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69
제68화 얼마나 있어야 할 것 같소?
일각여삼추라더니 반의반 각이 터무니없이 길었다.
짐짝처럼 광객에게 들려 도무지 끝이 나올 것 같지 않는 토굴을 지나며 나는 이 비로를 만들었다는 신필주가 미쳤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진소월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 비로의 원래 용도는 비상사태에 대비한 ‘부용 아씨’의 탈출로였다. 그런데 아무리 차단막과 기관 장치를 설치했다고 해도 이렇게 길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부용 아씨는 비로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지칠 텐데. 조력자가 없다면 그녀가 출구까지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진소월은 비로 중간에 다른 도피처가 있다고 했다. 이 비로의 역할은 부용 아씨가 그리로 숨는 동안 침입자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진소월이 이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은 추적자의 격이 달라서였다. 기실 신필주가 상정했던 ‘초절정 무위의 적’이면 애초에 달아날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사왕은 우리가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비로 근처에 은신해 있는 우리의 기운을 쉽게 감지해낼 터였다. 진소월과 진청운, 그리고 이광은 호흡의 통제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우선은 그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는 게 급선무였다.
여하간 도주하는 시점에서는 신필주의 의도를 몰라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내 귀에도 신경에 거슬리는 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왕이 아까 진소월이 내렸던 차단막을 부수는 소리였다. 나보다 조금 늦게 그 소리를 포착한 괴선이 뒤에서 다급히 외쳤다.
“사왕이 오고 있다!”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보고였다. 우리 진영의 불안감만 증폭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희망을 전하는 진소월의 옥음이 토굴을 울렸다.
“다 왔어요.”
천장의 야명주 조각들이 내뿜는 희미한 빛과는 다른 미광(微光)이 전면에 일렁거렸다. 한우경에 이어 광객이 그 빛 더미로 들어가자 난데없이 탁 트인 야외가 시야를 채웠다.
그럼에도 나는 더 답답해졌다. 비로를 나왔지만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사왕도 조금 있으면 출구로 나올 터였다. 수백 장의 격차가 있다고 해도 그가 우리를 따라잡는 건 한 순간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대책이 두 가지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하나는 사왕의 목표물인 나만 남고 친인들을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진소월 등이 나를 사왕에게 먹이로 던져줄 리 만무하니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분산뿐이었다. 그러면 우리 중 절반은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친인들의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사왕을 내 쪽으로 부르기로 작심했다. 그 전에 내 짝을 광객에서 검황자로 바꾸어야 했다. 사왕도 검왕의 후계자에겐 함부로 살수를 쓰지 못할 것이었다.
진소월에겐 다른 타개책이 있었다. 내가 떠올렸던 것들보다 월등한 방책이었다.
“모두들 노야 뒤를 따라와요. 절대로 놓치면 안 돼요.”
진소월의 지시에 괴선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아이야, 이렇게 뭉쳐 있다가 사왕에게 걸리면 우리 모두…….”
괴선은 차마 ‘죽을 텐데.’라는 뒷말을 붙이지 못했다.
팔을 뻗어 한우경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며 진소월이 차분하고도 단호한 음성을 토해냈다.
“저를 믿으세요. 그를 떨쳐낼 방법이 있어요.”
도저히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진소월의 영민함을 알기에 모두들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과연 그녀에겐 기상천외의 묘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출구에서 일백여 장 떨어진 곳에 폭이 삼사 장쯤 되는 작은 강이 나왔다. 우리는 한우경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었다. 사전에 진소월이 잠수할 것을 일러두었기에 수중에서 물결을 따라 내려가던 우리 무리는 한우경이 강가에 붙는 것을 보고는 그리로 모였다. 한우경은 흙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도 그를 쫓았다.
벽 속은 위로 경사가 진 또 다른 비로였다. 얼마 가지 않아 물기가 사라지고 길은 내리막으로 변했다. 우리는 땅 속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침내 토끼 굴 같은 통로가 끝나고 서너 평가량의 공간이 나왔다. 거기가 종착지였다.
품에서 엄지손톱만한 야명주를 꺼내 주위를 밝히며 진소월이 자신감이 깃든 목소리로 선언했다.
“아무리 사왕이라도 여기는 찾아내지 못할 거예요.”
괴선이 토를 달았다.
“그렇긴 하겠다만 여기 있다가 숨이 막히면 어쩌려고? 우리야 한 시진까지도 괜찮을 터이지만 너와 네 아비, 그리고 이 꼬마 녀석은 일각도 버티기 어려울 텐데.”
“염려마세요, 어르신. 공기구멍이 있어요.”
할 말이 없어진 괴선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이런 데는 어떻게 찾아냈느냐? 보아하니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
“지금도 그렇지만 전원 일대는 팔방으로 통하는 탓에 고대왕국 시대에도 요충지였어요. 전란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곳 중 하나였죠. 그래서 옛사람들은 곳곳에 이런 대피소를 마련해 두었어요. 저는 고서에 기록된 암문을 해독해 스물두 군데를 찾아냈고 강 호위의 도움을 받아 여섯 곳은 아직 쓸 만하다는 걸 알아냈어요. 그렇더라도 설마 이곳을 사용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요긴하게 쓰여 다행이네요.”
괴선이 탄성을 터뜨렸다.
“하아, 천하에서 가장 어여쁜 아이가 어쩌면 이리도 영특하기까지 할꼬. 헌데 아까 그 벽을 그냥 통과했으면 어쩔 뻔했느냐? 네 안력으로는 아무 것도 안 보였을 텐데. 참, 오해는 말거라. 트집을 잡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다.”
“실은 전날 강 호위에게 부탁해 직접 이곳을 답사한 적이 있어요. 전 공자가 정사마 무림 전체와 척을 졌으니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가능한 한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해두고 싶었거든요. 아무튼 그때 강벽의 출입구에다 야광석으로 표식을 해두었어요. 그래서 볼 수 있었던 거예요. 물론 한 노야께서 순식간에 제 뜻을 아시곤 바로 찾아주신 덕분이에요. 그러지 않았다면 저희 부녀와 광이는 숨을 참지 못하고 발버둥 쳤을 테고, 그러면 수면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소월이 설명을 보태지 않았지만 강 위로 나가면 사왕에게 걸렸을 터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의식했는지 괴선이 짐짓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핫, 저놈을 잡겠다고 밤새 수천 리를 날아왔을 텐데 꼴좋게 됐군, 그 재수 없는 작자. 지금쯤 쫓던 닭을 놓치고는 분통이 터진 똥개처럼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헐떡거리고 있을 테지?”
진소월의 분홍빛 입술에 쓴웃음이 걸렸다.
“사왕은 이 근처에 있을 거예요. 우리가 숨었을 법한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면서요.”
괴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라? 어째서?”
“그는 비로의 출구에서 강으로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 아까 우리가 입수한 곳까지 왔을 거예요. 강 건너에 족적이 남아있지 않으니 우리가 위든 아래든 강을 타고 달아났으리라 판단했을 테지요. 그의 입장에서 어느 쪽이냐가 문제였을 테고요. 그는 양자택일을 하는 대신 천공으로 비상했을 듯싶어요. 수백 장 상공에서는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상류든 하류든 강줄기 위에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지상으로 내려온 후 발자국을 찾아 강가를 훑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도중에 강에서 나와 산악지대로 들어갔으리라 여기고서요.” 꼴깍, 요란하게 침을 삼킨 괴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면 그 작자에게 들킬 가능성도 잊지 않으냐?”
진소월이 괴선과 우리들을 안심시켰다.
“염려마세요, 어르신.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설령 사왕이 우리의 도피 수단을 간파했더라도 입구를 모르는 한 여기를 찾을 순 없어요. 그러려면 강 주변의 땅을 지하 칠팔 장까지 모조리 뒤집어놓아야 할 터인데 그런 수고를 할 턱이 없어요. 그간의 이력을 보건대 그는 그렇게 인내심이 강한 인물이 아니에요.”
다른 이들처럼 진소월과 괴선의 문답을 듣고만 있던 내가 대화에 참여했다.
“여기엔 얼마나 있어야 할 것 같소?”
진소월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야명주의 은은한 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를 측면에서 바라보는 검황자의 눈이 미약에 취한 듯 몽롱해졌다.
“두 시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지만 나 때문에 일곱 시진은 머물러있어야 할 거예요. 미안해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점박이 노인이 모두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가씨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진소월이 쓰게 웃었다.
“저는 지병이 있어 햇빛을 보지 못해요, 소 대인. 그래서 해가 진 이후에나 나갈 수 있어요.”
“아!”
괴선이 괜한 질문을 했다는 듯 점박이 노인을 노려보았다. 점박이 노인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위축되었다. 나로부터 ‘이모’가 나를 능가하는 강자임을 들었기에 괴선은 더는 점박이 농인을 압박하지 않고 진소월을 보았다.
“여기를 나가면 어디를 갈 참이냐? 오늘 허탕을 쳤으니 분이 올라 그 작자가 저놈을 잡으려고 더욱 혈안이 될 텐데.”
진소월의 옥용에 그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웃는 이유를 아는 이는 나밖에 없었다.
“따로 은신처를 마련해두었어요, 어르신.”
“호오, 역시!”
탄성을 발한 괴선이 찬탄사를 늘어놓기 전에 진소월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나가기 전에 결정을 해야 해요.”
괴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이냐?”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은 진소월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은신처에 들지 말지를요. 일단 들어가면 꽤 오랜 기간 동안 바깥출입을 삼가야 할 거예요.”
‘이모’만 빼고 다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은신처로의 동행을 원치 않는 이들에겐 그곳의 위치를 알려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내내 침묵하던 검황자가 진소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나는 같이 가겠소.”
광객이 뒤를 이었다.
“나도 은공과 끝까지 함께 하겠네.”
괴선이 투덜거렸다.
“이 철딱서니 없는 놈 하나 때문에 다들 이게 무슨 생고생이람.”
찔끔한 탓에 반사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길, 싫으면 안 가면 될 거 아뇨? 누가 잡았소?”
“허어, 이 놈 보게나.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더니, 어디서 흰소리야? 그게 몇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취할 태도냐, 이놈아?”
괴선의 노기가 진짜 같았기에 나는 싹싹하게 물러섰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와 입씨름 놀이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잘못했소, 노인장. 용서해 주오. 그리고 노인장 말이 맞소. 모두에게 사과하겠소. 나로 인해 고초를 겪게 해서 면목이 없소.”
괴선이 아직 덜 아문 내 왼 어깨를 툭 쳤다. 너무 아파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놈이 죽을 때가 됐나?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냥 너답게 굴어라, 이놈아. 닭살 돋으니까.”
내가 반격할 겨를을 주지 않고 괴선이 자신의 결정을 알렸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끝까지 가보자. 까짓 한 몇 년 면벽 수행하는 셈 치지 뭐.”
다시 내 어깨를 두드릴 기세인지라 나는 괴선을 쏘아보며 인상을 썼다.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어럽쇼, 이놈 보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고리눈을 부라려? 어디…….”
괴선은 심술을 부리지 못했다.
“그만 하게.”
내게 손을 뻗는 괴선을 제지한 이는 한우경이었다. 연배가 높은 데다 무력 또한 월등했기에 괴선은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나쁜 장난을 치다 들킨 악동처럼 움찔거리는 괴선을 일별한 한우경이 진소월과 시선을 맞췄다.
“나도 가마. 다만 조만간 검총에 다녀와야겠구나. 광이 사부가 우리 행방을 궁금해 할 터이니. 하지만 나고 들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마.”
진소월은 반색한 반면 검황자의 낯빛은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