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321
321화
50장 잔금(殘金)(3)
“폐하.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것은… 이것은 소신에게 너무나 가혹한 명이옵니다!”
서주 밖으로 나가 고려의 인사와 어떻게든 접촉하여 금 황녀에 대해 알아보는 사신(사실상 밀사密使)으로 뽑힌 후발아연은 고개를 숙이며 지금 내려진 황명을 철회해 줄 것을 거듭 애원했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저 고려인들이 그대를 짐이 보낸 사신이라고 믿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니 되옵니다! 이것만은 아니 되옵니다. 폐하. 일국의 옥새(玉璽)를 어찌 타국에 들고 간단 말이옵니까. 소신은 그리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타국에 옥새를 들고 가라는 명을 어떻게 순순히 따를 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 이번 사행은, 말이 사행이지 사실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적국에 은밀하게 잠입해야 하는 고행길 천지다.
당연히 그 도중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렵고 후발아연 본인도 목숨을 각오한 임무이다.
그런 비명횡사를 각오한 길에 일국의 옥새를 맡기게 하니 여러 의미로 거절을 고집했다. 그러나 황제의 결정이 철회되는 일은 없었다.
“경은 어찌하여 짐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만약 소문대로 고려 세자비가 본국의 사람이고, 나아가 황실의 여인이라면 이 문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같은 황실의 문제가 되니 옥새 하나쯤 전달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은 당연히 궤변에 불과했다. 옥새는 오직 천자만이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으로 황족이라고 받기는커녕 보관하는 것조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궤변도 그러한 엉터리 궤변도 없었다. 만약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황제는 고려 세자에게 혹은 선황의 여식이라는 세자비에게 금 황제의 자리를 선위하겠다는 뜻으로 보일 우려도 있었다.
물론, ‘지금 건네준’ 옥새를 생각한다면 황제 본인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후발아연도 간파하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굴욕적이고 위험한 사태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뜻은 단호하였고, 애절하였으니 후발아연은 이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폐하.”
“경의 어깨에 아조의 국운이 사직이 짊어져 있으니 경은 더 이상 거붙이(거부하지) 마라.”
그렇게 떠난 후발아연은 사실상 전권대리(全權代理)에 가까운 권한을 받고 서주를 떠나 남송의 임안부로 향하였다.
몽골보다는 남송에 고려 상인들이 많이 오갈 것이라는 판단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임안부에 당도한 그는 고려에서 남송에 사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고려가 송과 손을 잡고 있었단 말인가?’
금사 편찬을 인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때부터 송과 고려 사이를 의심하는 말이 종종 들려왔지만 직접 들으니 후발아연은 다소 놀랐다.
그것도 잠시, 오히려 잘되었다고 스스로를 납득했다.
‘고려 상인보다 고려 사신과 만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남송의 눈을 피하고자 거지 행색을 한 채, 고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려 사신단을 기다렸고, 어쩌다가 고려 사신이 오더라도 주변의 눈을 피해 은밀히 보기 힘들다고 판단하였을 때에는 그들을 그냥 보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치 흉노를 치기 위해 월지와 손을 잡기 위해 떠났다가 흉노에게 붙잡히거나 탈출하며 13년을 외지를 빈번하다가 돌아온 한의 박망후(博望候) 장건(張騫)처럼 때를 기다리던 그는 마침내 인고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바로 고려 성절사와 함께 넘어와 남송의 물품을 사들이며 고려사관을 들락날락하는 용강상단의 대행수 임치수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후발아연은 용강상단과 대행수가 얼마나 관련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고려의 정사(정안연)와 어느 정도 관련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변 눈이 적을 때 바로 접근하여 말했다.
“내가 현 고려 정사와 친척이오. 그리고 부디 이것을 고려 정사에게 건네준다면 분명 정사는 대답을 해줄 것이오.”
그렇게 후발아연이 고려의 사신과 대면하게 된 것은 그가 서주를 떠난 지 6개월이 다 돼서였다.
* * *
“하여, 그대가 대금국의 사신이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비록 주변의 시선을 위해 행색이 이렇긴 하나 황상 폐하의 명을 받고 대인과 만나고자 이렇게 왔소. 내 정체에 대해선 그것이 입증하리라 생각하오.”
행색만 본다면 믿을 수 없었으나 언행이 짐짓 걸인과는 달리 의연한 구석이 있었고, 자신에 쥐여준 옥새가 그 의심을 허락하지 않게 하였다.
‘설령 사기라고 하더라도 이 옥새가 진짜라면 대우 받을 가치가 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옥새마저 위조품일 경우다만….’
그 경우에는 위조 옥새를 만들 정도의 부가 있으면서 이런 몽골과 남송에서도 적대시하는 금나라의 옥새를 위조하면서까지 위험천만한 거짓말을 하는 격이었으니, 그것은 그것대로 이 대담한 자에게 관심이 생길 문제였다.
“…알겠소. 하면, 후발 대인께서는 어째서 이 진귀한 비보를 들고 오면서까지 찾아온 것이오?”
“앞서 설명하였듯 고려에 있는 태자비 전하를 뵙고 싶소이다.”
“그 말은 나와 같이 고려에 가고 싶다는 말이오?”
“그렇소이다.”
“…….”
이 말을 들은 정안영은 급히 머리를 굴렸다. 왕검의 측근이고 대외로도 자주 나오던 그였기에 정안연은 지금 왕검의 계획 속에 금의 협력은 예정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의 유민들을 끌어들이는 용도로 황녀라는 소문을 흘리긴 했지만 금과 직접 외교를 하는 상황은 계획에 넣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금의 잔존 세력이 아직도 살아 있고, 이렇게 몽골과 남송의 눈을 피해 당도했으니 이를 데려가도 되는지 고민이 든 것이다.
만약 이대로 계획을 성사시킨다면 이자를 내보내야 했다. 아니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거나 말이다.
그러나 감히 그런 생각을 흐리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기 손에 놓인 옥새였다. 비록 그 옥새가 제대로 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는 이미 멸망했다곤 하나, 그럼에도 그 가치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아니! 금 황녀가 고려로 넘어왔다는 소문을 일부러 조장시킨 태자이고, 아직도 태자비에게 얽혀 있는 소문을 적절히 이용하여, 금의 유민들과 여진인들을 끌어들이는 지금 금의 옥새는 분명 나름의 큰 가치가 있다.
자신이 아는 태자라면 자신이 떠올리는 것 이상의 계획을 떠올릴 수도 있을 터다.
‘그래. 이 옥새에 대한 가치와 이 문제는 내가 처리하기엔 너무 큰 문제다.’
“좋소. 대인을 태자 전하께 안내해드리겠소.”
“감사하오.”
결국, 정안연은 후발아연이라는 금나라 사신을 데려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니 다음 문제는 이 금나라의 사신을 어떻게 데려가는가 하는 문제였다.
남송의 눈을 피하고자 거지 행색을 하며 기다린 자를 고려사신단 일행에 데려가는 것은 여러 이목을 끌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후발 대인도 알다시피 고려의 사신은 송에서 많은 이목을 받고 있소. 그런데 갑자기 일행이 추가된다면 분명 의아하게 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오. 그것은 대인께도 바라는 바가 아니리라 생각하는데 맞소?”
“그건 그렇소만 혹 다른 방도라도 있소?”
“대인을 안내한 자는 용강상단의 대행수로서 이번 사행에 함께 온 자이오. 그러나 용강상단은 본래부터 사신단과 별개로 오갈 수가 있으니 이번 출항에는 나와 사신단이 먼저 가고, 대행수에게는 따로 일이 생겨 조금 더 머물다 오도록 지시를 내리겠소. 그러니 대인도 상단의 배와 함께 고려로 오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러면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소이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설령 다소 걸린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라 여겨 이러는 것이오.”
“하면 옥새는 어찌 되는 것이오?”
“내가 먼저 들고 가 전하려고 하오.”
“으음. 그건….”
신음과 함께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자 정안연은 곧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이 옥새가 대인과 함께 송에 있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태자 전하께 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나는 이 일과 옥새의 문제를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나와 함께 온 부사는 물론 조정의 다른 이들이 알기 전에 태자 전하와 태자비 전하께 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그렇소.”
언뜻 들어도 고려 조정과 태자의 뜻이 다른 우려가 있다는 말에, 고려 내에도 파벌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인지한 후발아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그럼 나는 상단에 갈 것인데 어떤 신분으로 있으면 되겠소?”
“그것은….”
* * *
서경.
“그리고 바로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안연은 안주머니에서 용의 형상으로 조각된 금 도장을 꺼내 공손히 내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금의 옥새라고?”
옥새(玉璽).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이용하는 인장(印章)이며 천자만이 소유한 지배자의 상징.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견이 이걸 발견했다가 반동탁연합군이 무너지는 결정타가 되고, 손책에게 옥새를 받은 원술은 완전히 맛이 가서 꿀물 황제로 바뀌었다.
심지어 제갈공명도 발견 후에는 천기가 어떠니 했던 것이 바로 옥새라는 물건이다.
나도 직접 옥새를 보니 삼국지의 원술도 한나라가 이미 막장임에도 손책이 옥새를 보여주자 바로 반색하고 군대를 빌려준 이유를 어느 정도 공감이 갈 것 같긴 하다.
물론, 이건 그 삼국지에 나오는 진시황 때부터 내려온다는 전국옥새가 아니다. 금나라에서 만든 옥새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려에는 고려의 옥새가, 남송에는 남송의 옥새가 있다.
내가 이 옥새를 들고 천운과 천기가 내게 있으니 내가 진정한 천하의 지배자라고 주장해도, 이 옥새로 내가 고려의 군주가 되는 일은 없다.
거기다 금나라는 이미 멸망한 거나 다를 바 없어서 이것의 실질 효력은 그리 없다. 무엇보다 ‘이 옥새’ 자체가 ‘금나라의 다른 옥새들’에 비하면 가치가 낮다.
“이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금 황제를 자칭하는 자는 내게 선위를 할 생각은 없는 게 명백하구나.”
“예?”
“이것이 진짜 금의 옥새라 할지라도 이것은 천자신보(天子信寶)다. 진정 아조에 모든 것을 맡기거나 피난의 뜻을 밝히고 도주하려 했다면 ‘모든 옥새’를 건네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다못해 수명보(受命寶)나, 천자지보(天子之寶)를 건너야 할 것을, 고작 천자신보만을 주었으니 말이다.”
덧붙여 삼국지연의에서 손견이 발견해서 큰 사달이 난 옥새는 전국옥새(全國玉璽)다. 이것은 제위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옥새다. 다른 말로는 수명보라고도 한다.
이 옥새는 제위의 정통성과 천의가 현 천자에게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용도라 실무용도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실무용으로 사용하는 옥새들이 있었는데, 그중 천자신보는 대외 동원이나 중국 바깥의 번국을 소집할 때 사용하는 용도의 옥새다.
그리고 천자지보는 하늘이나 땅, 또는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옥새이다.
이 때문에 전국옥새인 수명보는 두말할 것 없고, 천자지보만 하여도 금은 자신들의 종묘를 고려에게 맡겼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이번에 천자신보(天子信寶)를 줬다는 것은 협력을 구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러한 옥새라도 겨우 사신의 증명 표시로 들고 와 보여줬다는 것에서 저곳에서 진심으로 이곳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뜻은 명백했다.
하지만 사방이 고립되고, 번국도 없어진 금나라에게 천자신보(天子信寶)라는 실무용 옥새는, 실무를 할 대상이 없는 실무용 옥새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게 사실이라면 채주성을 함락하였을 시 몽고가 금의 옥새를 구하지 못했다는 소문과 채주성에서 금 황제가 죽기 전 누군가에게 선위를 했다는 소문도 사실이란 말인데…. 이거 참. 설마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