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322
322화
51장 저울
금과 송에는 각자 전국신보(傳國信寶), 수명보(受命寶), 황제행보(皇帝行寶), 황제지보(皇帝之寶), 황제신보(皇帝信寶), 천자행보(天子行寶), 천자지보(天子之寶), 천자신보(天子信寶) 이렇게 8개의 옥새를 가지고 있다.
둘이 합쳐서 8개가 아니라 각자 8개를 사용하고 있고, 이번에 자칭 금의 사신이라고 한 자가 증표로 건네준 것이 대외 번국에서 동원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천자신보(天子信寶)다.
만일 진짜 서주에 있는 금 부흥군에서 보낸 사자라면 ‘이것’(천자신보)을 건네줬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이 옥새는 사실상 멸망해 버린 그들에게 이 옥새는 사용할 일도 없고, 사용도 불가능한 물건이다.
또한 그들도 이번 사행이 고려에 당도하기도 전에 비명횡사하거나 들켜 막힐 가능성이 있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즉, 이 옥새를 잃게 되더라도 저쪽은 무척이나 아쉬울지언정 실무에는 영향이 없다는 점으로 자신들의 의도는 확실히 전달하고, 잃더라도 그나마 괜찮은 국보(國寶)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무려 국보를 보내면서 의향을 드러내 이쪽은 무작정 무시하기는 힘들게 만든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고려에서 이것은 그 가치가 더 크다.
‘문제는 지금의 금과 손을 잡는 것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정도가 아니라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밖에 안될 것 같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정안연도 내게 말했다.
“만약 처리를 원하신다면 고려에 당도하기 전에 처리하는 수도 있습니다.”
정안연의 말대로 저 후발아연인지 선발아연인지 하는 금인을 처리하고 이 옥새는 옥새대로 이쪽에서 꿀꺽하는 법도 충분히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 그자만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를 돕거나 지켜보는 일행이 있을지도 모르는 법. 어쩌면 지금 이미 우리와 만났다는 사실도 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 와서 그저 사신이 온 것을 숨길 목적만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면….”
“…어쩔 수 없지. 일단 데려와라. 그의 말을 듣고 난 후 결정을 하겠다.”
솔직히 금나라가 원 역사를 넘어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일은 나조차 생각 못 한 일이다.
힘이 없으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이미 저쪽에서 우리와 만난 것이 알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옥새도 줬겠다 한 번쯤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들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도 알아보고 말이다.
‘최악의 경우 처리하고 입 닫으면 그만이니까.’
당연하지만 지금의 금나라 따윈 전혀 겁낼 게 없다. 이쪽이 어떤 행동을 하고, 그것을 저들이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자신들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상황이라 이쪽을 칠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그렇기에 협력을 한다고 한들 우군으로서 역할도 기대하기 힘들고, 금과 손을 잡았다는 문제로 몽골과 남송과의 관계가 흐트러질 우려가 있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 * *
그렇게 만난 금의 사신인데…. 솔직히 처음 만남은 금수유와의 첫 만남 이상으로 기가 찼다.
“늦었으나 황상 폐하께서는 고려국의 승전과 전하의 국혼, 그리고 왕손의 소식을 듣고는 무척이나 기뻐하시었습니다. 하여 황상 폐하께서는 이 인사를 ‘세자(世子)’ 전하께 꼭 전하라 하셨나이다.”
나와 만난 후발아연이라는 자가 내게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나 우선 당연한지만 이건 단순한 축하의 뜻이 아니다. 외왕내제의 일환이긴 하나 고려는 내부적으로 태자를 전하로, 고려왕을 부를 때는 폐하라고 불렀다.
이 외왕내제 성격은 남송의 황제가 고려왕에게 동평왕과 대왕 직을, 태자인 내게 왕태자라는 직위를 공식으로 인정해 주고 내부적으로 연호(年號)를 사용하게 되면서 외왕내제의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실제 왕태자가 되면서 태자 관련은 문서에 이르러선 외부로도 담담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지금 이자는 나를 보고 태자가 아니라 세자라고 지칭했다.
즉, 몽골 침입 이전 고려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고려를 아직도 금의 번국으로 보겠다는 뜻이나 다를 바 없다. 도움도 안 될 것 같아서 안 그래도 금에 대해 그다지 큰 기대도 없는 내가 기가 찰 발언인 것이다.
나조차 이렇게 기가 찰 정도인 만큼 그를 맞이한 나의 측근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분노로 미간을 찌푸렸고, 그를 내게 소개한 정안연에 이르러선 당혹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안연의 보고를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저런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정작 여기서는 이렇게 사고를 터뜨리다니 이쪽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한 것치고는 너무 섣불렀어. 우리도 힘도 없으면서 허세만 갖춘 쪽과 손을 잡고 싶진 않고, 궁리할 시간을 덜었다고 생각할ㄲ.’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이어진 그의 행동은 나와 측근들의 소감을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금 고쳐 전하니, 승전과 태자 전하의 국혼을 감축드리옵니다.”
“음?”
“부끄러우나 요 수년간 본조와 고려 사이는 가로막혀 고려에 대한 소식이 어두웠습니다. 하여 이전의 관계에 따라 세자라고 하였으나 사행을 하고 난 뒤 고려가 번성하여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 그것에 맞게 전하는 것이옵니다. 부디 이해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그런가.”
‘이것 봐라?’
볼품없는 모습으로 접촉했고, 밀사(密使)라곤 하나 일단 일국의 대표로 온 정사(正使)다.
그런 자가 스스로 나라의 취약점을 드러낸다? 보통이라면 어떻게든 은폐하고, 설령 지적당하더라도 포장하거나 변명할 것을, 그냥 대놓고 밝혔다.
이쪽과 손을 잡으려면 어떻게든 과장해서라도 자신들이 이쪽에도 쓸모 있음을 포장해야 할 입장에서 정보력이 약하다는 것을 대놓고 밝히는 것은 이후 어떻게 책을 잡혀 이용될지 모르는 발언이다.
즉, 일반적인 외교의 장이라면 외교관들은 이 언행에 속으로 비웃고 말,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행동인 것이다.
‘그래도 저 말 하나로 저들이 이쪽을 자신들 번국으로 부리려는 의사가 없다는 것과 힘을 포장해서 쓸모가 있음을 피력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의도만은 제대로 전해졌군.’
만약 그것을 노린 것이라면 대성공일 것이다. 측근들도 이 비웃어도 이상하지 않아 도리어 수상한 언행에 방금 전의 기분 나쁨을 잊고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귀와 눈을 기울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이런저런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끝에 드디어 그 말이 나왔다.
“듣건대 고려국의 태자비 전하는 우리 황실의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이 소문은 사실이옵니까?”
“허허허. 소문은 나도 들은 적 있으나 그것은 오해다. 도대체 태자비의 성은 금나라의 국성(國姓)이 아니라 금(金)인데 어찌 그런 소문이 돈 것인지는 모르겠도다.”
“…하면 본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옵니까?”
“음. 그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소문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싶구나.”
“그렇다면 현 용강후의 친자가 아니라 양녀라는 것도 사실이옵니까?”
“그렇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태자비 전하를 뵈어도 되겠사옵니까? 어쩌면 정말로 황족이실 경우 저는 황상 폐하께 반드시 보고를 해야 하옵니다.”
“음?”
* * *
오키나와 포구.
“모조리 잡아들여라!”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병장기를 갖춘 병사들이 포구에서 장사를 하던 송상들을 덮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 우리는 대송의…. 아악.”
항명하려던 상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차관(敬差官)의 칼자루에 머리를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닥쳐라! 너희들은 모두 송과 아조의 법을 어기고 밀무역을 하는 이들이 아니더냐! 지금 부로 유구에 있는 모든 송상들을 잡으라는 명이 떨어진 이상 너희들은 순순히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밀무역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대송의 백성이고, 고려는 천조의 번국인데 어찌 이렇게 폭력을 사용하여 핍박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이곳은 고려의 땅이 아닌 외지. 당신들이야말로 이곳에 병사를 보내 제 땅인 양 관리한다는 사실이 본국에 알려지면 귀국에 대한 평판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당신들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머리를 맞고 쓰러진 송상은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도 따졌고, 그 말들은 경차관은 비죽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의 문제는 이번 아조의 성절사가 확답을 받아오셨다. 무려 송 황제께서 이곳을 해동이며, 아조의 관할이라 하였고, 너희처럼 나라의 율법을 어기고 나오는 장사치들에 대한 문제도 아조에 일임하셨다.”
“그, 그럴 리가….”
“뭣들 하느냐. 이 국법을 어긴 죄인들을 포박하지 않고! 저들의 재산들 또한 일체 몰수하라!”
“그것은 너무하지 않소! 완전 도적…. 커억!!”
“말이 많구나!”
다시금 따지려던 송상이었지만 이번에도 말을 끝을 내지 못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칼자루에 맞는 것이 아니라, 아예 경차관의 칼에 베여 죽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은 기겁했고, 경차관은 호통을 치곤 재차 명을 내렸다.
“너희 장사치라는 놈들은 평소에는 나라의 명을 우습게 보면서 정작 자기가 위급할 때만 나라를 찾는다 들었는데 지금이 딱 그 꼴이로구나. 모조리 잡아라! 저항한다면 때려잡아도 좋고, 심하다면 죽여도 좋다 하였다!”
경차관의 명에 의해 다시 포구를 뒤엎고 물품들을 압수하고 상인들을 잡기 시작하자 송상들은 아비규환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이것을 놓으시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내, 내 돈! 우리 집의 희망이!!”
본래 경차관이란 고려 시대에는 없는 관직으로 고려로 치면 외방사신(外方使臣)의 찰방(察訪)이나 명의 흠차관(欽差官)에 유사한 외관직이었다.
그러나 조선 태종을 거치면서 그 임무가 많이 늘어났으니 그중에는 국경 밀무역을 관리하는 일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해금령을 피해 오키나와행을 택했던 송상들을 모조리 잡아 굴비 더미처럼 끌고 가는 것을 인솔하는 경차관은 이번에 신설된 외관직이었다.
그들은 국경 밀무역 전문 관직으로 신설되고 유구경략을 하러 온 남정군의 함대와 함께 내려온 것이다.
그만큼 철저히 준비한 고려의 대응과 남송의 인정, 그리고 이미 도착한 많은 수의 고려인과 그를 보조하는 오키나와 아지들의 협력에 밀상 소탕은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무려 소탕이 시작하고 약 한 달 동안 2백여 명의 송상들이 잡히고 왜상들은 그 수배에 달한 것이다.
그렇게 중, 남부의 밀상들을 다 잡고 나니 오키나와 중, 남부 포구에서는 고려와 탐라 상인들 외에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고려와 탐라 상인들의 고객은 오키나와인들만이 아니었기에 거래 상대를 잃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고객들이 있다면 새로 생긴 고객도 있었으니, 바로 유구경략을 위해 내려온 고려군과 마을을 건설 중인 탐라와 고려인들이었다.
“이번에도 식량과 약재면 되겠습니까?”
“그래. 식량이 아직 남아 있지만 유비무환이다. 거기다 약재의 소모가 생각 이상으로 심하니 시급히 충당해야 할 것이다.”
목재는 오키나와에서 벌채를 하면 그만이었지만, 식량과 약재들은 오키나와의 호족들만으로 처리하기에는 현재 오키나와에 있는 남정군의 수가 너무나 많아 외부에서 충당 받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기간 내로 납부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감찰관이자 탐라인들을 관리하는 김구의 지시에 상인들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주민들만 하여도 수천이고, 병사들까지 포함하면 수만이나 되는 만큼 그 양이 어마함이 분명함에도 상인들은 그 지시를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어차피 각자 납부하는 양이 달랐고, 그 양은 각자 자신들이 부담할 수 있는 양이었다. 거기다 그 대금은 고려가 송나라 밀상들에게 몰수한 송나라의 물품들로 받는 것이라 그들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지금 오키나와의 남정군은 고려의 조정에서 오는 보급과 오키나와 슌텐씨를 비롯한 친 고려파 아지들의 지원, 그리고 탐라와 고려의 상인들에게서 대금을 치르고 받는 보급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전자 2개는 몰라도 마지막 상인들에게서 조정에서 몰수한 밀수품을 대금으로 치러 보급품을 구하는 것은 이상하게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코 김구가 무단으로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식으로 주변에 상인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밀수품을 대금으로 보급받는 것이 어떠냐고 김구와 송문주가 고려 조정에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그 청을 인가하였기에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지속적인 보급에 따라 수만 명이 먹고 수천 명이 아예 정박하여 지낼 마을이 오키나와에서 순조롭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탐라 이남 외방(外邦)에 설치되는 고려의 마을과 ‘유구 청해진’ 설치 계획도 문제없이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렇게 건설되는 마을과 진영들을 보며 안도를 하는 이가 있었다면 불안하고 꺼리는 이들도 있었다.
“호걸 슌텐의 아들이자 우리들 중 그 누구보다 강성한 아지, 슌바쥰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비단 나만의 뜻이 아닐 것이라 믿고 그대에게 묻겠소. 이제 슬슬 저 외인들을 막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
#작가의 말
*작중 금과 송에는 각자 옥새가 8개가 있다고 하였는데, 송나라는 조사 결과 8개를 사용하고 있던 것이 맞았으나 금나라(그리고 요나라)도 송과 같이 8개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금나라는 이미 중원 문화에 물들고 있던 요나라와 그 요나라를 몰아내고 중원(회수 이북)을 정복하며 더욱 중원문화에 물들었으니 송나라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작중에서는 남송과 같이 8개로 설정한 것이니 독자님들은 이를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