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38장 뒤통수 맞다(1)
지금 고려는 겉으로는 외국의 전란이 끝이 나고, 내부의 문제는 계사지주(癸巳之誅) 이후 모두 해결되어 과거의 치세로 돌아갈 일만 남은 듯 보였지만 실상은 아직 그리 탄탄하다고 하기엔 힘든 상황이었다.
외부 문제는 세자 왕검이 이미 옛적부터 대전이 있을 것을 예견하며 크게 대비해야 했고, 내실 문제도 거사가 끝난 지 아직 1년도 넘지 못해 완전히 다졌다고 하기에는 파고들면 부실한 점이 있었다.
즉, 야욕을 품는다면 품어볼 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어느 간 큰 자도 감히 권좌를 노리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첫 번째는 거사의 지휘자였던 세자와 내솔부 견룡군들이 강화도에 자리 잡고 있어 언제든지 조정을 뒤흔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권력을 세자가 태자부의 힘만으로 주도하려 했다면 세자는 지난날 정중부 일가를 쓰러트리고 조정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있으나 나라에 충성하여 한발 짝 물러난 경대승(慶大升)과 도방(都房)과 비슷한 처지였을지 모른다.
물론, 재산도 없으면서 사비로 먹여 살려야 하는 도방의 사병들이 전력인 경대승과 달리 태자부 병력들은 국고에서 부담을 한다는 것과 죽는 그 순간까지 명종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경대승과 다르게 왕검은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라는 입장과 현 임금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두 번째 이유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왕실이 무신정권의 막을 내리면서 그 보복으로 무인 출신 권신들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피의 숙청을 내릴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세자는 경인년 이전 문신들의 문제를 명확히 언급하고 문무양도라는 기치 아래 무부들을 오히려 보듬어 무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본래 무신 정변에서 명종이 정중부와 경대승, 이의민 등을 다른 세력들을 이용해 견제하거나 쳐낸 것과 달리 이번 계사지주는 온전히 세자 개인의 힘으로 행한 것이라 다른 세력에 큰 빚을 진 것도 없었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금인 정안연 이었으나 그 정안연과 세자 사이의 서열은 너무나 확고하여 견제 역할이라 하기도 힘들었기에 더욱 무부들을 일소하지 않고 보듬은 것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네 번째는 똑같이 완전히 처리될 것이라 여겼던 우봉 가문을 존속시키고 서장자이자 출가한 만종을 데려와 진평후라는 작위까지 내려 강화도에 둔 것이데, 이것으로 (사병 기준으로) 강화도에 가장 많이 주둔되어 있는 우봉 가문의 사병도 세자의 관리 내지는 영향에 들어가 도리어 빚을 지며 적대하기 힘들어졌다는 점이 있었다.
그 외 외침이나 북정으로 세자가 강화도 밖으로 나서긴 했으나 왕과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한 이유는 천하가 다 아는 실정에 세자가 나간 틈에 궐기하여 조정을 잡는 행위는 명분이 없었다.
무엇보다 군권도 세자에게 있었기에 감히 권좌를 노리려고 나섰다가 대역죄인이라는 욕과 함께 사라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후 군권이 반납된 상황에서도 세자는 강화도에 있었고 설령 자리를 비운다 한들, 명분이 없었으며, 세자가 만들어 놓은 굳건한 세력들로 어찌할 힘도, 파고들 틈조차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여전히 세자를 직접 건들 힘은 없었고, 명분도 없었다. 파고들 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자는 외란이 끝나면서 부월(斧鉞)을 반납하여 수중에 바로 부릴 수 있는 병력은 내솔부 정도뿐이며, 대리청정마저 임금의 친정으로 끝이 나버렸다.
무엇보다 세자 본인이 자주 육지로 가면서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눈치를 보던 이들의 중압감은 다소 사라진 판국이다.
하물며 지금 와서는 강화도 내에 있는 세자 세력의 한 축이자 ‘결과적 우군’이 돼버린 우봉 가문의 만종이 역적 문제에 연관된 것이다.
어리석게도 스스로 가족이 역모를 벌였음을 인정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이용하느냐에 따라 세자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는 없어도 두터운 갑옷 하나를 벗기는 것은 노려볼 만한 것이 작금의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이야말로 권좌를 노리는 이들에게는 이 작은 틈을 시작으로 세자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노려봄직한 상황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지금 말고는 틈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 권욕을 가진 그들의 진정한 속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다.
“황상 폐하! 이는 결코 가벼이 넘길 문제도 시간을 지체해야 할 것이 아니옵니다. 역적을 어찌 가벼이 둔단 말이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진평후 스스로 제(자기) 아우가 흉계를 꾸몄음을 자복하였으니 자세히 알기 위해서라도 진평후를 옥에 가두고 국문을 해야 마땅하옵니다.”
만종을 돌려보내고 다음 날 만전의 일을 언급한 왕은 만종도 역적으로 대해 추국하거나 구금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신하들의 언사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하여도 어느 정도 예상 범주였다.
그러나 세자의 장계가 올라오고 난 후에도 구금하고 조사하라는 주청이 멈추기는커녕 도리어 더 노골적으로 변해 그를 역적으로 몰기 시작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평후는 거사에서 태자와 함께 공적을 이룬 1등 공신 중 하나이다. 그런 그가 무엇이 아쉬워 역모를 일으키겠는가? 경은 무슨 근거로 진평후가 역모를 꾸몄다고 확신하는가?”
“그의 아우가 역모를 꾸몄음은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예로부터 역적의 친족이 역적이 아닌 법은 흔치 않습니다. 진평후가 진짜 역적인지 아니면 정말 관여되지 않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문초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만약을 위해서라도 우선 그의 사병들을 무력화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아태자가 이미 역모는 진압하였다 장계를 올렸고, 그 장계에는 이번 일에 대해 최충수의 난과 김약선과 김경손을 언급하였다. 이는 같은 피에서도 다른 행동을 하고 뜻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데 경들은 어째서 고변한 진평후를 역적으로 모는 것인가?”
“역모에 대해선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다면 조사하는 것이 상례이옵니다. 하옵고 최충수의 난에서 은문상국이 무사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은문상국이 직접 역적을 사로잡고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고, 상장군 김경손도 공적을 세우기 전까지는 주변에선 줄곧 의심하였고, 태자 전하께서도 연좌를 붙이지는 않았으나 내솔부 견룡군 송문주를 붙여놓았으니 그 주의의 끝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할 수 있사옵니다. 하온데 황상께서는 도(島)내에 많고 강한 군사를 가진 진평후에 대해 공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온전히 두라 하시니 사례가 맞지 않으며 여차할 때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 이러한 것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일찍 처리하지 않았다가 만일 진평후가 다른 생각이라도 품고 있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진다면 그때는 이미 쉬이 제압하기 힘든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거세게 주장을 하자 왕은 당황하며 백두산제문 작성 이후 그간의 노고를 생각하여 승진하여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된 이규보와 문하시중 최종준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이 상황에 당혹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최 시중. 저게 무슨 상황인가?’
‘나도 모르겠네. 나야 거사 이후 저들에게 반쯤 애물단지 취급되어 함부로 움직일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자네야말로 모르겠는가?’
왕검이 최우의 당여였던 그들을 둔 것은 신료들을 조율하기 위해서였고 실제 세자가 급진적인 의견을 내놓으면 최종준이 논의를 하거나 회유했고, 여기에 그래도 불만을 가지면 이규보가 찬성을 위한 반대로 다소 완화된 주장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문신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이규보를 채택함으로써 불만을 그나마 줄이는 식으로 조율 진행하였다.
즉, 최종준이 1차적으로 조율을 하되 불만도 받고, 그 후 이규보도 문신들을 어르고 달래며 조율하는 것이 그들의 조정에서 입장이고 주 일이었는데, 눈앞의 상황은 둘 다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내 근래 들어 제문이니, 해동문자 반포니 하는 문제로 바빠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여 모르고 있네.’
‘이 사람아. 그대가 저들을 달래고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대가 한번 안경공에게 그… 으. 아니, 됐네. 그보다 저들의 노림수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저들이 무슨 목적으로 진평후를 실각시키려는 지는 모르나, 태자 전하의 성심은 진평후를 당장 쳐내시려는 것은 아닐 게야. 설령 쳐내시더라도 태자 전하께서 손수 손을 쓰실 테지. 나서서 막아야 할 것이네… 아니. 혹시 모르니 자네는 지금 나서지 말게.’
이 난리를 바로 잡기 위해 최종준은 일단 국왕이 원하는 방향의 의견을 내놓으며 중재의 시도를 해보았다.
“황상 폐하. 저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오나 장계에 의하면 이미 진평후의 아우 역적 만전은 능성현에서 구금되어 무력화되었음을 밝힌 상황이옵니다. 여기서 구태여 과한 추국을 하는 것은 과한 처사로 사료 되옵니다.”
“문하시중도 그러한가? 짐이 보기에도 그러하도다!”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의 말에 왕은 반색하며 동의했으나 곧이어 나오는 반대 측의 발언에 왕은 물론 입을 열었던 최종준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문하시중은 과거 역적 최우의 당여였습니다. 거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곤 하나 이번 일은 역적 최우의 자식이 벌인 역모인데 그런 문하시중의 말은….”
이쯤 되면 단순히 의견에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다. 다른 곳도 아닌 조정에서, 왕 앞에 대놓고 문하시중의 치부가 된 과거의 최우 시절을 거론하였을뿐더러 역적과 연관된 자라고 한 것이다.
최우가 죽은 이후 위신이 많이 죽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문신들 중 최고에 속하는 문하시중인 그를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은 수치도 개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내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소리인가!”
최종준은 얼굴을 붉힌 채 따지듯 외쳤고, 비로소 그 말을 했던 중년 신료도 자신의 실언이자 과언에 아차 하는 표정으로 짓고는 종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종준의 분노 어린 질문은 다른 곳에서 기어코 답을 듣고 말아야 했다.
“문하시중께서 역모에 가담한 것인지 단정할 수는 없으나 사리와 공사가 투철하신 문하시중이시라면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옵니다.”
“…….”
의심은 받아야 하는 건 맞다는 식의 젊은 신료의 말에 최종준이 어이가 없어 순간 말을 머뭇거리자 그 틈을 타 다른 신료들은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들로서도 이미 물은 쏟아졌고, 활시위는 놓아진 상태라 멈출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오니 마땅히 문하시중도 자숙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
“뭐, 뭐라?!”
“역모는 예로부터 죄 중 최악으로 여겨 그 벌이 매우 크고 조사에도 만전을 다하는 법입니다. 문하시중이 역모를 했다는 증좌가 있는 것은 아니나 과거의 전례로 인해 역적의 일족과 연고가 없다 단언할 수 없는바 마땅히 진상이 밝혀지실 때까지 자숙하시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신료들의 모습에 왕이 어이없어 반문했다.
“그러니 진평후에 이어 문하시중까지 하옥하라는 것인가!”
“황상 폐하. 역모란 나라의 억조창생의 대업과 존망을 흔드는 매우 큰 죄인 만큼 이에 대해 신중히 처리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렇사옵니다. 덕으로 달래려는 폐하의 성심은 천 번, 만 번 존숭할 만하나 불미스러운 사태를 대비한다면….”
“그만! 그만하라. 그대들의 말이 너무 많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왕은 인상을 구기며 단호하게 말했지만 신료들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태자 전하가 충과 효로 황상을 보필하였으나 지금은 자리를 비운 상황입니다. 태자 전하는 지금 남방을 순시하고 계시어 바로 소환할수 없는 상황인데 어찌 의심스러운 이들을 자비로만 푸는 것이옵니까. 신은 세간에서 역적 최우의 위세가 굳건하여 조정과 황실이 겁을 먹어 건들지 않고 있다 알려진다면 조정과 황실의 위신이 훼손될까 두렵사옵니다.”
“…뭐라. 겁을 먹어!”
왕의 호통에 방금 입을 연 신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말이었사옵니다.”
반평생을, 아니, 어려서부터 무신정권에 휘둘렸던 임금이었기에 과거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소리에 발끈 했지만, 이내 세자를 떠올리곤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아니, 됐다. 짐이 지금 배가 출출하니 잠시 오찬(午餐=점심)을 하려 하니 경들은 나가라.”
“폐하.”
“오찬을 한다 하지 않았느냐-!!”
“….”
아무리 말해도 평행선이 되자 왕은 잠시 냉정을 찾고자 노골적으로 점심을 핑계로 신하들을 물렸지만
오찬이란 시간을 좀 더 유용하게 이용한 것은 신료들이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소란을 피우고자 태자를 지지하는 무신들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과거 정적들과 적수들을 모조리 제거한 권신들이 구태여 수도 내에 상주하였던 것이 무엇이던가?
그리고 문신들 내에 제 당여들을 넣거나 포섭하려는 것은 또 무슨 일이겠는가?
그것은 창과 칼이 부딪치는 전장과 달리 정치판에서는 정적을 보더라도 속내를 숨기고 대하다가도 위협이 사라지고 상대가 틈이 보인다면 세 치의 혀를 놀려 적이 제 살을 잘라내게 유도를 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세자가 사라진 강도에는 지금껏 세자에게 억눌려 있던 그들의 혀가 드디어 세자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