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263
263화
11장 왕자의 난(3)
때아닌 천둥 같은 폭음은 연이어 터졌고, 그것은 그저 소리만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비격진천뢰를 맞은 탐라 기병들 중에는 멀쩡한 이들은 없었다.
특히 바로 아래, 혹은 지척에서 폭발을 맞이한 이들은 하체가 잘리고도 그걸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미친 듯이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팔로 기어 다니거나, 머리가 날아가 목 없는 말을 타고 달리다가 꼬꾸라지는 등 참혹한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한 혼란스러움 멀쩡한 혹은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들도 언제 자신도 저렇게 될지 몰라 살기 위해 어느 쪽이든 폭음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정신없이 채찍질할 뿐이었다.
히이이잉!
“자, 잠깐!”
콰직! 콰직!
혼비백산인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말들도 처음 듣는 폭음과 처음 경험하는 이 사태에 미친 듯이 날뛰었는데 평소라면 그런 말들을 진정시킬 기수들도 이 사태에 정신이 없어 말이 진정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미친 말들의 폭주로 떨어진 기병들이나 넘어진 말들은 그 위를 지나가거나 넘어지는 다른 기병들에게 짓밟히거나 눌려 죽어 나갔다.
그렇게 전장 한복판에서는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세, 세상에!”
그리고 그 광경에 탐라군이 일시에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때, 잠자코 있던 고려군의 기병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근잘근 씹혔으니 이제 삼킬 차례다! 전군 돌격하라!”
탐라군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입힌 것에 비해 실제 비격진천뢰로 죽은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지금도 탐라의 기병은 고려군의 기병보다 많았다. 하지만 전의를 잃은 군대에게 방금 전 참상을 일으킨 고려군의 존재는 더 이상 이전처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히, 히익!”
“도, 도망가야 해!!”
“요괴다! 고려 놈들이 괴물을 부리고 있다!!”
“지, 진정해라! 적은 우리보다 수가 적다. 이, 일단 저들부터 처리하면….”
“으아아아아!! 죽고 싶지 않아!!”
왕자 양원은 어떻게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병사들도 진정시키려고 진력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그들에게는 거병의 목적도, 전쟁의 의지도 사라져 있었다.
자포자기하여 소리를 치는 자, 아무것도 못 한 채 얼어붙은 자, 그저 전장에서 멀어지려는 자, 그렇게 전의를 잃고 정신조차 차리지 못한 이들은 아무리 모여도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오합지졸은 전란을 거듭 경험한 고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저 탐라 촌놈들을 모조리 어육으로 만들어버려라!”
“와아아아아!!”
유갑수가 쌍칼을 치켜들며 돌격을 했고, 그의 지시와 돌격에 호응하듯 따르는 기병들도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돌격했다. 그리고 이후의 내용은 이미 투쟁이 아닌 학살에 가까웠다.
그렇게 탐라의 기병이 전멸하게 되자 왕자인 양원도 결국 살기 위해 뒤로 빠지는 것을 본 김방경은 드디어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예비부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유갑수의 기병은 그대로 고려군의 좌익에게 당하고 있는 탐라의 우익의 측면을 쳤고, 고려군의 중군과 우군은 탐라의 중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렇게 되자 탐라의 좌익은 자유를 얻어 아군을 구하기 위해 고려군을 칠 수가 있었으나 그들은 아군을 돕지 않았다.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보고도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고려군을 건들고 싶은 이들은 없었던 것이다.
“퇴, 퇴각! 아니, 도망가라!!”
“우, 와아아아!!”
누군지 모를 그 신호를 시작으로 탐라의 좌군은 순식간에 와해 되어 사라졌다.
한 축이 사라지면서 양군의 수는 마침내 역전이 되자 안 그래도 없던 전의는 완전히 무너지며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 * *
양원은 미친 듯이 말을 채찍질했다. 고려군이 강할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저건 뭐란 말인가. 졌는데도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진지하게 전력을 다해 대응하였는데 어느 사이에 일거에 쓸려나가 눈을 뜨니 전멸했다.
양원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살기 위해 도주했지만 이대로라면 가망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주변에는 아직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다. 정말로 자신을 따르기에 오는 것인지 그저 우연히 도주 방향이 같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이들은 다소 이성을 차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 호족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호족들의 손으로 죽거나 잡힐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 양원은 여기까지 와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그도 고려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전력 차이가 이렇게 막대하다면 이제 더 이상 정면승부를 시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 참패로 지금 고려군이 기존에 탐라에 있던 고려군이 아니라는 것은 간파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결국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 이후를 노려야 할 것이다.
성주를 치우거나 혹은 다른 호족들에게 합의를 하거나… 큰 피해를 입었지만 큰 피해를 입고도 기사회생하여 결국 성공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없지 않았다.
그 고려의 태조도 공산전투에서 백제군에게 전멸을 하였지만 극복하여 삼한을 일통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자신도 그렇게 할 것이다.
“…우선 가까운 부성(부천의 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동도리와 부천이 있을 것이니 거기서 전열을 가다듬을 것이다.”
고려군에도 기병이 있다. 그러니 훤히 트인 곳에 있는 것은 불리하다.
물론 성에 들어간다 한들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군들과 합류를 우선하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패하기 전 동도리는 중군에, 부천은 좌익에 있었다.
양원은 이번 전투에서 좌익이 붕괴된 것에 대해 부천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고 설령 구하러 왔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보다 급한 쪽은 자신이지 그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런 참패에서도 부천과 동도리. 그들만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들이기에 더욱 이번 일로 고려 조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것이니 당장은 배신하지는 못할 것이라 믿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끝날 수가 없어.’
얼마 뒤, 양원이 성에 당도하자 예상대로 부천이 성에서 마중 나와 양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부디 구하지 못한 이 늙은이를 벌하여주십시오.”
“오늘의 패전이 어찌 그대의 잘못이겠는가. 모두 나의 잘못이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네. 고려가 저렇게 간악하게 나온 이상 더욱 본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모든 것을 다할 생각이니 부디 부공도 나를 도와주게. 하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도록 하겠네.”
양원은 진심으로 말했다. 이 상황에서 탐라의 왕이 되기 위해선 이전에 꿈꿨던 호족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절대적인 권력을 쥔 위치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이상으로 호족들의 협력이 필요한 지금 군약신강에 가깝게 되더라도 순응해야 했다.
그렇다면 부천과 동도리를 밀어주는 것이 가장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천은 그런 양원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 전하께서 얼마나 힘든지 소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한데 도리는 어디 있는가?”
“안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어찌할지 궁리 중이었습니다.”
“불러오… 아니, 내가 만나러 가겠네. 지금은 한시도 부족한 상황이니 서둘러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위험할 것이네.”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지금 당장 안내하여 드리겠습니다.”
부천은 양원과 함께 대동한 부하들에게는 식사를 하며 쉬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양원만을 안내하였다.
양원도 이것저것을 생각하며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갔는데 그는 방에 들어간 후 아연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동도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긴 어딘가? 도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여기까지 와서도 도리를 찾다니 참으로 영락하시었소.”
“뭐라?”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무거운 충격에 양원은 앞으로 굴려졌는데 그나마 낙법을 취하고는 그대로 몸을 세운 채 상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본 것은 정말이지 경악할 만한 장면이었다.
이미 활시위까지 잡고 있는 십여 명의 무사들과 그 중간에 있는 부천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방 안에 있었으니 완벽하게 포위된 것이다.
현 상황이 무엇인지 눈치챈 양원은 신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어, 어째서!!”
“이미 전황은 뒤집을 수가 없으며, 왕자로 인해 너무나 많은 피를 잃게 되었소.”
“부천. 어째서 그대가 배신을….”
양원이 부천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부천은 입가를 씩 올리며 되물었다.
“배신이라… 누가 먼저 배신을 하였소?”
“뭐라?”
“왕자께서는 우리와 손을 잡고 우리 호족들을 억압하려는 성주와 적대하며 그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하였으면서 뒤로는 성주 이상으로 우리를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소?”
“…그, 그게 무슨….”
“고려 태자에게 조공을 제한한 것과 이번에 갑자기 거병을 일으킨 것도 단순히 고려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신속하게 성주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소이까? 그것을 이 늙은이가 전혀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였소?”
“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성주를 죽이고 고려에 정식으로 책봉을 받는다면… 그렇소. 그대를 어찌할 자는 없을 것이오. 그리고 고려에 조공을 하는 것도 조정, 그대만으로 한정한다면 고려의 재화는 그대를 통해서만 들어올 것이오. 물론 우리와 상의 하나 없이 고려 태자에게 조공 제한을 청한 것은 우리의 반발을 예상했기 때문이고 말이오.”
“나, 나는….”
진실을 밝히는 부천의 말에 당황하며 변명을 하려는 양원을 본 부천은 그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왕자를 용서하겠소.”
“?”
부천은 제 나이에 맞는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미소를 지으며 정말로 원한 따위는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인자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왕자를 처음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이오. 왕자가 우리들 몰래 태자에게 서신을 보냈듯 나도 그리하였으니 말이오.”
“!!”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소? 고려군이 어째서 장비를 갖추고 왔는지 어째서 좌익만을 놔두었는지, 어째서 그 겁쟁이 성주가 여지껏 멍청하게 조용히 있기만 했는지, 어째서 고려군은 마침 포구로 다 나가 비어있었는지?”
“…너, 너는…!”
“그리고 왕자도 계획을 하기 전에 무엇인가 빼먹은 것은 없었소? 고려에 인정받은 자는 고씨와 양씨뿐이나 본국 내에는 그 두 성씨 외에도 군왕에 오를 적법한 자가 또 없는지… 모든 것을 검토하였소?”
연이은 충격 속에서도 양원은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여기까지 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부… 을나.”
부을나는 제주의 시조이자 수호신인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 삼신인(三神人) 중 한 명이자 탐라 부씨의 시조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형제였고, 탐라국을 세운 후 함께 나라를 운영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형제들인 양을나와 고을나의 후예는 각자 왕자와 성주에 자리를 잡고 여전히 제주도 내에서 힘을 구가하는 한편, 부을나의 후예는 그 힘을 잃었다.
그가 어떻게 힘을 잃고 그 과정에 다른 성씨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구태여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소. 그대는 고려가 성주를 택한 것은 성주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맞는 말이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생각한다면 고씨와 양씨 외에도 군왕이 될 명분이 있는 자가 섬에 있다면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그 생각에 도달한 직후 바로 비밀리에 고려 태자께 밀서를 보냈소. 우리 섬에 대한 역사를 올려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소.”
“…왕자, 아니, 성주가 되고 싶었단 건가? 그 대가가 이것인가? 이제 본국은… 아니, 지금 이미….”
분노에 가득 찬 왕자의 호통을 또다시 끊듯이 부천은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왕자? 성주? 지금 와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이제 눈치를 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런 부질 없는 것을 말하다니 내가 왕자를 너무 과대평가한 듯하오. 왕자. 그대와 성주는 고려에게 졌고, 나 또한 고려에게 졌소. 시작부터 우리 탐라는 고려에게 졌단 말이오.”
그 말에 양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부천이 지금 하는 말은 단순히 고려가 무척이나 강대국이라 의미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 전제를 한참 잘못 잡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태자에게 밀서를 보낸 시점에서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즉, 고려는 혹은 고려 태자는 처음부터 탐라에 대한 계획이 자신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치밀하고 긴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양원은 성주 자리를 얻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주를 꺾은 후가 본격적인 고난이 닥칠 것을 알고, 고려라는 거대한 파도를 앞두고 호족들을 제어하며 맞서야 하는 어려움을 알았다고 해도 자신은 했을 것이다.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양원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하기보다, 원통함을 터뜨리기보다 그 대답에 마음에 걸린 것을 묻기로 했다.
다행히 그 물음에는 부천도 웃음을 지우고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물론, 이미 실패한 지금은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한 가지. 한 가지만 답해다오. 이후 본국은 고려에 삼켜지는 것이냐?”
“그건 아니오. 오히려 왕자의 이번 거사가 승리하였다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오. 그것이 내가 고려의 속내를 알고도 그대와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오.”
이번의 거병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끝이 아니라 더욱 시련이 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말로 양원을 이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것으로 고려 태자가 바라는 것을 대략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얌전히 잡히겠소? 아니면….”
부천이 손을 들자 활을 든 무사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양원은 마지막으로 부천을 노려보았지만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허허허. 아까 성까지 갔을 때만 하여도 모두 거머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것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