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3
제72화 아, 제발 닥치시라고!
무왕이 공터의 끄트머리로 걸어가더니 산기슭에 서서 나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지시에 따랐다. 운무에 잠긴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왕이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그날 네가 떠난 후 나는 저 자욱한 안개 같은 심마에 들었다.”
나는 놀라서 무왕을 보았다.
“처음엔 네 신법을 본 충격의 여파인 줄 알았다. 내가 의도치 않게 뿌렸던 씨앗이 그토록 훌륭한 결실을 맺다니. 그것은 감동이면서도 충격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또 한 번 경악했다. 불과 석 달 만에 무영수를 파훼하다니. 아느냐, 아이야? 아까 네가 현시한 신법이 내가 공식적인 정파제일인의 자리에 오르고 정맹의 맹주로 추대되었던 무렵에 도달했던 경지를 구현했음을. 만약 내가 조금만 일찍 그 수를 체득했더라면 검왕을 상대로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기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일백 초도 넘기지 못하고 검을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게다.”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만족하라는 건가. 자기보다 이십여 년이나 빨랐으니 우쭐하라는 건가.
한편 나는 무왕의 뒷말이 궁금했다.
‘처음엔’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그를 심마에 들게 한 이유는 따로 있을 터였다. 아까의 질문과 연관시켜보면 ‘부용 아씨’에 관해 나누었던 대화와 관계가 있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전혀 종잡을 수 없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구나. 아무튼 나는 그날 너를 만난 후 한 동안 수련을 멈추어야 했다.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더구나. 묵상조차 불가능했다. 무공에 입문한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는 심마의 뿌리를 캐내느라 고심했다. 너와 연관이 있음은 쉬이 알았지만 정확히 어떤 것이 내 심상을 건드리고 어지럽혔는지는 알지 못했다. 좀 전에 말했듯 처음엔 너희 부자가 일군 오절신공이 원인이라 판단했더랬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퍼뜩 떠오르더구나. 무엇이 나를 혼돈에 빠뜨렸는지. 그것은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 나를 흔들었고 내가 거부했던 눈빛. 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눈빛.
그 눈빛은, 뇌리에 선명히 떠 오른 그 눈빛은 내가 봉인해 두었던 감정들을 마구 끄집어내었다. 나는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인정해야 했다. 나도 한낱 욕망에 끄달리는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더구나.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더구나.”
무왕의 마지막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무왕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동공은 전에 없이 강렬한 안광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변함없이 차분했다.
“나는 상상력이 부족한 위인이다. 아니, 무공 방면을 제외하면 아예 결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하지만 나는 상상해보았다. 그날 나를 간절히 원하는 그 눈빛을 받아들였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내가 두려워했듯 그녀는 정말로 무인지로에 크나큰 장애가 되었을까? 꽃에 한 눈을 판 대가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까?
나는 지금도 내가 쏟아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아이야. 하지만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날과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내 상상으로는, 그렇게 했더라도 나는 봉우리에 올랐을 것 같구나. 지금의 봉우리와는 다른 봉우리일 테지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무왕이 웃었다.
“허어, 그래, 너무 사사로운 사연을 늘어놓았구나. 내게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일 터인데.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보려무나. 너 말고는 세상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니 너를 만난 김에 풀어내고 싶구나. 그래주겠느냐?”
어떻게 안 된다고 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어르신.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고맙다. 어디까지 했더라?”
“그녀와 인연을 맺었더라도 다른 봉우리에 오르셨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랬지. 나는 내가 가지 않은 그 길을 상상해보았다. 즐거우면서도 괴롭더구나.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고. 우리는 하루만 수련을 중단해도 목에 가시가 돋는 족속이 아니더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습니다.”
무왕이 다시 웃었다.
“상상놀이가 길어지고 그에 따라 무려 두 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수련을 할 수 없게 되자 더럭 겁이 나더구나. 이러다 퇴보하는 게 아닐까. 더 심하면 주화입마에 들지는 않을까.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장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나는 결단을 내렸다. 염두에 두고 있던 두 가지 해결책 중 하나를 결행하기로. 그게 무엇이었을 것 같으냐?”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무왕이 이미 답을 알려주지 않았던가.
“어르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다가 ‘그 눈빛’을 떠올림으로써 기지개를 편 감정들을 억누르지 않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것 아닙니까?”
내 반문에 무왕은 탄복했다.
“하아, 영특하도다. 그렇구나, 아이야. 나는 내 감정들을 묵살하고 억지로 수련을 재개하는 대신 내 마음에 흐르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았지. 그러던 어느 순간 소스라쳤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 본론이 나올 터였다. 하지만 내 예상은 또 빗나갔다.
무왕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에게 소스라친 까닭을 밝히도록 독촉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나는 꾹 참았다. 상대가 상대인데다 말을 들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무왕의 침묵은 짧았다.
“십오 년 전 검왕과의 비무는 내게 깊은 절망을 안겼다. 검공 겨루기가 아니라 가진 바 무공 전부를 동원했더라도 나는 그에게 패배했을 게다. 그날 나는 그와의 차이를 절감했다. 한 우물을 판 이와 이곳저곳에 손 댄 자의 차이라고나 할까.
정맹으로 귀환한 나는 맹의 대소사를 원로들에게 일임하고 내 처소에서 사실상 폐관수련에 들었다. 부끄럽게도 검왕을 따라잡기 위해 그의 방식을 흉내 낸 것이었다.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지난 십오 년 간 나는 착실히 전진해왔다. 그러나 내가 취합하고 터득한 무학의 근본적인 한계를 상징하는 벽을 넘지는 못했다. 지금의 너와 똑같은 문제를 십오 년이나 갖고 있었던 게다.”
나는 전율했다. 그렇다면 기적이 가리키는 바는 자명했다. 무왕은 자신의 봉우리에서 천공으로 날아오른 것이었다.
“무공의 궁구와 전혀 상관없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일순간에 나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깨져나가자 나는 전율했다. 하지만 황홀경이 젖어있을 겨를이 없었다. 내 심상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선들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몰아지경에 들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레가 지나 있더구나.”
나는 진심으로 무왕이 부러웠다. 나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다만 나의 경우는 이레 동안이 아니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거나 전력 이상을 쏟아낸 격전에서 찰나지간 일어난 비약이었다.
무왕이 몸을 돌려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지척인데다 그보다 일 척 이상 큰 관계로 그를 내려다봐야 했기에 약간 민망했다. 나는 무릎을 구부려 눈높이를 맞출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보름에 걸쳐 불시에 들이닥친 깨달음을 정리한 직후 집법단의 금풍검이 나를 친견하기를 청하더구나. 원래는 물리칠 작정이었으나 그가 나를 보고자 하는 구체적인 용건을 올리지 않았다기에 접견을 허락했다. 왠지 너와 관련되어 있을 것 같더구나. 예감대로였다. 금풍검에게서 네 전언을 받고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운명의 끈이 너와 연결된 것 같았다고나 할까. 나는 네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보고자 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여기로 온 게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무왕이 내 간을 철렁 내려놓게 만드는 말을 덧붙였다.
“너를 말리기 위해서. 과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망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너를 꾸짖고 네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려고.”
휘이잉.
찬바람이 불어와 허탈함으로 공허해진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무왕이 원망스러웠다. 그따위 허망한 결론을 끄집어내려고 그렇게 변죽을 울렸단 말인가? 대체 이게 뭔 심술인가? 잔뜩 희망을 부풀려 놓고는 마지막 순간 송곳으로 찔러 펑 터뜨린 격이었다.
낙담과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내 눈을 응시하며 무왕이 물었다.
“내가 원망스러우냐?”
“…….”
무왕이 웃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귀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너를 위해서다. 네가 오늘 보여준 성취는 나무랄 데가 없다.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 제발 닥치시라고!
내 심사에 아랑곳없이 무왕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조바심을 내지마라, 아이야. 정도를 걷는 건 느리나 반드시 보답을 안겨준다. 끊임없이 정진한다면 언젠가 너는 틀림없이…….”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무엄하게도 무왕의 말을 끊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르신.”
더 이상의 잔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나는 무왕이 내 불퉁한 태도와 언사에 분기를 드러내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오늘 내내 그랬던 것처럼 예상은 또 틀렸다.
무왕은 화를 내는 대신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핫, 너는 과연 ‘그 아이’와는 전혀 다른 종자구나. ‘그 아이’가 지녔던 수줍음이나 나에 대한 경외심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으니.”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진실이 아니었기에 조금 억울했으나 나는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무왕이 정색했다.
“그래서 너에게 맞는 처방을 내리기로 했다.”
나는 짝사랑하던 사내의 사랑고백을 듣는 여자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혹시!
무왕이 엄숙하게 말했다.
“네 원을 들어주마.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경고하고자 한다. 나의 심득은 네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재앙이 될 공산이 훨씬 크다. 느닷없이 솟아났으나 그것은 기실 내 수십 년 적공의 결실이나 다름없다. 그 과정을 생략하고 요체만 취하려 들면 십중십, 백중백 탈이 날 터. 너는 천, 아니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네 목숨과 미래를 걸어야 한다.
보기 전이면 모르나 일단 본 연후엔 지울 수가 없을 게다. 너는 내 심득에 갇혀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나마도 그 정도로 끝나면 운이 좋은 경우라 할 수 있을 터. 너는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들 것이다. 그럼에도 기어이 보고자 하느냐?”
물으나마나한 질문이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부탁드립니다.”
무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어떤 결말을 보든 전적으로 네 책임임을 잊지 말아라.”
“물론입니다, 어르신. 저는 그저 하해와 같으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무왕이 아까 우리가 비무를 치렀던 공터로 갔다. 나는 그를 따르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공터 한 가운데 선 무왕이 자신의 ‘심득’을 소개했다.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았다. 구결도 없구나. 날 것 그대로이니 허점도 많을 게다.”
아무렴요. 어서 보여주기나 하시지요.
“순서도 뒤죽박죽이니 나오는 대로 풀 것이다. 알아서 취하려무나.”
무왕이 엉덩이를 뒤로 빼더니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양팔은 손등을 위로 한 채 앞으로 늘어뜨린 상태였다. 그러다 뒷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더니 마치 취객이 비틀거리듯 갈지자 행보를 보이며 광인처럼 팔들을 마구잡이로 휘젓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무왕이 선보이는 괴이한 춤사위를 지켜보았다. 벌써부터 흥분으로 폭주하는 혈류를 제어하려 애를 쓰며. 무왕의 현란한 움직임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뇌리에 각인시키려 초집중하며.
요란하게 우짖던 새들이 울음을 그치고 바람도 숨을 죽였다. 인생 최고의 광세기연을 접하는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