손실이었다.
한국의 인구증가율이 계속 뒤따른다면, 20년 내로 프랑스도 역전하리라는 계산이 나왔다.
「3천만 민족이 부흥의 시대에 돌입하다!」
「산업 생산과 수출, 확장일로!」
「정부는 전국에서 절대적 빈곤은 사라졌다고 선언! 더 이상 옛날처럼 굶어 죽을 일은 없다!」
「가난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 잘 살아보세!」
부의 총량은 그대로인데 인구만 급격히 증가한다면, 그건 가난과 굶주림을 면치 못할 일이었다.
중요한 건 신흥공업국가 한국의 경제와 산업이 성장일로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의 근본인 농업 생산량도 급증하여 3천만 인구에 안정적인 식량을 공급하고, 잉여생산량을 일본에 수출도 가능했다.
1900년대에 시작, 1910년대에 본격화되어 대전쟁의 전시호황을 누리고 1920년대에 안착한 한국의 공업도 성장일로였다.
수입대체 산업화는 안착되었고, 대전쟁 종전 이후 예전처럼 호황을 누리진 못해도 만주와 화북 시장에서 한국산 제품이 팔려 나갔다.
각국의 정확한 통계가 없었기에 추정의 단계이긴 하지만, 대한제국은 현재 세계 10대 경제규모 국가로 추정되었다.
미국-영국(식민지 포함)-독일-소련-중국-프랑스(식민지 포함)-일본-이탈리아-네덜란드(식민지 포함)-한국이 10대 국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식민대국들은 물론이고, 중국도 압도적인 인구로 10대국에 포함된 점을 감안하면, 신흥국가인 한국이 10대 경제규모를 갖추고 있다는 건 비약적인 발전을 의미했다.
특히 대전쟁과 전후 불황으로 유럽이 휘청거리는 동안 한국은 빠르게 성장했고, 특히 전시 호황기에는 연간 8-9%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1920년대 들어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성장곡선이 둔화되고는 있다지만, 매년 5% 내외의 성장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지금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지만, 미국에서 경제공황이 발생한다면, 1930년대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 대한!」
국가적 위신과 군사력은, 아시아 2대 강국이자 세계 8대 열강이라 할 수 있었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소련-일본-한국이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8대 열강이었다.
패전국인 독일, 혁명으로 서양 열강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 소외된 소련을 제외하면 국제질서의 6대 강국이었다.
물론 신흥강국인 일본이나 한국은 전통적 강자인 서양 열강에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시아의 떠오르는 2대 열강이라는 특수성이 국제질서 내의 발언권을 높였다.
특히 한국은 소련의 진출을 저지하는 동양의 방벽으로 역할을 자리매김하였으므로, 공산주의 혁명을 가장 두려워하는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아시아에서 차지하는 지분을 인정받은 터였다.
내몽골-만주-연해주를 잇는 북방의 광활한 영역은 대한제국의 세력권으로 공인받았고, 한국은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블록 형성에 나섰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은 대한국 정부는 오직 국민의 민의만을 따르리라고 약속합니다.”
태시 원년, 제11대 총리에 취임한 안창호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차별받던 평안도 출신으로 최초의 총리이자 평민 총리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자신의 자질과 성품이었다.
근대적 교육을 받은 안창호는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반영했다. 그 삶의 행적도 미국 유학, 귀국 후 계몽운동, 협동조합운동, 자유주의 정당 정치가, 개혁적 대신이라는 행보를 걸어왔다.
“도산이 연설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청사진을 그리는 계획부터 실무능력까지 보통이 아니야.”
안창호는 행정에서도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했다.
근대적 진보주의자인 안창호는 기술진보에 적극적이었고, 공업화의 진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바로 이 점이 직전의 연립정부를 이끌었던 전봉준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새로운 시대에는 도산이 총리로서 훨씬 훌륭하리라고 확신하네. 늙은이는 후견인 역할을 맡아야지.”
유교적 왕도정치에 기반을 둔 전봉준의 정치적 전성기는 광무 초기 토지개혁 시기였다. 1920년대 빠르게 성장하는 공업국가 대한제국을 이해하기엔, 한때 가장 진보적이었던 전봉준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뒤처지고 있었다.
누구보다 전봉준 자신이 그 한계를 느꼈고, 그렇기에 새 황제의 즉위에 맞춰 스스로 물러나 신진 연립정부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남는 역할을 택했다.
기껏 손에 얻은 권력에 집착하기보다는 국가의 발전방향을 택했다는 점에서, 전봉준은 과연 거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시아, 아니 유럽에서도 이렇게 국민의 민의가 반영되는 정부가 많은가?”
“아니지. 과연 동양의 프랑스, 아시아 최고의 선진 민본주의 헌정국가 대한일세.”
“대한국민이라는 게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야.”
한국은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입헌군주제국가이자, 아시아 최초로 보통선거를 실시한 나라였다.
미국과 서유럽 일부 선진국을 제외하면, 한국의 정치적 능동성과 자유도는 세계에서 손꼽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고, 보통선거로 대표를 선출하여, 민의에 기초한 정부를 수립한 나라가, 과연 1920년대에 얼마나 되겠는가?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자유 위에서, 대한제국은 국민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 * *
태시 원년 6월.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이진의 대관식이 있는 달이었다.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각국에서는 특사를 파견해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했다.
대관식에 참석한 주요 왕족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스웨덴왕국. 스웨덴 왕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대영제국. 조지 5세의 차남 요크 공작 앨버트.
덴마크왕국. 다우마 공주(러시아 황후 마리야 표도로브나).
이탈리아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육촌인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대청국. 선통제의 동생인 순친왕세자 애신각라 부걸.
일본제국. 섭정궁 황태자 히로히토의 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秩父宮雍仁) 친왕.
시암왕국. 라마 6세의 동생인 프라차티뽁 왕자.
러시아 황실. 전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마리야 여대공, 아나스타샤 여대공.
공화국인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장관급 특사를, 거리 문제로 인해 왕족을 보내지 않은 유럽의 왕국들에서도 고위귀족을 특사로 보냈다.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작년에 뵈었을 때만 해도 제가 대관식 축하 사절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저 역시 몰랐습니다. 먼 길을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황태자 시절의 이진과 약속하여 동아시아 방문에 나선 스웨덴 왕태자 구스타프가 귀빈 중에 가장 서열이 높았으므로, 주빈으로서 가장 예우를 받았다.
요크 공작 앨버트 이하 각국의 왕족과 특사들은 모두 새 황제를 예방하여 축하를 했다.
“축하해, 타냐!”
“이제 황후 폐하이시자 황자의 어머니로구나.”
“다들 와 줘서 정말 고마워.”
타티야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온 알렉세이, 임신 중에도 온 올가, 멀리 런던에서 온 마리야와 아나스타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황후 폐하의 대관식에 당연히 와야지.”
“그리고 우리 조카도 보고 싶으니 말이야.”
이제 네 살이 된 황녀 나, 태어난 지 달포가 지난 황자 연수(延壽)를 본 고모들은 기뻐했다.
“아이, 예쁘다.”
“어머니가 미인이니 자식들도 당연히 선남선녀겠지?”
“얘들도 참.”
“얘가 미래의 황제 폐하구나. 연수라는 이름이 무슨 뜻이야?”
“오래 살라는 뜻이야. 정식 이름은 아니고. 동양에서는 먼저 아명을 짓고 시간이 지나면 정식 이름을 지어 주거든.”
황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오래 살라는 의미의 아명인 연수로 불렸다. 관례상 5살 정도가 되면 정식 이름이 주어질 터였다.
“네가 니콜라이 2세의 혈통을 계승한 유일한 손자구나.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
드미트리 대공과 결혼한 올가는 자식이 없다가 얼마 전 임신하였고, 마운트배튼과 결혼한 마리야는 딸만 하나였고, 아나스탸사와 알렉세이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타티야나의 아들이 니콜라이 2세의 유일한 손자였다.
이진과 타티야나의 아들, 아명 연수는 황제 이선과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손자였다.
* * *
태시 원년 6월 10일, 병인년 음력 5월 1일.
환구단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새 황제가 무개차를 타고 경복궁에서 환구단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군중이 도열하여 만세를 외쳤다.
태상황 이선은 일부러 검은색 자동차를 타고 황제 이진의 뒤에 움직였다. 대관식 당일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새 황제에게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환구단에서도 이선은 단에 오르지 않고, 귀빈석과 별도로 태상황을 위해 마련된 옥좌에 황태후 아영과 함께 앉았다.
그 곁에 예친왕 이은과 이금 남매가 앉았다. 순친왕 이척 부부, 의친왕 이강 부부, 영친왕 이영 부부는 그 뒤에 앉았다.
외국에서 파견한 특사와 외교관은 대례복을 입고 귀빈석에서 기립하여 지켜보았다.
이진은 황제를 상징하는 열두 줄의 면류관을 쓰고, 12개의 장문(章紋)이 있는 장복을 입었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천지에 고하노라. 짐은 천명을 계승하여······.”
새 황제 이진이 하늘과 열성조를 향해 제사를 올리고 즉위식 제문을 읽었다.
고유문 낭독이 끝나자, 이진은 문무백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국궁(鞠躬)!”
조복을 입은 문무백관이 일제히 몸을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삼고두(三叩頭)!”
문무백관이 일제히 절을 하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했다.
“산호만세(山呼萬世)!”
“대한국 만세!”
문무백관이 일제히 일어나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산호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재산호 만세(再山呼萬世)!”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만세삼창과 함께,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조선왕조 제28대 군주,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이진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태상황의 옥좌에 앉아있던 이선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일어나 손뼉을 쳤다.
‘내가 즉위하였을 때 할아버지 대원군의 심정이 저러하였을까.’
이선은 30년 전 대원군이 흘렸던 눈물을 기억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최고의 기쁨을 맛보았던 대원군만큼은 아닐지라도, 이선 역시 감개무량했다.
‘태시, 대한제국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선이 느끼는 감격은, 단순히 후계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게 아니라, 대한제국이 역사와 너무나도 다른 경로를 걸은 끝에 반석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실제 1926년 6월 10일과 비교하면…….’
이선은 대관식 날짜를 일부러 오늘로 정했다.
황실에서는 음력 5월 1일이 기일이기도 하고, 새 황후의 탄일이자, 새 황제의 결혼기념일 다음날이라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선이 오늘로 정한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원 역사에서, 1926년 6월 10일은 조선 최후의 군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이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16년 전에 망한 나라였으나, 명목상 최후의 군주였던 순종의 붕어는 다시금 대중적 항일운동에 불을 붙였다.
학생들이 주도하여 좌우를 막론하고 단결하여 만세시위가 크게 일어났다. 침체하던 독립운동에 다시 활기가 돌았지만, 일제는 가혹한 탄압으로 응수했다.
이날을 끝으로, 조선왕조는 역사에서 영원히 문을 닫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변화한 역사는 얼마나 다른가.
이날을 맞아 서울, 아니 전국에 넘실거리는 태극기는 자주독립국 국민의 자부심이 넘치는 상징이었다.
지난 46년간의 노력을 생각하니, 이선은 새삼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선은 여기서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등 많은 영역에서 이선의 지혜를 필요로 했다.
이선은 내년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를 순방하며 대공황과 파국을 대비할 예정이었다.
퇴위한 태상황이자, 대한의 비공식 외교관이자 경제인으로서 역할을 다하리라.
역사의 진보는 결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혁명의 시대, 국민의 시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 3부 完, 후기가 이어집니다 –
후기
안녕하세요. 태사령입니다.
3부 ‘대한, 국민의 시대’가 완결되었습니다.
분명히 2부 후기를 쓸 때만 해도, 3부를 끝으로 완결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본래 계획은 대공황 이전, 대한제국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다는 내용으로 이선이 은퇴하면서 완결하려고 했는데…….
대공황 이후의 혼란과 대립, 2차 세계대전은 정말로 계획에 없었습니다.
기존하고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되기 때문에, 조혁시는 여기서 완결하고 대공황 이후와 세계대전기의 유럽을 배경으로 신작을 쓸 계획이었습니다.
독자님들의 성원을 받아들여, 고심 끝에 조혁시 완결과 신작 집필을 포기하고 4부까지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신작으로 구상했던 건 모두 4부에서 다루도록 해야겠네요.
4부는 시대를 좀 뛰어넘어, 1930년대 중반부터 진행할 생각입니다.
대공황 이후의 변화한 역사, 국가와 이념의 대립, 2차 세계대전까지 다루게 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4부 연재 예정 시작은 2024년입니다.
전 애당초 3부를 끝으로 완결할 계획이었고, 올해는 제가 작가로 데뷔한 지 7년이 되는 해라 안식년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재충전과 본래 차기작으로 구상했던 작품의 자료조사를 겸해서,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일주를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이미 항공권과 동행이 정해졌으니 일정을 바꿀 수는 없고, 올 한해는 대부분 해외에 있게 되었습니다.
완결하고 가면 마음 편하게 갈 수 있었겠지만, 4부가 남아있으니 숙제를 남겨둔 거 같군요.
해외에서 틈틈이 시간 되는대로 3부 완결 이후의 이야기를 외전으로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3부 800화 넘겨 연재하리라곤 몰랐습니다. 하물며 4부 1천화를 넘길 거라곤 상상도 못했네요.
독자님들의 성원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긴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독자 여러분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글을 통해서 실제 역사가 가지 못했던 역사의 경로를 상상하고, 새로운 세계에서 즐거움을 얻을수 있었다면 작가 자신에게도 크나큰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좋은 글을 쓰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모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태사령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