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9
49화. 43장 동경론
동경의 밤은 어딜 가도 환성과 주향. 그리고 고기 구운 내로 가득 했다.
동경을 탈환 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장소에 있는 취객들의 경우는 승리를 축하하러 나왔다기 보다는, 대부분은 풀린 분위기와 ‘고기와 술’을 먹기 위해 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잇따른 국난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왕실에 있어서 동경에 있는 모두가 먹어도 무방할 식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런 인심몰이를 경시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축제를 벌임으로써 동경의 난이 실패로 끝이 났음을 동경 백성들에게 확실히 전달하고 조정이 그들을 신경쓴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 연회에 들어가는 고기와 술들은 전부 동경 귀족들의 것. 조정에서 실제 부담하는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를바 없었다.
“이 돼지 고기… 맛있긴 한데. 돼지 고기란 것이 이렇게 맛있는 고기였나? 전에 먹었을 때는 이런 맛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태자 전하 밑에 종군하는 병사 중에 북방에서 고기를 손질 할줄 아는 자가 있다더군.”
“북방에서 배운 자 라면 여진놈이나 거란놈들에게 배운 건가?”
“글쎄? 그나저나, 이번 반란이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이야. 재산을 빼앗긴 귀족 나리들이야 울상이시지만 생각보다 피가 적게 나서 참으로 다행이구만.”
“그건 동감이네. 예전 같았으면 못해도….”
“이봐.”
친구의 제지를 받고서야 아차 하며 말을 멈추고 조심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술에 거하게 취하였는지, 아니면 거리가 있어 못들었는지 신경을 쓰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뭐. 뭐, 아무튼 무사히 진압되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천만 다행이라는 거지. 음. 그렇고 말고. 그런 거지. 그, 그보다 이번 입성과 그 김방경 장군 일도 태자 전하께서 하신 일이라고 들었네만 자네도 들었는가?”
“아. 나도 듣긴 들었네. 몽고 놈들의 총대장을 사살하시고 반란만 하여도 이번으로 벌써 3번이나 진압하신 것 아닌가?”
“그렇고 말고 벽란도의 흑풍사호로 부터 금 황녀를 구해 정혼자가 되었다거나 의조님의 신기한 화살을 사용한다는 소리도 들었네만.”
“예끼. 이 사람아 그건 당연히 과장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에 사람의 머리를 터트리는 화살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하. 그렇겠지. 보구같은게 어디 있단 말인가? 으레 소문이 그러하듯 과장 된것이 겠지. 여튼 반란이 무사히 진압된 것만은 사실 아닌가? 우리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술이나 마시자구.”
그렇게 말해 잔에 담긴 탁주를 시원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신 둘은 취기가 돌기 시작한 듯이 금세 웃어제꼈다.
* * *
“……정말로 동경을 점령 하셨잖은가?”
신체가 어려 차로 때우고 있던 차에 드디어 조정에서 내려온 원군이 당도했다.
원군을 지휘하던 대집성은 동경 전역이 잔치로 화기애애한 광경을 보고는 믿을수 없다는 듯 얼빠진 얼굴을 짓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 하는 그의 낮짝에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그들을 맞이하였다. 내가 맞이 하자 일제히 집중되는 대집성과 김약선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병사들의 시선들 속에서 경악, 불신, 경외, 분노 등 기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을 확신했다.
‘하하핫. 위기에 빠진 나를 구하고 모처럼 큰 공을 세울 기회라고 생각했나? 유감이구만. 굵직한 공은 내가 다 끝낸 상태다!’
그들 입장에선 처음 원군으로 출병했을 때만 해도 세자는 금주성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덜덜 떨며 수성전을 펼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이후 승전 보고를 들었어도 울주에 있거나 아무리 잘해도 동경을 포위하고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김방경 덕분에 동경에 입성하고 주모자인 노호도 이미 죽여서 처리했으니 정말 닭쫒던 개 꼴이아니라 할수 없다.
“오오-! 수사공. 어서 오시오. 마침 잘 와주었소. 안그래도 동경의 난의 주구 중 하나인 최산이라는 역적이 동경에서 벗어나 아직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하여 난처한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조정에서 군이 내려왔으니 과인은 무거운 짐을 덜수 있게 되었소.”
“한 명을 놓쳤다는 것 입니까. 전하?”
최산을 놓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대집성 저 늙은이의 얼굴에서 안도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최산까지 잡았다면 정말 헛 걸음만 한셈이니 이리 생각하면 최산 놈이 도망친게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전하께서는 반란이 아직 완전히 진압된 것도 아니온데 어찌 벌써부터 음주를 허락하고 군기를 풀게 하였사옵니까?”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하는 대집성과 달리 김약선이 날카로운 눈매로 내게 질문을 던졌고, 그 물음에 대집성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 이에 대한 답도 준비해놓았다.
“지금 동경에 벌이고 있는 잔치는 울주에 진입한 이래 동경에 입성 하기까지 충분히 쉬지도 못한채 끊임없이 노력한 병사들의 노고를 달램과 동시에 동경의 불안과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과인은 이에 대한 문제를 이미 조정에 글을 적어 보낸 상황이오.”
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사후보고가 가능하다. 임시적이라곤 하나 군권을 쥔 내가 병사들을 급히 달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술을 허락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조정에도 보고를 올렸다고 한 이상 이들도 당장은 크게 따질수는 없었다.
공을 세운 상황이니 말이다. 그러나 못마땅해하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만 봐도 현재 최가 놈들에게 있어서 내가 얼마나 눈밖에 나고 있는지 알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궁금한 것이 여럿 있사옵니다.”
김약선…. 김약선. 아, 그래! 분명 역수가 말해준 기억이 있다. 원 역사에서 원종의 장인이었으며, 최우의 사위로 한때 최우의 후계자 자리까지 올랐던 자라고 말이다. 이를 보면 능력 자체는 있는 듯 하다. 대집성은 바지사장이고 실세와 두뇌는 이쪽인가?
“그에 대한 것은 자리를 이동후 설명할 것이니 두사람 모두 따라와주시오.”
* * *
월지(月池:신라 태자가 묵었다는 곳에 있는 호수. 경치가 좋다.) 누각으로 이동하고 성대한 자리를 마련한 왕식은 둘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그들 각각이 왕식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부 달랐다. 김약선은 꺼림칙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대집성은 뭐라도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먼저 두 사람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소. 과인은 이번 참에 ‘신라국의 부흥’이라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종지부를 찍으려고 하는데 두 사람도 이 일에 협력해준다면 무엇보다 기쁠 것이오.”
“종지부를 찍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그대들도 알다시피 동경에서 신라국 부흥이라는 미명 하에 숱한 반란이 일어난 것이 이미 수차례가 되지 않았소?”
반란을 언급하자 미동없던 김약선과는 다르게, 대집성은 단번에 미간을 찡그리며 동의 하며 화를 냈다.
“그거야 그렇지요! 지긋 지긋하게도 일어났지요. 만약 전하께서 동경의 지위를 다시 박탈하고 역모에 가담한 모든 귀족들을 참하여 태묘사직과 황실의 지엄함을 보이겠다고 하신다면 소인 또한 크게 찬동하는 바이옵니다.”
“진정하시지요. 수사공 어른!”
“아니 괴인 또한 수사공 말에 찬동하오.”
“!?”
대집성을 말리려던 약선은 세자가 대집성의 말에 찬동 하자 월지에 온 이후 처음으로 당황하며 세자에게 시선을 돌렸고, 세자는 김약선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이어 말했다.
“아, 물론 동경의 모든 귀족을 참한다는 것은 반대하오. 또한 단순히 동경 말소를 주장할 생각도 없소.”
그 말에 김약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은 의견을 들어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왕식은 그들에게 현 동경 폐지 계획을 설명 했다. 그 설명을 요약하면 현 동경을 경주로 다시 격하 시키고, 금주[金州:김해]를 동경으로 승격시키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분명했다. 고려의 동경(동쪽 수도) 역할은 이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아닌, 금관가야의 국도(國都)였던 금주로 교체하겠다는 말이었다.
요컨대 경주와 신라 귀족들의 성장을 금주의 귀족들로 견제하겠다는 것이었는데, 평상시 금주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동경 귀족들도 이번 반란으로 많은 재산을 잃게 되어 한 동안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또한 역모에 관련되어 민감한 지금 동경은 물론 구 신라 귀족들로서는 경의 지위 상실에 대해 크게 반대할 힘도 명분도 없었다.
격하를 하는 대신 동경의 시민들에게는 이번 역모의 죄를 묻지 않는 것은 물론 양민 이하 3년 동안 조세를 면제 한다고 한 만큼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은 불협화합이 일어날 것이다.
이 경우 힘을 잃은 귀족들이 백성들에게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현 귀족들은 대부분 노비들 하나 먹일 식량이 없는 상황이다. 식량이 없다면 노비들을 어떻게 데리고 있고, 노비가 없다면 누가 밭을 갈겠는가? 곧있으면 노비들을 다른 귀족들에게 팔던가 혹은 빛을 질 것이다. 그러나 이 동경에서 그들의 노비를 살수 있거나 대출을 해줄수 있는 재력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
이유 같이 백성들과 고려에 손을 들어 재산 몰수에서 벗어난 토호들 뿐이다. 최악 백성들로 하여금 부당하게 착취하거나 뜯어낼려는 몰상식한 자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유와 토호들은 알아서 백성들에게 손대려는 귀족들을 막으며 세력을 키울 것이다. 이유를 비롯한 일부에겐 백성들을 지켜줌으로서 인망을 얻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세력을 높일 기회이기도 할테니 말이다. 이유에게는 금주의 동경 승격에 대한 계획을 일부 말하며 방해하지말라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도 임시라곤 하나 역모를 한 동경군에 가담을 한 자신의 처지를 아는 이상 힘이 강해진다고 해도 함부로 굴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 경주로 격하 한다면 경주의 귀족들은 이전과 같은 권세와 위상을 회복하기는 소원한 일이라 할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설명이 끝나고도 김약선과 대집성의 표정은 미묘하였다.
이유야 어쨌건, 현 시점에서 동경을 점령하고, 반란을 진압한 것은 세자였으며, 세자가 거점으로 삼았던 곳도 금주, 적의 주력을 격파 한 장소와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도 금주(와 금주 장정들) 였다. 금주가 다른 삼국의 수도에 비하면 위상이 모자라는 감이 있어도, 비교 선상에는 들어갈 정도였고, 고려의 삼경과 구 삼국의 수도들을 제외하면 나라에서 다음 가는 위상이 ‘있었던’ 곳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를 아예 하지 않을수도 없었다.
“하오나 전하. 아무리 금주가 가야의 수도였다고 한들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을 대신하여 천조(天朝=고려)의 ‘京’에 오르기엔 부족함 감이 있지 않겠습니까?”
김약선의 말대로 이러한 상황임에도 동경에 넣기에는 부족함 감이 없잖아 있긴 하다. 경주가 어디인가. 신라의 경주는 천년의 고도 였으며, 후삼국 시기엔 신라왕이 직접 항복하러 왔다가 이후는 낙랑왕이라는 작위와 함께 봉토도 받은 곳이 경주다. 여태껏 동경이 사고와 많은 관련이 있었음에도 계속 동경이었던 까닭은 고려에서도 함부로 하기는 힘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식도 이번에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그것을 무마하고도 남을 공을 금주가 세웠소. 지난 동경의 난 때 도 안동에서 공을 세워 도호부로 승격하고 동경은 경주로 격하된 사례가 있소. 이는 공을 세운 지역에는 그만한 상이 있음을 말하고, 죄를 지은 자들은 벌을 받음이 마땅하다고 할수 있지 않소?”
1204년(신종 神宗 7년) 신라 부흥을 주장하여 밀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군을 안동에서 격퇴를 하였을 때 안동은 공이 있으니 승격해야 하며 경주는 죄를 지었으니 격하해야 한다고 주장이 나왔는데 이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현 권신 최우의 부친인 최충헌이었다. 최씨 일파 였던 그들로선 이 사례만큼은 간단히 무시하기 힘들었다.
“하, 하지만…”
“금주가 작게 보면 삼국과 맞겨뤄 오랫동안 존속한 가락의 고도이며, 길게는 신라가 구 삼한을 일통하는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의 시조인 수로왕도 이곳의 태생이 아니오?”
“태자 전하께서 아조를 위해 진력을 다하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소인들의 능력이 부족하여 태자 전하께서 설명하시는 바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근래 들어 있었던 일 조차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식견과 지혜가 부족하온데 나라의 ‘경’을 정하는 것을 어찌 쉽게 이해하고 답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조세를 3년이나 면하다니요 이것은 소인들의 재량 밖의 일이 아니옵니까? 그렇기에 이런 중차대한 일을 감히 이 자리에서 답해드리기에는 소인은 권한도 능력도 없사오니 우선 전하의 뜻을 조정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춘 김약선의 거절 의사를 전해 듣고도, 왕식은 힐끔 대집성을 바라봤다. 지금 껏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대집성도 김약선의 말에 뒤늦게 왕식이 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깜짝 놀라 표정을 고쳐 짐짓 화난 듯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야 뻔한 것이었다. 근래의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은 ‘거복의 난 진압’과 ‘교동(喬桐:현 인천 광역시)에 유배되어 있는 왕영을 방문한 일’ 때문이다.
세자는 거복의 난을 진압하고 개경에서 나와 남쪽으로 위무를 하던 도중 오늘 날 인천 지역을 지날 때 교동(喬桐)을 들렀다. 교동에는 고려 왕실의 종친 어르신인 왕영이 유배되어 있었는데, 이 왕영은 바로 현 고려왕(=고종)의 숙부이자 선대 왕 강종[康宗]의 사촌동생이며, 그 강종 이전의 선대왕이었던 희종 대왕[熙宗 大王]이었기 때문이다.
왕이었던 희종이 살아서 왕위에 벗어나 외딴 교동에 유배된 이유는 당연히 무신정권, 그것도 최씨 일가의 수작 때문이다. 희종은 즉위 초만 하여도 자신을 옹립한 최충헌에 반항하지 않았으며 최충헌이 말하는대로 모두 따랐으나 최충헌이 방심한 틈을 타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폐위가 되어 강화도로 유배가 되었다. 그러나 암살 시도는 한번에 그치지 않고, 지금으로부터 6년전 1227년에 다시 복위를 노렸고, 이번에도 실패하여 교동으로 유배 된 것이다.
희종의 암살은 최충헌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악몽으로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그 아들 최우 또한 희종을 요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자가 갑자기 군을 이끌고 교동에 가서 폐주를 만난다는 보고가 올라왔으니 당연히 이 일은 강화 조정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