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43
43화.
이글거리는 갈색 땅.
그 위를 감싸 안는 거대한 그림자.
어떤 여행자는 뜨거운 뙤약볕을 가려주는 고마운 존재라 생각하여 고개를 들었으나….
그 눈에 담긴 것은, 지나가는 고마운 구름이 아닌 종말과 학살을 품에 안은 대악마의 거대한 하수인이었다.
가르간테의 보랏빛 눈동자는 능선 너머의 우뚝 솟아오른 성벽에 닿아 있었다.
그에겐 아직도 그날의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본인들은 웅장하다 생각하며 몸을 맡기고 있으나, 가르간테에게는 한낱 지푸라기와 다름없는 인간들의 성벽.
숨결 한번 불면 날아갈 듯 보이던 그 초라한 성벽을 자신들의 목숨 줄이라는 듯 붙잡고 있던 모습은 실로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정녕 자신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걸까?
자신의 숨결에 녹아내리는 그들의 구원이 얼마나 얄팍한지.
그리고 신의 구원보다는 악마의 심판이 더 빠르다는 걸 깨우쳐 주기 위해 가르간테는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공포라 불리던 마수의 가장 큰 실수였다.
“흐아! 진짜 엄청 크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가르간테가 너무 큰 몸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막만 한 인간 하나를 놓쳤던 것?
혹은 그러한 인간을 발견했음에도 벌레를 보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이 반응했던 것?
무엇이 되었든 이제 와서 후회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성문의 위.
지팡이를 쥔 채 성벽의 정중앙에 홀로 고고히 선 금발의 여인.
머리에 쓴 넓은 챙의 마녀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한 손으로 부여잡은 채로 녹색 눈동자는 가르간테를 정면에서 노려봤다.
화아아아악!
마나가 요동쳤다.
가르간테의 날갯짓을 뒤틀 정도로 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쳤고, 작은 여인을 중심으로 너무나 거대한 마나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제야 가르간테는 깨달았다.
인간들이 구원을 바라며 붙잡고 있던 건, 고작 쌓여있는 돌무더기와 다를 바 없는 성벽이 아니라고.
그 성벽 위.
아찔한 위기 속에서도 호탕한 미소를 잃지 않은 저 여인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는 걸.
크롸아아아아아!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망설임도 없었다.
가르간테의 입이 크게 벌려진다.
육중한 몸을 그대로 들이박아 저들의 희망이자 구원을 한입에 씹어 삼킬 생각이었다.
그것이 저들에게 가장 큰 절망으로 다가올 테니.
자신을 막아내는 건 작은 여인이 짊어지기엔 너무 커다란 소망이었다.
저들의 삶은 고작 그런 여인에게 맡겼을 뿐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전히 가르간테는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생에 처음 맞은 패배의 굴욕과 치욕스러운 포박 속에서도 가르간테의 투지와 분노는 꺾이지 않았다.
여인의 마법은 쉽사리 자신의 가죽을 뚫지 못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가르간테를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여인은 방법을 바꿨다.
빛나는 마나는 밤하늘을 수놓았고, 악마의 하수인을 구속하는 사슬이 되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는 금발의 마법사를 보며 가르간테는 이빨이 짓이겨질 것처럼 꽉 물고 발버둥 쳤다.
300년.
자그마치 300년을 갇혀 있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같은 풍경만 보일 뿐인 무저갱과 같은 골짜기 안에서.
치욕스러운 구속을 당한 채로, 같잖은 인간들의 감시를 받는 동안.
가르간테는 몇 번이고 복수를 곱씹었고, 몇 번이고 분노를 되뇌었다.
아비나 다름없는 대악마 마몬?
그에겐 이미 상관없어진 지 오래였다.
오롯이 금발의 마법사.
힐다를 향한 증오만이 뇌를 파먹는 기생충처럼 전신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자유를 얻자마자, 유일하게 남아있는 힐다의 마력을 찾아 로베르담까지 찾아왔다.
가르간테는 자신을 보며 벌벌 떠는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거세게 울었다.
자비란 없다.
안에서 마몬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게 조금 거슬렸으나….
그는 이제 멈추지 않는다.
토할 것만 같은 증오를 놈들의 같잖은 마법장벽에 쏟아내었다.
악단과 같은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며 단출한 저들의 삶에 막을 내리려는 순간….
또.
또 다시.
건물의 가장 높은 곳.
힐다의 마나가 강렬히 느껴지는 마석의 앞에 작은 인간이 있었다.
은발을 흩날리며, 당당하면서도 조금의 물러남도 없는 태도.
당장에 힘의 차이가 이렇게 눈에 띄게 난다는 걸 알 텐데도….
두려움 하나 없는 인간의 눈동자.
가르간테는 그게 너무 싫었다.
인간이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구름이 갈라진다.
땅이 흔들리며, 공기가 찢어지고 마나가 도망친다.
이번엔 지지 않는다.
* * *
메이지 아카데미의 옥상에 올라선 나는 다급하니 시야를 올렸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태양빛을 가리며, 거대한 그림자로 아카데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가르간테의 얼룩진 분노가 전신을 찌릿하게 치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혹시 마몬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나를 쫓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저렇게 보여도 가르간테는 마몬의 비밀병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정면에서 보게 되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가르간테의 가슴팍에 있는 마몬의 기운이 오히려 샤카렌을 만났을 때보다 좀 더 약하다는 걸.
예전에는 대악마를 따랐으나.
300년간의 감옥 생활 끝에 악마를 버린 것이다.
지금은 오롯이 자신의 분노로 행동하는 괴물.
그렇다면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힐다의 마석.”
아직도 아카데미 옥상에 영롱하게 자리 잡은 힐다의 마석을 향해 달려간다.
중간에 아카데미에 깔린 보호 마법을 가르간테가 녹여버렸으나 이미 예상했던 서순이었다.
– 이, 이게 무슨?
– 사라졌어! 사라졌다고!
– 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려온다.
거칠게 터져 나오는 절망은 곧이어 혼란이 되어 퍼져 나간다.
밑에서 들리는 비명이 걱정되었으나, 지금은 신경 쓸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힐다의 마석을 붙잡고 손을 뻗었다.
빠득! 빠드득!
어차피 여기서 가만히 있다가는 다 죽는다.
단원들을 소환해도 저 거대한 마수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전성기의 한나라면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소환수가 되어 약해진 지금으로서는 마나 낭비일 뿐이다.
오히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최대한 마나를 아껴두어야 한다.
그리 생각하며 힐다가 이 안에 남겨뒀다는 뭔가를 믿으며 마석을 가동시키려는 순간….
섬뜩한 감각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오른다.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오롯이 분노만이 남아있는 가르간테의 얼굴.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기에 마석에 마나를 불어넣으면서도 나 역시 놈을 응시했고 우리 사이에는 뜻밖의 고요함이 잠깐 머물렀다.
침묵을 깬 건 가르간테였다.
극도로 흥분한 놈은 콧바람을 크게 불며 공중에서 몸을 뒤틀었다.
빠드득!
그와 동시에 힐다의 마석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고, 안에 있는 마나들이 새어 나오듯 뿜어졌으나….
몸을 크게 말며 하늘에서 한 바퀴 돈 가르간테의 꼬리가 거칠게 마석의 위로 떨어진다.
콰아아아앙!
가까스로 몸을 날려 피하긴 했으나, 힐다의 마석은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그야말로 대파(大破).
옥상 또한 중앙에 선이 그어진 것처럼 깔끔하게 짓뭉개졌으며, 계단으로 통하던 입구도 완전히 망가졌다.
“아.”
나도 모르게 몸이 굳는다.
가르간테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꼬리를 이용해서 대응한 것도, 마석이 박살 난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 것도…… 없어?”
부서진 마석 안에 쌓여 있던 건 그저 거대한 마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가르간테의 일격으로 박살 나버린 탓이 아니었다.
그냥, 처음부터 마석 안에는 힐다의 방대한 마나를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이 말하던 지고의 마법도, 엄청난 연구결과도 없었다.
쏟아져 나온 마나들이 자연스럽게 하늘에 퍼져 나가며, 블루 클라우드 현상을 일궈낼 뿐.
마나들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한다.
힐다의 마나라는 사실만으로도 불쾌했던 걸까.
크롸아아아아아아!
가르간테는 날갯짓 몇 번으로 그마저도 거세게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지독할 정도로 주의 깊은 모습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교활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아아!”
“여신님! 여신님! 여신니이임!”
“도망쳐! 일단 도망치라고오!”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처량함마저 느껴졌다.
전생에 느꼈던 죽음이란 감각이 다시금 코앞까지 다가왔다.
단원들을 소환한다고 해서 가르간테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 멀리 퍼지기 시작한 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단 마나를 모아서 어떻게든…….”
손끝에 응축되는 마력탄.
곳곳에 퍼져 있는 힐다의 마나와 마몬의 기운을 이용해서 파괴력이 높은 마력탄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려 했으나.
…….
………….
……………….
“정말로, 네가 이것밖에 남기지 않았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마석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게 이상했다.
마나를 다시금 회수한다.
축 늘어진 손은 꿈틀거렸으나 답을 적어 내리진 못했다.
퍼져 있는 마나들 사이로,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숨겨놓은 마지막 수수께끼.
그 정답은 무엇이었을까.
무슨 답을 내놓았어야 네가 평소와 똑같이 “정답!” 하고 기뻐하며 외쳤을까.
힐다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난이도가 높을 뿐이지 불합리한 문제들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해결할 수 있도록 배려가 깊기까지 했다.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듯 과거에 놓치고 지나갔던 혹은 의미를 알지 못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가져온다.
그것들을 하나씩 맞춰가기 시작하자.
“하.”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어딘가를 달리고 싶다는 고양감이 차오른다.
다시 한번 마나가 모인다.
검지 끝이 푸른빛으로 물들고, 나는 그늘진 하늘을 도화지 삼아 수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의아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힐다가 메이지와 나이트 아카데미를 세운 것부터 시작해서….
부지 문제가 있음에도 일부러 두 아카데미를 바로 옆에 세우고, 굳이 기사생도가 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체험입학 제도까지 준비해 뒀다.
체험입학에서 일정 성과를 거두면 과분한 선물까지 주어진다.
사실, 기사는 마법을 배울 필요가 없고….
마법사도 검술을 배울 필요가 없는데….
마치, 두 가지 동시에 배워야 하는 누군가를 위해 예비해 둔 것만 같았다.
– 맞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소환마법을 익히시면 훨씬 수월하게 소환이 가능하실 거랍니다.
넬슨이 처음 소환되었을 때.
녀석은 소환마법을 익히면 소환이 훨씬 수월할 거라고 말했다.
어디서 저런 말을 듣고 온 걸까?
당시엔 의아했다.
– 조언이라도 듣고 올까요?
– 응? 누구한테?
– 그야, —- 님이죠.
톰이 소환된 이후.
방에서 우리가 나눴던 대화에서도 이상함이 느껴졌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정보를 말했을 경우, 말이 어그러지고 현기증과 두통이 일어났다.
그런데 톰이 말한 건 분명, 사람의 이름이었다.
기사단원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다.
또한 내가 이름을 모르는 기사단원은 단언컨대 없었다.
그러니까….
톰이 언급한 그 이름은 기사단원의 이름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석 안에 담겨 있던, 의미 없어 보이는 방대한 양의 마나가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는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손 안으로 모여든 기분이 들었다.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고….
내 손가락 끝은 이미 그 답을 적고 있었다.
소환마법진.
마법진이 화려하게 빛을 뿜어낸다.
가르간테의 날갯짓에 날아갔던 마나들이 자석처럼 이끌려 사방에서 몰려온다.
그리고 그것은….
곧이어 사람의 실루엣을 이루어 갔다.
크롸아아아아아!
가르간테의 포효가 울려온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지만….
실상 가르간테는 이쪽을 향해 의미 없는 일갈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겁먹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납게 짖어대는 개처럼.
놈이, 지금 옥상 위에 두 발로 내려앉은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는 소리였다.
“어때.”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아 올라왔다.
대마법사를 상징하는 화려한 로브가 바람에 흩날린다.
고목나무로 만든 지팡이는 그녀의 손에 들린 채로 여전히 꺾이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꼿꼿하게 선 자세는 그녀의 당돌함과 자신감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그리운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정답?”
질문에 대한 답으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히히 웃는 힐다의 장난스러운 함박 미소에는 짙은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대정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