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62
제61화 나 혼자로도 충분하오
내가 심중에 두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빼내려는 순간 웬일인지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있던 점박이 노인이 뜻밖의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소주. 소주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아오나, 저로서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접기엔 일렀다. 바로 반전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삼호는 저와 심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통제권을 넘겨드리거나 공유하고 싶어도…….”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한 나는 간신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목구멍에 가두고 대신 노인의 말을 끊었다.
“그런 건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은인.”
진심이었다. 나는 애초부터 이 부분은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다. 최강의 호위무사를 내 의지 하에 두는 호사를 누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불가능할 것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만약 노인이 말한 바가 가능했다면 독왕이 내버려두었겠는가. 당연히 자신이 직접 ‘괴물’을 부리고자 했을 것이었다. 노인의 말만 듣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리도 만무했다. 필히 철저하게 조사했을 터였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불가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을 게 분명했다.
노인이 너무 작아서 칼로 좀 찢어주고 싶은 욕구를 유발하는 눈을 염소처럼 끔벅거렸다. 내 말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독인들에 대한 편견이 생길까봐 두려웠다. 독왕이든 노인이든 어쩌면 이렇게 어수룩하단 말인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을.
노인에게 내 추론 과정을 들려주고 납득시킬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내 관심사로 직행했다.
“이 여인의 회복력 말인데, 저도 그러한 능력을 가질 수 있을는지요?”
나는 노인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기를 갈망했다.
만약 내가 땅딸보 여자처럼 중상을 입고도 바로 자가 치유할 수 있다면 내 전투력은 급상승할 터였다. 무력 자체는 동일하더라도 버거운 강적과 충돌했을 시 생존 및 승리 확률이 몇 배가 될 게 틀림없었다. 내게 운신불능의 중상을 입혔다고 여기고는 방심할 적에게 결정타를 날릴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땅딸보 여자는 내 어머니와 같은 독관들을 통과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독물들을 체내에 들였을 것이었다. 바탕이 같다면 결과물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머니도, 아니 어머니로부터 완벽하게 같은 체질과 원력을 물려받은 나도 땅딸보 여자와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나의 기대이자 계산속이었다.
노인이 우물쭈물했다. 불길한 징조인지라 나는 지레 낙담했다. 그리고 이번엔 반전이 없었다.
“그게……,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소주.”
“무슨 말씀입니까?”
“삼호의 철갑-철골과 신비한 치유력은 저희에게도 불가사의입니다. 지난 칠 년 간 저를 비롯한 독심원의 모든 독사(毒師)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주군께서도 친히 수십 차례나 삼호를 살펴보셨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곡에서는 이 아이를 두고 ‘불사신의 화신’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노인의 말에서 한 대목을 주목했다.
“칠 년이라면, 그 전에는 이 여인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다는 말씀인지요?”
“그것도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저와 연혼(聯魂)하기 전까지 내내 강시 상태로 있었기 때문입지요. 움직일 수 있고 나서야 저희는 이 아이의 괴이한 능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군들과의 비무 도중 부상을 입었는데 바로 아무는 걸 보고는 다들 경악했더랬지요. 아무튼 그 전에는 어땠을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이십 년이나 시체처럼 누워 지냈을 터였다. 아니, 어머니의 경우를 보건대 독관들을 거치면서도 석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니 삼십 년이라고 보아야 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여자의 팔뚝을 잡았다. 살갗의 감촉이 질기면서도 딱딱했다. 마치 악어껍질 같았다.
“멋진 대결이었습니다, 이모. 저는 전충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여자는 무반응이었으나 노인은 내 호칭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삼호는 소주의 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정중하게 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이 아이는 하대와 존대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저를 사람 취급하는 소주께 감사해야 마땅하나 그럴 수도 없습니다. 생각도 못하고 감정도 없으니까요.”
씁쓸했다. 이렇게 감수성이 부족하다니! 노인에게 일일이 내 심정을 설명하기도 귀찮아 나는 내 결정을 다시 언급했다.
“그래도 저는 이모라고 부르겠습니다.”
내 음성에 깃든 단호함에 노인은 토를 달지 못했다.
* * *
점박이 노인의 이름은 두 개였다.
하나는 그의 본명인 ‘사우 구루’였고 다른 하나는 중원 식으로 지은 ‘소구(蘇究)’였다. 나는 그의 청에 따라 그를 소구로 친인들에게 소개했다. 이모는 삼호를 삼월로 바꾸었다.
두 사람을 선보이기 전에 한우경과 검황자에게 응수타진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 의외로 노소 모두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독공에 대한 호기심을 표명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점박이 노인과 이모를 늪지로 데려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소동을 일으켰다. 괴선이었다.
노인을 보자마자 그를 ‘천하의 삿된 종자’라 규정한 괴선은 당장 요사스러운 혀를 뽑아버리겠다며 난리를 쳤다. 노인은 사색이 되었다. 노인 편에 서서 괴선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선인들은 술사들의 천적이었다. 선인이 마인 앞에서 오그라들 듯 술사는 선인에겐 꼼짝도 못했다.
나는 그제야 점박이 노인이 내 친인들과의 상견례를 극도로 꺼렸던 까닭을 이해했다. 이모가 독인임이 드러날까 봐 염려스럽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노인은 사전에 내 주위에 선인, 그것도 그냥 선인이 아니라 선맥 사상 최강으로 평가받는 무선(武仙)이 얼쩡거리고 있음을 알았을 터였다.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아무리 독왕이 명을 내렸더라도 이모를 대동하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만큼 노인은 괴선을 무서워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생쥐가 난생 처음 보는 고양이에게 원초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선인과 술사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도 내 입장에서는 신기했다. 아무튼 나는 겁에 질린 노인이 이모를 부리기 전에 사태를 수습했다. 노인이 내 어머니의 은인이자 내 성취에 큰 도움이 될 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괴선은 누그러졌다.
다음 수순은 정해져있었다. 다들 독공을 견식하고 싶어 했다. 우습게도 모두의 시선은 이모가 아니라 노인에게 쏠렸다. 이모에 관해서는 왜 왔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들이었다. 늪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경공을 쓰지 않고 걸어서 들어왔었다.
나는 늪지로 오기 전 노인이 간청했던 바에 따라 이모의 비밀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일종의 독강시임을 알게 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요령껏 친인들의 요구를 무마시켰다. 나를 지켜야 할 급박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독공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독왕의 엄명을 독공 시현 불가의 구실로 내민 것이었다. 한우경은 아쉬워하고 괴선은 구시렁거렸지만 나는 독왕에게 절대복종해야 하는 독인들의 처지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강변하며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 * *
친인들과의 인사를 마친 후 점박이 노인과 이모를 장원으로 데리고 간 나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진소월과 면담했다.
당분간은 장원에 오지 않을 거라 큰소리 친 바로 다음 날 얼굴을 맞대는 것이라 다소 민망했지만 나는 그녀를 보아서 내심 기뻤다. 그녀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 낯으로 나를 반겼다. 우리는 둘 다 꽁한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진소월에겐 이모에 관해 모든 것을 밝혔다. 이모의 경이로운 회복력에 대해 듣더니 진소월은 나와 똑같은 사고과정을 거쳐 내가 품었던 희망을 피력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런 걸 두고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부창부수? 뭐라 부르던 간에 그녀와 나는 지음인 양 잘 통하고 죽도 잘 맞았다.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와 천생연분임에 틀림없을 진소월을 안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느라 적잖은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녀가 작심하고 유혹했다면 흔들렸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전날의 내 태도를 의식했던지 선을 넘지 않았다.
약간, 아주 약간 아쉬웠다.
* * *
각각 두 명으로 이루어진 세 무리의 방문객들이 잇달아 나를 찾은 지 보름이 지나 새해가 왔다.
언제 검왕이 검황자를 끌고 가기 위해 올지 몰랐기에 나는 한우경이 그들 사제와 함께 떠나기 전에 그를 붙잡고 불철주야 수련에 몰두했다. 그러던 차에 엉뚱하게도 검왕 대신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장원에서 보낸 전서구가 늪지 초입에 설치한 횃대에 내려앉은 것은 해가 중천에 뜬 정오 무렵이었다. 근래 진소월은 비둘기들을 훈련시켜 장원과 늪지 간에 신속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그래서 굳이 강태수가 왕복 이삼십 리 길을 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의 수고도 덜었지만 효율성도 엄청나게 높아졌다. 전서구를 이용하면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아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나는 전서구의 발목에 묶인 첩지를 풀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진소월이 아니라 강태수의 글씨였다. 급보인지라 지하석실에서 한창 자고 있을 진소월을 깨웠을 테지만 강태수는 그 전에 미리 지시받은 대로 내게 전서구를 날린 것이었다.
나는 내 곁으로 달려온 괴선에게 첩지를 건네주었다.
“어쩔 참이냐?”
물으나마나한 질문이었으나 나는 친절한 사람이기에 답을 주었다.
“가서 구해야지요.”
“같이 가랴?”
“됐소. 나 혼자로도 충분하오.”
괴선은 굳이 동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고 선선히 물러섰다. 다른 이들에게 사정을 알린 나는 동북 방면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도중에 장원을 지나쳤지만 들르지 않고 곧장 전원으로 날아갔다. 목적지는 첩지에 적힌 대로 소월루였다.
진청운의 처소인 삼층 목조건물 입구에 그의 충복인 조봉(曺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나를 본 조봉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웅.”
오랜만에 듣는 별호가 낯설었다. 나는 시간낭비하지 않고 용건으로 직행했다.
“언제였습니까?”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으나 반 시진 전쯤으로 추정됩니다. 그보다 조금 빠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루주님은 후원에서 홀로 산보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는 진청운을 납치해 간 자, 혹은 자들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보고와 동시에 조봉이 왼쪽 아래 귀퉁이에 이라고 적힌 붉은 색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안에 든 종이를 펼치니 한 줄의 명령과 두 줄의 협박이 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광주 상야평이라면 전원에서 서북으로 이천칠백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고도 하루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는 건 나에게 생고생을 시켜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 진을 빼놓겠다는 수작이었다. 나는 물론 그 지시에 따를 생각이 개미 오줌만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