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97
제96화 절대무적의 강자가 되면 당신과 하나가 되겠소
독왕이 공중에 있고 내가 지상에 섰다는 것이 나로서는 불운이었다.
그가 발출한 독무는 번개처럼 빠르고 해일처럼 거대했지만 같은 평지에 위치해 있었더라면 어떻게는 회피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바로 삼 장 위에서 워낙 넓은 범위의 독장이 쏟아진 탓에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유일한 퇴로는 땅을 뚫고 들어가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호신강기로는 독왕의 독장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광환에 최대치의 원력을 투입했기에 방어막을 두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는 독왕이 내가 공격하자마자 반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가볍게 생각했다가 졸지에 횡액을 당할 처지에 놓인 나는 익숙한 기적에 기대를 걸었다. 시간이 정지해 궁지 탈출의 묘수를 궁리할 여유가 생기길 바란 것이었다. 기실 궁리까진 필요 없었다.
해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검황자와의 비무에서 초현했던 공(空)이었다. 문제는 사사문과 검마류에서의 혈전을 통해 상승시킨 공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작금의 위기를 벗어나려면 그보다 상위의 공을 구현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심상의 근저에서 무언가 희미한 빛이 일렁였으나 일단은 기존의 공으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목숨만 보존하자는 생각으로 공을 발하려던 나에게 본능이 경고성을 울렸다. 사투를 벌일 시 본능의 요구를 묵살한 적이 다반사였지만 이번엔 순응했다. 그게 나를 살렸다.
독무가 그대로 굳어버린 나를 덮쳤다.
화마에 휩싸인 듯 살이 지글지글 익었다. 그러나 뼈가 녹아내리지는 않았다. 나를 침습하던 독기가 살맛만 보고는 물러가버렸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독장을 거둔 독왕이 내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괜찮으냐?”
부상이 아니라 마비로 인해 나는 답을 주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며 독왕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네 수단에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손을 쓰고 말았다. 하이고, 이거 큰일이로구나. 너를 이 꼴로 만들다니.”
내 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전신화상을 입은 알몸의 거한처럼 보일 게 틀림없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즉사했을 터이지만 나에겐 피륙의 상처에 불과했다. 독왕이 신속하게 독무를 회수한 덕분이었다.
간신히 혀를 놀릴 수 있게 된 나는 독왕을 안심시켰다.
“저는 멀쩡합니다, 사조님. 아무 염려 마십시오.”
독왕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기분이 묘했다. 독왕의 태도는 가식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나를 걱정한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잠시 운공을 해야겠습니다.”
“오냐, 오냐. 그래라. 내가 지켜주마.”
“그보다 옷을 좀 가져다주셨으면…….”
“아, 그래, 그래. 갖다 주마.”
팟!
독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실로 엄청난 신법이었다.
마비가 풀린 나는 그대로 좌정했다.
무상심공을 운용하려다 방금 전의 상황을 복기했다. 만약 공을 펼쳤다면 독무를 뒤집어써야 했을 터였다. 그랬으면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생사의 경계를 넘었을 가능성이 구 할 이상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한편 나는 위급지경에서 내 심상에 찰나지간 명멸했던 빛을 소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뿌연 안개에 묻힌 그 빛은 실체를 드러내기를 거부했다. 몇 차례 영접을 시도하던 나는 욕심을 접고 부상치유에 전념했다. 용을 쓴다고 될 일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빛은 때가 무르익기 전에는 온전한 실체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었다.
눈을 떠보니 독왕이 내 마의를 들고 시종처럼 옆에 서있었다.
그가 건네준 옷을 입으면서 보니 전신의 피부가 우둘투둘했다. 문득 전날 이모의 독장을 맞아 울긋불긋해졌던 마왕의 하반신이 떠올랐다. 그러자 저절로 두려움이 일었다. 나는 아직 심마를 완전히 극복한 것이 아니었다.
“실로 굉장한 수단이었다. 이것 좀 보려무나.”
독왕이 찢어진 옷자락을 들쳤다. 그의 옆구리에 자상(刺傷) 비슷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는 내 광환이 내가 겨냥했던 지점에서 두 치 빗나갔음을 알았다. 실수가 아니라 독왕의 대응에 의한 차이였다.
나로서는 고무적인 결과였다. 거리가 가깝긴 했지만 독왕 같은 절대고수도 내 광환을 피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거기에 그의 몸에 생채기를 내기까지 했다. 향후 광환의 위력이 증가함에 따라 피해의 정도도 커질 터였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제가 공격했을 때 호신강기를 두르고 계셨는지요?”
“당연하지 않으냐?”
독왕의 반문에 나는 흥분했다. 내가 눈을 맞췄다면 그를 실명시킬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독왕에게 그럴 수 있다면 마왕에게도 통할 터였다. 그러나 이어진 독왕의 말에 나는 실망했다.
“다만 절반쯤의 강도였다. 너를 상대로 최강의 방패를 들 것까진 없지 않으냐?”
“그러셨군요. 그럼 사조님께서 가장 단단한 방어막을 펼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다. 아마 튕겨내지 않았을까? 어쩌면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구나. 한 번 해볼까? 아니, 아니다. 나중에 하자꾸나. 네 수단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으니. 너무 섬뜩하더구나.”
“알겠습니다, 사조님. 다음에 다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러자꾸나.”
나는 독왕과 한층 가까워진 듯해 기꺼웠다.
* * *
진소월은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동굴 입구에 두었던 궤짝을 강태수가 갖다 준 모양이었다.
고급정보를 훑어보느라 여념이 없던 그녀가 호롱불에 비친 내 얼굴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이에요, 전 가가?”
나는 내 면상을 쓰다듬었다. 우둘투둘한 데다 뱀 껍질 같은 촉감이었다. 얼마나 흉측하게 보일까.
“어떻소? 오래전부터 머리를 싹 밀어보고 싶었는데. 자고로 사내의 대머리는 정력과 박력의 상징이라잖소?”
내가 너스레를 떨자 진소월이 아미를 찌푸렸다.
“독왕 어르신이 전 가가 옷을 가지러 왔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그렇게 홀랑 타버렸을 줄은 몰랐어요. 운공에 들었을 텐데 설마 그게 다 나은 모습은 아니겠죠?”
“나도 모르겠소. 원래의 멋진 용모를 회복할지, 아니면 이대로 굳어질지. 그런데 후자라면 나에 대한 관심을 철회할 테요?”
진소월의 분홍빛 입술에 쓴웃음이 걸렸다.
“과히 보기 좋진 않아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잖아요?”
“그래서 나를 멀리할 거냐고 묻지 않소?”
“어떨 것 같나요?”
“남의 속을 어찌 알겠소?”
“보여 줄 게요.”
진소월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나는 그녀의 공세를 허용했다. 내가 뿌리치지 않자 사기가 오른 진소월이 진군했다. 입맞춤을 시도한 것이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쳐들었다. 여자치고는 작은 편이 아니었으나 정수리가 내 턱에도 닿지 못하기에 발돋움을 했음에도 진소월은 내 입술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너무해요.”
“누가 할 소릴. 좀 받아주었기로서니 너무 밀고 들어오는 거 아니오?”
진소월이 내게서 떨어졌다. 왠지 아쉬웠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았다. 방금 전의 어색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평소보다 한 자가량 거리가 벌어졌다.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진소월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전 가가는 이제 절대지경에 들어섰을 테죠?”
“그런 것 같소.”
“그렇다면 마왕과 붙을 날도 머지않았겠군요?”
“…….”
내가 선뜻 대답을 못하자 진소월이 대상을 바꾸었다.
“그 전에 사왕부터 대면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요. 조만간 ‘그’를 잡으러 사벌에 가야 할 테니까.”
나는 진소월이 이 화제를 거론하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단도직입했다.
“왜 이런 얘길 꺼내는 거요?”
진소월의 답변은 한참 후에 나왔다.
“불안해서요. 전 가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마왕이나 사왕 같은 강적들과의 조우도 점점 가까워질 테죠? 그들은 운을 기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두려워요.”
“…….”
“그들과 무관하게 지금까지 난 전 가가가 나갈 때마다 늘 각오를 했어요. 다시는 전 가가를 보지 못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자고. 전 가가는 매번 기우였음을 증명했지만 내 습성은 개선되지 않았어요. 그러기는커녕 더 심해졌어요. 이번에도 얼마나 간을 졸였는지 몰라요. 전 가가가 신위를 떨치며 내 우려를 불식시켰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위기는 없었나요? 이번에도 절체절명의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기적 같은 비약을 추구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기적처럼 성공했고요. 나가기 전에는 삼사를 일수에 몰살시킬 수준의 무위는 아니었잖아요?”
진소월은 내 눈빛에서 진상을 읽어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안심이 되겠어요? 사왕과 마왕은 칠사나 팔마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인데. 그리고 전 가가는 그들과 동등한 무위에 이를 때까지 수련만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들과 붙음으로써 또 다른 비약을 이루려고 할 테죠. 그렇지 않나요?”
굳이 확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묵묵부답했다.
진소월이 대뜸 사과했다.
“미안해요. 전 가가 상태를 보고는 감정이 격해졌나 봐요. 전 가가를 비난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에요. 나는 그저 전 가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해 내 사랑을 알리고 전 가가의…….”
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말을 하다말고 진소월도 일어섰다.
“화났나요, 전 가가? 내가 약속을 어겨서?”
나는 진소월을 안는 것으로 답을 주었다.
“적이 강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출전할 때마다 목숨을 걸고 나갔소. 그것은 전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자의 숙명이오. 내가 마왕이나 사왕과 부딪치고도 무사하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소. 어쩌면 그날이 염왕을 알현할 날이 될지도 모르겠소. 설령 그리 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게요.”
내 품에서 진소월의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좀 뜬금없지만 작년 이맘때 당신이 꺼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주겠소.”
떨고 있던 진소월의 몸이 경직되었다.
“만약 내가 천하의 모든 강적을 물리치고 절대무적의 강자가 되면 당신과 하나가 되겠소. 약속하오.”
진소월이 다시 떨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모로 기울였다. 그러고는 감은 눈과 달리 반쯤 벌어진 진소월의 분홍빛 입술에 내 두꺼운 입술을 포갰다.
* * *
진소월과 입맞춤을 하고 보름이 지난 날 나는 절곡을 나섰다.
그 보름 간 한시도 쉬지 않고 순간 가속을 연이어 구사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두고자 한 진소월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열두 번 연속으로 성공했음을 알리자 마지못해 출전에 동의했다.
내 목적지는 절곡에서 오천이백 리 떨어진 서경(西京)이었다. 정맹이 든 원중과 더불어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를 다투는 서경은 사벌의 총단을 품은 사파 무림 최고의 대도(大都)였다.
나는 사벌에 가서 거기에 은신한 독의(毒醫) 성관(成冠)을 잡아올 참이었다. 그는 내가 복수할 대상을 물었을 때 괴선이 백운영과 함께 언급한 인물이었다.
괴선과 함께 강호육기에 속하는 독의는 그의 선력을 앗아간 장본인이었다. 단전에 내공을 저장하는 무인들과 달리 선인은 혈맥에 선력이 깃들어있었다. 전날 백운영에게 내 부탁을 전하기 위해 집법전에 들렀다가 불의의 기습으로 혈도를 제압당하고 지하뇌옥에 갇혔던 괴선은 독의가 강제로 투여한 약물들로 인해 선력을 상실했다. 그래서 그 역과정이 가능한지 알고 싶어
했다. 그에겐 절실한 문제였고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독의가 사벌에 들어가지만 않았다면 백운영에 앞서 그부터 잡아왔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