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26)
>26 화>
그녀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마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컨디션은 어때?”
“괜찮아요.”
카리나가 계단을 내려오자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밀라이언이 물었다.
그는 평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허름하진 않지만 부티나 보이지도 않는 튜닉과 흔하디흔한 어두운 색의 바지만을 몸에 걸치고 있었는데 그 차림새가 바람에 날아갈 듯 가벼웠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공작이 아니라 도리어 용병이라고 착각 할 만도 했다.
“정말이지? 무리는 하지 않겠지만 몸이 이상하면 반드시 말해야 돼.”
“네.”
카리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긴 여행을 하며 망가졌던 몸은 며칠 푹 쉬며 점점 원상 복귀 되었다.
체력 자체는 이전보다 떨어진 느낌이었지만 그 외에는 전체적으로 지금까지 중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마차를 타고 근처까지 간 후에는 걸어서 다닐 예정인데, 괜찮겠어?”
“네.”
“그럼 가지.”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자연스럽게 에스코트했다.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에스코트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밀라이언의 에스코트는 신실한 기사인 인프릭만큼이나 정중하고 흠잡을 곳이 없었다.
조금 의외였다.
“의외인 것 같아?”
카리나를 마차에 올리고 그 뒤를 따라 타며 밀라이언이 물었다.
“네?”
“마치 눈앞에서 뛰어가던 토끼가 날개 달고 날아가 버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의 농담 섞인 말에 몇 차례 눈을 끔뻑이던 카리나가 짧은 고민 끝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이언은 그녀의 반응을 예상 했다는 듯 픽, 하고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입을 열어 왔다.
“아버지가 어딜 가서든 파트너를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이것만큼은 직접 가르쳐 주셨거든.”
“전대 공작님께서요?”
“그래. 다른 것에는 방탕하게 놀든 뭘 하든 할 일만 한다면 내버려 뒀지만 귀족의 예절이나 에스코트의 방법이나 식사 예절은 엄하게 가르쳤지.”
카리나는 밀라이언이 틀를거리면서도 열심히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 장난기 많아 보이는 열정적인 사내는 불만을 토하면서도 책임감 있게 제 할 일을 끝냈을 것이다.
카리나가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어쩐지 묘하게 조용한 분위기에 고개를 들자 밀라이언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리나가 다급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훨씬 낫네.”
“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대는 늘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보단 지금이 더 좋아.”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다급히 창문 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별것도 아닌 말에 목이 왜 이렇게 뜨거워지는 것인지.
카리나는 있지도 않은 수통을 찾아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대는? 예절은 백작 부인이 가르쳐 준건가? 움직임이 완벽 하던데.”
밀라이언은 그녀의 한 점 흔들림 없는 행동거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 식기를 잡거나 컵을 쥐는 습관 하나 하나가 귀족가 아가씨 그 자체였다.
걸음걸이는 물론이거니와 서 있을 때의 자세도 흔들림 없이 곧았다.
“전 선생님께 배웠어요.”
“선생님?”
“네, 제 경우엔 자작 부인께 배웠는데…….”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카리나의 눈썹이 잘게 떨리며 느릿하게 아래로 내리 깔렸다. 밀라이언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렸다.
“여동생은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셨고 오라버니랑 남동생은 아버지께 배웠어요.”
“왜 그대에겐 선생을 붙였으면서?”
“오라버니는 후계자였으니 당연했고 제가 한창 배울 땐 동생들이 어렸거든요.”
카리나가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듯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떠오르는 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스스로뿐이다.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 같은데…….”
중얼거렸던 그녀의 눈동자가 흐려 졌다.
“그땐 동생이 무척 아파서요. 저한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나봐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선생님의 칭찬을 받아도 정작 바라는 사람들에겐 한 번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식사 시간에 배운 것을 십분 활용하려고 노력했고 평소의 행동 거지도 배운 대로 하려고 애썼지만 누구의 눈에도 들 수 없었다.
“한 번 놀라지를 않으시더라고요. 전 엄청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반으로 접힌 눈이 흐릿했다.
밀라이언은 아무런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람이 웃는 게 저렇게 처연하고 기뻐 보이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밀라이언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의 웃음을 봐 왔지만 저런 서글픈 종류의 웃음을 본 적은 없었다.
‘사람의 상처는 함부로 가늠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의 아픔은 특히나 그랬다. 그건 밀라이언이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는 말을 아꼈다.
어떠한 말이나 위로는 도리어 상처가 되기도 한다. 가끔은 그저 가만히 들어 주는 것이 위로 될 때도 있는 법이다.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인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는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온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다.
그것을 옳다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었다.
밀라이언은 성격대로 괜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어릴 땐 동생이 무척 싫었어요. 동생은 제가 나가는 걸 싫어했고 부모님은 당연히 동생의 말을 들어주길 바랐거든요.”
아벨리아는 그녀가 어딘가를 간다는 말을 하면 늘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고 가지 말라고 떼를 쓰거나 종종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가족들은 늘 아벨리아의 편이었다.
덕분에 카리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변변한 친구 하나 조차 사귀질 못했다.
“그래서 친구도 사귀지 못했고 사교계 파티나 다과회 초대장도 거절해야 할 때가 많았어요.”
담담하게 읊조리는 말을 듣는 밀라이언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모든 사람이 저에게 동생이 아프니까 네가 이해해야 한다고 했어요. 난 그걸 이해하려고 필사적이 었고요.”
“…….”
“이기적이겠지만 전 동생이 아픈데 대체 내가 왜 이해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사실 지금도 잘 이해는 되지 않았다.
동생이 아픈 것이 자신의 시간과 관계를 빼앗는 이유가 되어야 했는가?
동생을 위해 친구를 사귀고 취미를 만들 모든 시간을 포기해야 했던 것인가?
그래서 집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털어 버린 것이 그것이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버려 가며 아벨리아를 이해해 주고 싶지 않았다.
마차가 한차례 덜컹거리며 멈췄다. 동시에 카리나의 말도 멈췄다.
조금 더 기다리던 밀라이언이 곧 조용히 마차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먼저 땅을 밟은 그가 카리나를 향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던 탓이다.
“카리나.”
“네?”
“세상은 넓어. 남부의 백작령이 전부가 아니야. 마음을 터놓을 누군가가 있었다면 넌 조금 더 행복했을 거야.”
“…….”
카리나는 마차에서 내린 채 고개를 젖혀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그는 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곤 했다.
꽉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온기가 그가 해 준 말에 확신을 더했다.
“분갈이를 해 줘야 할 나무를 여전히 작은 화분에 가둬 길렀어. 뿌리를 깊게 박아 스스로 성장해 나가야 할 이의 기회를 앗아갔지.”
카리나는 멍하니 밀라이언의 말을 듣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스며들었다. 하나하나 메모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그녀에게 힘이 됐다.
“그대가 결국 참다못해 화분을 뛰쳐나올 때까지.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꿈에도 그렸던 말을 들은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흐른 후 한참 만에 카리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나무에 발이 달린 상상을 해버렸어요.”
화분에 잘 박혀 있던 묘목이 뿅! 하고 튀어나와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
“…….”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고 건넨 말끝에 터진 웃음이라니.
괜히 열이 오르는 느낌에 밀라이언이 붉어진 귓불로 뒷덜미를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가 조금 민망한 눈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워요, 작게 속삭인 그녀가 볼을 붉힌 채 성큼성큼 북부의 수도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제멋대로 날뛰는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