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96
제95화 그건 곤란하오
해는 졌지만 아직 미명이 남아있었기에 나는 진소월을 두고 혼자 동굴을 나왔다.
입구에 서있던 이광이 나를 보자마자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요, 큰 형님.”
“어딜 말이냐?”
내가 인도에 응하지 않고 버티자 이광이 발을 동동 굴렀다.
“괴선 할아버지가 큰 형님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삼십을 헤아릴 때까지 오지 않으면 태양광천장을 전수하지 않으실 거라고…….”
“걱정하지 마라, 꼬마야. 삼십이 아니라 삼백을 세고도, 아니 숫제 내일 가더라도 그 노인장이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네가 마다하더라도 받아달라고 애걸할 걸.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래도.”
이광이 울먹였다.
“그게 아니라, 괴선 할아버지에게 삼십을 세시기 전까지 꼭 큰 형님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할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기 싫어요. 그러니 제발 빨리 가요.”
나는 이광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순간 가속을 발했다. 속도에 놀란 이광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진소월의 동굴에서 삼십여 장 떨어진 괴선의 모옥에 이르렀다. 모옥 마루에 괴선과 함께 앉아있던 광객이 나를 보고는 튕기듯 일어섰다.
“어서 오시게, 은공.”
내가 응답하기도 전에 괴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냐, 이놈아?”
뜨끔했다. 괴선은 백운영을 폐인으로 만든 후 부영 저자에 버린 내 처사를 들었을 터였다. 그를 방면해주길 바랐던 그로서는 화가 날만도 했다. 나는 그가 명줄을 자르지 말라고 했지 건드리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변명할 참이었다. 그에 앞서 우선은 시치미부터 뗐다.
“뭐가 말이오?”
“몰라서 묻는 게냐? 자전검군과 경천도군, 거기에 파산권귀까지 한 번에 처치했다며? 그게 정말이냐고, 이놈아?”
허탈했다.
“난 또 뭐라고.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오. 단 일수로 그 작자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렸소. 자랑이 아니라 진짜 끝내주는 솜씨였소. 더 멋진 게 뭔지 아시오? 그 일수가 이 몸이 스스로 창안한 걸작이었다는 거요. 아! 나는 백년, 아니 천년에 하나 날까 말까한 초천재임이 분명하오.”
내가 으스대자 광객은 찬탄하고 괴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겸양지덕이라고는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는 놈 같으니.”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개구리한테 코딱지가 있소?”
“코가 있는데 코딱지가 없을 리가 있느냐, 이놈아. 거지발싸개 같은 헛소린 그만 하고 그 끝내줬다는 솜씨나 보여 다오.”
“지금 말이오?”
“그래, 이놈아. 그러려고 부른 거니 군소리 말고 재주를 부려봐라.”
“여기서는 곤란하오. 석벽이 붕괴될 텐데.”
“그럼 적당한 곳으로 옮기자꾸나. 그래, 절곡 너머의 황무지가 좋겠다. 그리로 가자.”
“거기는 외인들 눈에 띌 염려가…….”
“아, 이놈아. 뭔 잡소리가 그리 기냐? 비싸게 굴지 말고 그냥 해라.”
좀 더 괴선과 흥겨운 입씨름을 할까 하다가 그의 눈빛이 진지해진 걸 본 나는 품에서 옥소를 꺼냈다.
“여기선 안 된다며?”
“뭐, 조심하면 석벽을 망가뜨리지 않고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소. 잘 보시오. 순식간에 끝날 테니까.”
나는 모옥 반대편의 석벽을 향해 신수를 발출했다.
반응은 시금털털했다.
광객은 눈을 끔벅거렸고 괴선은 눈을 찡그렸으며 이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 것도 경탄의 표시는 아니었다.
“뭔가 느끼기는 했는데, 보지는 못했네, 은공.”
광객이 감상을 밝히자 괴선이 뒤를 이었다.
“아무래도 사기 같은데. 뭘 하긴 한 게냐, 이놈?”
이광은 두 노인의 말을 듣고 잔뜩 기대했던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자기의 안목이 부족한 탓이 아님을 알고는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괴선의 질문에 대꾸했다.
“당연히 했으니까 광객 어르신이 뭔가를 느낀 게 아니겠소?”
“근데 왜 아무 것도 안 보인 게냐? 석벽도 멀쩡하고.”
“원래 너무 빠르면 보이지 않는 법이오. 석벽이 무사한 건 내가 치지 않았기 때문이고.”
나름 설득력 있는 해명이었지만 괴선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워낙 장난기가 많은 놈이니 당체 믿을 수가 있어야지. 다시 해 봐라, 이놈아.”
“아, 제길. 이게 얼마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절기인 줄 아시오? 게다가 원력도 거의 최대치를…….”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 그냥 해라, 이놈아. 어차피 할 것을. 대신 이번에는 제대로 보기 위해 준비를 좀 하자.”
괴선이 광객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서 바위 세 개만 구해오게, 태산.”
“알겠소, 괴선. 금방 다녀오겠소.”
괴선이 선력을 상실한 이후 그의 말이라면 거스르는 법이 없는 광객이 숲으로 날아갔다. 그러고는 잠시 후 크기와 모양이 다른 바위 세 개를 안고 돌아왔다. 하나는 바위라기보다는 커다란 돌멩이에 가까웠다. 수박보다 작았다. 또 다른 하나는 길쭉했다. 나머지 하나는 보통의 바위였다. 나는 광객이 일부러 각기 다른 바위를 골랐는지, 아니면 눈에 띄는 대로 들고 온 건지 궁금했다.
“그 작자들은 어떤 식으로 네놈하고 대치하고 있었더냐?”
괴선의 질문에 나는 나를 포위했던 삼사(三邪)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괴선의 지시를 받은 광객이 바위들을 그 자리에 갖다 두었다.
“자, 이제 저것들이 그 작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일초몰살을 해봐라. 저것들 상태를 보면 사기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을 테지.”
나는 옥소를 집어넣고 철봉을 꺼냈다. 대번에 괴선이 딴죽을 걸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놈. 좀 전엔 시늉만 한 게지.”
“아, 알았소. 둘 중 아무 거나 부려도 된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 건데, 그놈의 의심은.”
나는 다시 무기를 바꾸었다.
“이게 마지막이니 똑똑히 보시오, 노인장.”
“잠깐!”
“아, 또 뭐요?”
“요즘 내 안력이 시원치 않아 혹시 깜박 놓칠지도 모르니 내가 셋을 헤아리면 손을 쓰려무나. ‘셋’이 나온 직후 말고 딱 ‘셋’에서 하란 말이다.”
“까다롭기는. 알았소. 부르기나 하쇼.”
삼각형의 꼭짓점에 놓인 바위들을 일별한 괴선이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다음 순간 사방에 돌가루가 비산했다. 그리고 세 노소는 응당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눈알을 쏟아낼 듯 눈을 부릅뜨고 입술이 찢어지리만치 입을 벌린 그들의 표정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광객이 턱을 덜덜거리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겐가, 은공?”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신수는 공간을 격하고 목표물에 타격을 가한다는 점에서 뇌전중중의 묘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뇌전중중과는 원리 자체가 달랐다. 뇌전중중은 일점을 겨냥할 뿐이지만 신수는 사방을 포괄했다. 그런 점에서는 구환도법의 천라도망(天羅刀網)과 흡사했다. 그러나 명칭 그대로 그물에 불과한 천라도망과 달리 신수는 즉살을 목적으로 하는 살상용 창이었다. 이는 한우경의 최고절초 천추일섬과 맥을 같이 했다.
무엇보다 내 신수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무왕의 춤사위였다. 거기엔 신수와 동일한 수법은 없었지만 그것을 보지 않았다면 신수도 나오지 못했을 터였다.
내가 답에 뜸을 들이자 괴선이 탄성을 터뜨렸다.
“하아, 이런 신기라니. 저 돌덩이들이 박살이 나지 않았다면 먼젓번처럼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게다. 네놈은 정녕 괴물이로구나. 작년 이맘때 안평의 야산에서 나와 손을 섞을 때만 해도 나보다 반수는 밑이었는데 일 년 만에 이렇게나 성장하다니.”
나는 으쓱했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하오.”
“그래, 맞다, 이놈아.”
괴선이 평소처럼 ‘네 똥 굵다’는 식으로 빈정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헌데 그 초식의 이름은 지었더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남의 즐거움을 뺏을 참이오, 노인장?
“아직 안 지었다면 내가 지어주랴?”
‘그건 곤란하오.’라고 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괴선이 바로 말을 이었다.
“광환(光環)이 어떠냐? 빛살만큼 빠른데다 고리처럼 돌며 한 방에 주위를 싹쓸이하지 않았더냐?”
나는 괴선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를 위해 그 정도는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럽시다.”
괴선이 파안대소했다.
“우하하핫. 이로써 나는 훗날 무림사 최고의 신공절학으로 기록될 절초를 작명한 주인공이 되었도다. 내 이름도 광환과 더불어 영원히 남으리라.”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헌데 노인장 성함이 어떻게 되오?”
웬일인지 괴선의 안면이 붉어졌다.
“선인은 이름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놈. 그보다…….”
“말 돌리지 말고 말이 나온 김에 말해보쇼, 노인장. 혹시 장삼이나 왕일처럼 흔하디흔한 이름이라 그러는 거 아니오? 아니면, 개똥이나 뺀질이 같은 아명을 그대로…….”
“시끄럽다, 이놈. 지금 그런 쓸 데 없는 얘기를 할 때냐?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광환은 절대지경의 무학일 게다. 그런데 그걸로 십왕 같은 초(超)강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성싶으냐?”
나는 진지해졌다. 당장은 어려웠다. 마왕과의 심상 대결에서 확인한 바대로 그가 전력을 발할 시 내 신수, 그러니까 광환은 그에게 생채기를 내는 수준에 그칠 터였다. 하지만 광환의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정형화되거나 완결된 수법이 아니라 변화에 열린 절기이기 때문이었다. 무왕의 춤사위처럼!
“물론이오, 노인장.”
나는 ‘늦어도 삼 년 내로.’라는 뒷말을 생략했다. 그것이 독왕을 불렀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난쟁이 노인을 본 세 사람은 기겁을 했다.
나를 제외하고는 그가 거기에 이르도록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독왕은 그야말로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기감으로써 독왕의 접근을 감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체향을 맡은 것이었다. 생선 비린내 비슷한 독왕 특유의 냄새를 통해 나는 그가 조금 전 절곡 상공에 와 있음을 알았다. 광환을 펼친 직후였다.
“듣자하니 굉장한 무공을 연마한 모양이로구나?”
허겁지겁 마당에 내려와 오체투지하며 예를 차리는 괴선 등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독왕이 내게 물었다.
겸양지덕이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다는 괴선의 박한 평과 달리 나는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근간에 작은 성취가 있었습니다, 사조님.”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독왕이 말했다.
“따라오너라.”
나는 수림으로 날아가는 독왕을 쫓아 몸을 날렸다.
독무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금지에 이른 독왕이 땅에 내려서지 않고 공중에 머문 채 나를 부른 용건을 밝혔다.
“어디 구경 좀 하자꾸나.”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이었다. 진즉부터 독왕의 무력을 견식하고 싶었다. 그러나 독왕은 첫 만남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만남에서도 내 무위를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에게 비무를 청하기는 부담스러웠던지라 나는 욕구를 눌러두었다. 독공의 특성 상 위험성이 상당하다는 점도 고려했다.
독왕처럼 허공에 정지해 있을 재주는 없었기에 질척거리는 진흙바닥에 착지한 나는 포권했다.
“사조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오냐.”
나는 철봉과 옥소를 다 꺼내들었다. 쌍검을 부리듯 두 줄기의 광환을 발출할 작심이었다. 최초의 시도였지만 나는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독왕에게 어설픈 솜씨를 보여줄 수는 없으니 내 본능이 최선의 최선을 다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실전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부디 조심하십시오, 사조님.”
말을 내뱉자마자 나는 실언임을 깨달았다. 누가 누구를 걱정한단 말인가. 내 광환에 당할 정도라면 독왕은 십왕의 상위권은커녕 일원으로도 평가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내 당부에 독왕이 성가신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어서 해 보거라.”
마비를 신경 쓰지 않고 최대치의 원력을 끌어올린 나는 옥소와 철봉에 균등하게 주입했다. 미세한 진동으로써 준비가 되었음을 알린 내 무기들이 곧장 빛살을 쏘아냈다. 그 순간 이해불가의 위기감이 엄습했다. 위에서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독장을 보며 나는 죽음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