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the Dragon RAW novel - Chapter (126)
* 126화 *
이한이 처음 만난 육식공룡은 호랑이보다 조금 더 큰 공룡이었다. 고양이과 맹수처럼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 공룡이었다. 육식공룡과의 첫 조우에서 이한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단단한 가죽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공룡은 무시무시했다. 단검으로 만든 창으로는 상대하기 힘들었다.
‘사이킥 능력만 있었어도.’
염동력만 있어도 어떻게든 잡았을 터다. 이한이 보통 사람보다 신체가 튼튼하다 해도 공룡과 인간은 종이 다르다. 인간 중에서 강하지만, 그렇다고 공룡과 싸워 이기진 못한다.
‘이 놈들을 만날 때마다 도망만 다닐 순 없어.’
이한은 여기저기 함정을 만들었다. 땅을 파서 낙엽을 덮고, 넝쿨로 만든 그물함정을 만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얼마 뒤, 이한은 공룡포획에 성공했다. 공룡고기는 의외로 먹을 만했다. 다 먹지 못한 부위를 말려서 육포로 만들었다. 한 마리만 잡아도 당분간 식량걱정은 없었다.
점차 공룡을 상대하는 법도 익숙해졌다. 공룡들은 패턴이 의외로 단순했다. 그리고 놈들은 불을 무서워했다.
‘살아가는 법. 라오차에게 고마워해야겠군.’
이곳에서 삶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한은 손질한 가죽을 펼쳐서 연기에 그을렸다. 일종의 연기 무두질이었다. 간단한 가죽손질법은 라오차에게 배운 적이 있다.
‘음식이든 가죽이든 부패를 막고 싶으면 연기에 훈제해서 말려라.’ 라오차는 그렇게 말했다. 이한이 저번에 동물기름을 발라둔 가죽망토를 걸쳤다. 이불 대용이었다.
이한은 한 달 전에 동굴로 은신처를 옮겼다. 새롭게 단장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제법 그럴싸한 집이 완성됐다. 집을 만들기 전에는 바빴지만, 완성한 뒤에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만큼 사색이 잠기는 시간도 길었다.
“여긴 지구인건가.”
이한은 일부러 소리 내서 말했다. 이야기상대가 없다보니 입이 근질근질했다.
“정말 이곳에 인간은 나 밖에 없는 걸까.”
이한은 의외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대화할 상대조차 하나 없는 고독과 외로움. 그게 이한을 계속 괴롭혔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아무리 강인한 인간도 혼자서 살아가지 못한다. 그건 이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정신은 피폐했다. 공포나 난관이라면 얼마든지 견뎌내고 넘으면 된다. 오히려 그런 장애를 만나면 더욱 의욕이 샘솟는다.
‘하는 일이 없으면 더 힘들 뿐이야.’
귀환이라는 목적은 존재한다. 그 수단은 없다. 이한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소일거리라니.”
이한은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모래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지우길 반복했다. 원시인들이 벽화를 남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가시간에 할 일이 없었다.
“참 못 그렸다.”
자조하며 말했다. 이한은 그림에 재능이 없었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지나가는 걸까. 이한은 동굴벽에 선을 그어 날짜를 세길 포기했다. 아무리 정신력이 뛰어난 소년이라도 지쳐갔다. 자살이라는 단어마저 생각났다. 그만큼 이한의 마음은 약해졌다. 무의미한 하루하루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후우. 후우.”
이한은 숨을 헐떡였다. 며칠 동안 비만 내렸다. 밖에 나가지 않고 죽은 듯이 동굴에서만 지냈다. 없던 폐쇄공포증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새카만 동굴 끄트머리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이거 좋지 않은 걸.’
이한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내 유일한 장점마저 잃으면 정말로 끝장이다.’
이한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육포를 질겅질겅 뜯었다.
“생존의 가장 큰 난관이 고독이라니.”
물과 식량을 많이 비축하고, 은신처를 아무리 견고하게 꾸려도, 그 고독만큼은 줄지 않았다. 해결할 방법이 없기에 감정의 갈증은 더 심해졌다. 심지어 드래곤이라도 좋으니 아무하고나 이야기를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즉 미쳐버렸을 환경이다.
‘혹시라도 더 이상 방법이 없다면….’
이야기를 나눌 존재가 없으며, 돌아갈 방법조차 없으면… 이한은 정말로 자살할 지도 몰랐다. 굳은 의지가 부서지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일은 좀 더 멀리까지.”
이한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누웠다. 밤이 금방 깊어졌다.
이한은 지금까지 은신처에서 멀리 벗어난 적이 없었다. 오늘은 꽤 멀리 나갈 생각이었다. 어떤 단서나 흔적이라도 찾고 싶었다.
찌르르르.
이한은 팔뚝만한 벌레들을 쳐내며 전진했다. 뭐가 갑자기 나와도 놀라기는커녕 눈썹조차 미동이 없었다.
‘동쪽으로.’
이한은 해를 보고 위치를 잡았다. 무작정 동쪽으로 걸었다. 군데군데 나무에 흔적을 남겼다. 행여나 애써 만든 은신처를 까먹으면 곤란하다.
“크르르르.”
커다란 초식공룡들이 이한을 힐끗 보다가 무시했다. 그들에게 이한은 무의미한 존재였다. 상상화에서나 보던 공룡들을 직접 보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이한도 장엄한 광경에 몇 번은 감동했다. 단지 몇 번이었을 뿐이다. 이제는 무덤덤하게 그들 곁을 지나갔다.
“공룡들 이름을 공부해둘 걸 그랬어.”
이한에게 공룡들은 그저 공룡일 뿐이다. 뿔이 달린 공룡. 목이 긴 공룡, 날렵한 육식공룡, 코뿔소를 닮은 공룡. 악어를 닮은 공룡. 이한은 그런 특징으로 공룡들을 분류했다. 그런 이한도 단 하나의 공룡 이름만큼은 안다.
‘티라노.’
티라노사우르스, 이한은 먼발치에서 직접 본 적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릴 법했지만, 이한은 이미 그보다 더 두려운 드래곤과 싸웠다.
‘두렵지 않지만, 만나면 도망가야 하지.’
티라노사우르스는 지구역사상 가장 유명한 포식자다. 이한이 함정을 준비한다고 해서 막아낼 수준이 아니다. 멀리서 기척만 느껴도 재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
스스슥.
이한은 움찔하며 숨을 죽였다. 멀리서 타조를 닮은 공룡이 지나갔다. 영락없는 타조였다. 이한도 자주 사냥했던 공룡이다. 다리만 빠를 뿐, 위협적이진 않았다.
“키이이이!”
이한을 발견한 타조 공룡들이 위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한은 사냥할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목적은 탐험이다. 아직 식량도 넉넉하게 남았어.’
이한은 좋은 사냥감을 그냥 보냈다. 점점 수풀이 낮아지고 초원이 드러났다. 탁 트인 초원을 바라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간 숲과 동굴에만 있어서 가슴이 답답했었다.
“뭐라도 좋으니 좀 발견하면 좋을 텐데.”
이한에게는 희망이 필요했다. 귀환의 단서라도 있으면 의지를 다잡아 견딜 수 있다.
쿵!
갑자기 대지가 떨렸다. 이한은 바짝 엎드렸다. 건너편의 숲이 크게 흔들렸다. 커다란 무언가가 나오고 있었다.
“키오오오오!”
이한은 눈을 찌푸렸다. 숲에서 나온 것은 거대한 육식공룡이었다. 짧은 앞다리와 대조적인 튼실한 뒷다리. 뭐든 삼킬 듯이 흉포한 이빨. 티라노사우르스다. 티라노가 성큼성큼 숲을 걸어 나왔다.
‘아까 그 타조 공룡들이 도망치던 거였나.’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엎드린 상태에서 조금씩 뒤로 움직였다. 괜히 달렸다가 티라노의 눈에 띄면 곤란하다.
‘먹을 것도 없는 나를 노리진 않겠지만….’
이한과 생각과 달리 티라노는 점점 이한과 가까워졌다. 이한을 노리기보다는 그저 걸어가는 방향이 겹쳤을 뿐이다.
두근, 두근.
이한은 숨을 죽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티라노를 잡을 방법은 없다. 그에게 무기라곤 수제창과 갈고리 케이블장치 하나뿐이다. 케이블장치는 배터리가 바닥나서 한 번 정도 사용가능하다.
‘사이킥 능력의 공백이 이렇게 클 줄이야.’
이한은 자신의 특기가 사이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한의 전투사고패턴은 사이킥 능력을 항상 염두 했다. 막상 사이킥 능력이 없어지니 경우의 수가 많이 줄었다.
‘염동력만 있어도 망토로 눈을 가리거나… 바위를 움직여서….’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 사용가능한 수단만 생각해야 한다. 없는 능력을 아쉬워해봤자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지나가라.’
티라노사우르스는 어느새 이한 가까이 접근했다. 사냥감을 쫓다가 놓친 듯하다. 낮은 으르렁거림이 이한의 등골을 스치는 듯했다.
티라노는 머리를 살짝 숙여서 낯선 냄새를 맡았다. 작은 동공으로 땅바닥을 살폈다.
“카르르르.”
뜨거운 입김이 이한의 머리카락을 스쳐갔다.
쩌어억.
티라노가 입을 벌렸다. 이한을 당장이라도 씹어 삼킬 기세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망설일 시간은 없어.’
이한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아무 것도 못하고 먹히긴 싫었다.
탓!
이한은 상체를 일으키며 티라노의 콧구멍에 창을 쑤셔 박았다. 티라노가 고개를 위로 젖히며 포효했다. 우렁찬 울부짖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티라노는 짧은 앞다리로 콧구멍에 박힌 창을 뽑으려고 했다. 앞다리가 얼굴에 닿지 않기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티라노의 분노가 이한에게 향했다.
“후욱.”
이한은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며 뛰었다. 티라노가 포효할 때부터 달렸기에 제법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티라노는 단번에 거리를 줄이며 추격했다. 거구의 몸집으로 빠르게 이한을 쫓아왔다.
‘금방 따라잡힌다.’
이한은 숲 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무가 많은 지형에서는 티라노가 느려질 거라는 판단이었다.
콰직! 콰직! 으드득!
티라노는 자신을 가로막는 나무들을 몸으로 밀어서 부쉈다. 속도가 줄긴 줄었지만, 이한에 비해서는 한참 빨랐다.
와그작!
티라노의 이빨이 이한의 망토를 깨물었다. 이한은 끌리기 전에 망토를 내던졌다.
“후욱.”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한은 두렵기는커녕 묘한 흥분마저 들었다. 이한을 비롯한 3학년들은 이미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감정은 마비됐다. 원초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드래곤피어와 맞서는 소년들이다. 그보다 급이 낮은 공포에는 면역됐다.
‘덩치가 크면 속도를 줄이기가 힘들다. 저 덩치에 저런 속도라면, 급격하게 방향회전을 하기 힘들 거야.’
이한은 나무를 잡으며 방향을 틀었다. 티라노가 미끄러지듯 속도를 줄였다. 이한의 예상대로 티라노는 속도를 줄이는데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방향을 트는 것도 느렸다.
‘그래도 가깝다. 지구력 승부에서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따라잡혀서 잡아먹힌다. 숲 지형이 곧 끝이야.’
이한의 눈동자가 암벽을 쫓았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나태해진 두뇌가 오랜만에 빠릿빠릿하게 돌아갔다. 위기가 좋은 자극제가 된 셈이다.
‘가속, 방향, 무게.’
이한은 중얼거렸다. 그가 지친 듯이 속도를 줄였다. 쫓아온 티라노가 머리와 상체를 아래로 기울였다. 무게중심이 밑으로 쏠리면서 이한을 삼킬 듯했다.
휘릭!
이한은 갈고리 케이블을 꺼내서 암벽 위쪽으로 쐈다. 갈고리가 고정됨과 동시에 잡아당겼다.
쉬리리릭!
이한의 몸이 공중이 떴다. 케이블의 속도가 무척 빨랐다. 맨몸인 이한은 바위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 와중에 이한은 바위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암벽에 바짝 붙었다. 바위에 긁힌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쿠우우웅!
이한을 쫓던 티라노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무게와 가속도를 이기지 못해서 크게 넘어졌다. 꽤 충격을 클 터다. 실제로도 많은 티라노들이 사냥 중에 넘어져서 부상을 입는다. 갈비뼈가 부러져서 죽는 일도 흔하다. 거대한 덩치에 비해 빠른 속도는 그만큼 위험을 부담하는 신체구조다.
“크르르르.”
하지만 이한은 운이 안 좋았다. 티라노는 뼈가 부러진 곳이 없었다. 멀쩡히 고개를 치켜세웠다. 이한의 발끝까지 주둥이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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