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21
교랑의경 121화
진안 군왕은 이황자를 황후에게 데려다준 후에야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어릴 때는 태후와 함께 지냈지만 장성한 후부터는 내외하기 위해 궁의 가장 서쪽으로 옮겨온 터였다.
진안 군왕의 거처는 정무를 보는 곳과 가깝고 후궁에서는 먼 곳이었다. 본디 태조 황제의 서재였는데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하고 쭉 비워 뒀다가 진안 군왕에게 하사하면서 다시 사람이 살게 됐다. 여러 해를 거치면서 나무가 우거진 탓에 겨울에는 그나마 낫지만 여름에는 빽빽한 초목이 하늘을 가리고 해를 가려 적막해 보이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진안 군왕은 상으로 받은 두 함을 병풍 앞에 내려놓고 조용히 쳐다보다가 돌연 다가가 손으로 쳐 엎어 버렸다.
“전하.”
내시가 놀라 부르며 급히 문을 가리고 조심스레 좌우를 살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아무도 없다. 놀라는 꼴 하고는.”
“군왕, 놀라게 이러지 마십시오.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방심하시면 안 돼요.”
내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편히 말했다. 말투를 듣자니 군왕과 퍽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진안 군왕이 옷을 털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알았으니 물러가라.”
진안 군왕이 바닥에 흩어진 보물로 손을 뻗었다. 팔걸이 책상에 몸을 기댄 진안 군왕은 비스듬히 기대앉아 보물들을 하나씩 건들건들 들어 올리며 미소를 머금고 쳐다봤다.
내시는 네 하고 대답한 후 문을 닫고 나갔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문과 창문의 격자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자 대청에 자리를 깔고 앉은 소년의 몸에 얼룩이 졌다.
*
2월 말의 이른 새벽,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안개가 걷히기 전인데도 주씨 저택의 연무장에서는 기합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주씨 가문의 모든 사내들은 무예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는 주씨 가문뿐 아니라 모든 무장 가문의 전통으로, 이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단련했다.
지천명이 가까워지는 주 노야는 반팔 차림으로 긴 창을 들고나와 날렵하고 화려한 몸놀림을 구사했다. 맞은편에서 응수하는 주육낭은 웃통을 벗은 채 은창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형이나 아우들도 옆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초봄의 기운 속에서 다들 웃통을 벗은 채 땀을 비 오듯 흘렸다.
탄성 소리와 함께 주육낭이 들고 있던 창이 허공을 갈랐다. 주육낭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육낭, 아직 멀었구나.”
주 노야는 껄껄 웃으며 손에 든 장창을 바닥에 꽂았다.
“그래도 잘했다. 내가 너만 할 땐 네 할아버님의 창에 번번이 걸려 쓰러졌어.”
부자 대결이 끝나자 다른 형제들도 각기 승부를 가른 다음, 차례로 활시위를 몇 번씩 당기면서 새벽 단련을 끝냈다. 연무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사환들이 우르르 달려와 윗전의 땀을 닦아 주고 옷을 챙겨 주었다. 주육낭은 홀로 사슬에 묶인 돌을 몇 번 더 던진 후에야 수련을 끝내고 걸어 나왔다.
사내들이 새벽 단련을 마치자 곧 주씨 가문의 아침 식사 시간이 시작됐다. 주 노야와 관직에 나간 두 아들은 식사를 마친 후 관청으로 출근하고, 나머지 자녀들은 각자 흩어졌다.
“육낭, 오늘 우리랑 보수사에 가자.”
자매들이 주육낭을 불렀다.
“안 갈래. 그렇게 번잡한 곳 딱 질색이야.”
주육낭은 딱 잘라 거절했다.
“됐거든요?”
여동생 하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바보가 가자고 하면 분명 갈 거면서.”
“여섯째 아우는 그 애랑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그 애를 감시하는 거야. 도망칠까 봐.”
다른 자매가 웃으며 대꾸했다.
“도망을 친다고? 집에 들러붙어 절대 안 가려 들걸.”
자매들이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데, 누군가가 말을 잘랐다.
“쉿, 쉿, 조용히 해. 진씨 가문 낭자가 왔어.”
다들 걸음을 멈추고, 여종이 한 여인을 안내해 걸어오는 모습을 쳐다봤다. 자매들은 걸음만 멈췄지만, 앞서 걸어가던 주육낭은 몸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진 낭자와 여종이 지나갔다. 이쪽의 자매들도 인사를 건네지 않고 저쪽의 진 낭자도 예를 표하지 않은 채로 양측은 서로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문신 집안 낭자들은 본디 무장 가문과 왕래가 적었고, 주씨 자매들도 굳이 인사치레를 하려 들지 않았다.
“진 낭자가 저 애랑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네.”
자매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예 말을 안 할 수도 있지.”
다른 하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진십팔랑이 마당 문 안으로 들어섰다. 여종은 안에 통보만 하고 곧장 가 버렸다. 진십팔랑 역시 누가 나와 맞이하길 기다리지 않고 곧장 층계를 올랐다. 옆에 있는 측실 문 앞에 서자 두 시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측실은 소박하게 꾸며 놓은 서재였다. 숯이 활활 타고 있는 화로 두 개가 초봄의 한기를 쫓아 주었다. 서재에는 좌우 양쪽으로 낮은 탁자 두 개가 놓여 있고, 지필묵 외에는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솜옷 위에 걸치는 덧옷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간 진십팔랑은 자신의 자리인 왼쪽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십팔랑은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펼쳐 놓고 돌로 만든 서진으로 잘 눌러 놓은 다음 몸을 살짝 틀어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을 다 갈았을 무렵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문이 열렸다. 버선만 신은 발이 먼저 안으로 들어왔고, 이어 사람 전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말도 없고 인사도 없이 고개만 살짝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교랑은 한쪽 옆에 앉아 진십팔랑이 먹을 갈고 붓을 들기를 기다렸다. 진십팔랑이 글씨 한 장을 썼다.
정교랑이 붓을 들자 진십팔랑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정교랑이 붓을 쥐고 손을 놀리는 움직임 일거수일투족을 진지하게 관찰했다. 글씨를 쓰고 난 정교랑이 진십팔랑에게 종이를 건네자 진십팔랑이 받아 탁자 위에 놓고 모사를 시작했다. 정교랑은 홀로 글씨 연습을 하다가 잠시 후 몸을 돌려 진십팔랑을 쳐다봤다.
“팔이 너무 높아요.”
정교랑은 이따금 한두 마디 하면서 진십팔랑의 자세나 붓놀림을 교정해 주었다. 한 시진이 지나자 시녀가 물 한 잔과 차 한 잔을 들여왔다. 오늘 글씨 연습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차를 마신 진십팔랑이 옆에 있는 정교랑을 쳐다봤다.
“낭자, 차를 안 좋아해요?”
처음 만난 이후로 매번 볼 때마다 이 여인은 물만 마실 뿐 차를 마시지 않았다.
“아니요.”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여기 차는 내 입맛에 안 맞아요.”
진십팔랑은 다소 의아해하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찻잔을 쳐다봤다.
돈이 많은 주씨 가문은 보수사 승려가 파는 다병(茶甁)을 샀는데 이는 현재 경성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싼 것이었다. 또 경성에서 돈이 있는 가문은 물도 경성 밖 낙매산(落梅山)에서 길어온 샘물에 소금과 육두구를 섞어 썼다. 그러다 보니 차를 우리는 몸종의 솜씨가 평범해도 맛은 일품이었다.
입에 안 맞는다? 남북의 차이 때문인가?
“우리 집은 남방의 복주와 항주에서도 차를 가져와요. 인편에 보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만 저희 아씨는 댁에서도 차를 안 드셨어요. 지금의 차를 안 좋아하세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의 차를 안 좋아한다? 그럼 예전 걸 좋아한단 건가? 아니면 이후의 것? 진십팔랑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조용히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다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은 진십팔랑은 인사를 표하고 물러났다. 이제 정교랑이 낮잠을 잘 시간이었다.
*
정교랑의 시녀가 또다시 마차를 타고 외출한다는 전갈에 주 부인은 냉소를 지었다.
“허구한 날 밖으로 나도니 여자애가 아주 낯도 두껍네요.”
주 부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목이 따끔거렸다. 간신히 잠잠해졌던 기침이 또 올라왔다.
“그렇게 밖에 있는 게 좋다니 밖에 집을 마련해 줘요. 그래야 죽을 사람 둘러업고 우리 집으로 달려오는 일도 없죠. 재수가 없어서 원.”
거기까지 말한 주 부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진씨 가문에서 그 애한테 집을 내주지 않았어요?”
주 노야가 인상을 쓰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당초 거기 가서 살겠다는 걸 우리가 못 가게 했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내쫓는단 말이오? 밖에 나가고 싶다면 나가게 두지, 그게 뭐라고.”
“그건 아니죠. 남들은 그 애만 보는 게 아니에요. 우리 주씨 가문이 여식을 제대로 못 가르쳤다는 말이 돌면, 괜히 우리 딸들까지 피해를 본다니까요.”
주 부인이 인상을 썼다.
“우리 딸들도 시집을 가야 하는데.”
“그래도 내쫓는 건 보기 안 좋소.”
“뭐가 안 좋아요? 그냥 내팽개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인들과 여종, 몸종을 여럿 딸려 보내면 되죠.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니 언제든 금방 다녀올 수도 있고요. 그 집은 위치도 좋고 경치도 좋아서 어디 나갈 때도 편해요. 서로 싸울 일도 없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으니…….”
“잠깐.”
주 노야가 말을 끊고 물었다.
“그 애를 보내겠다는 거요? 아니면 우리가 이사를 나가겠단 거요?”
주 부인이 주 노야를 노려보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그 앨 평생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 애 것이 곧 우리 것 아니에요?”
“알았소, 생각해 보리다.”
주 부인은 주 노야를 채근하는 대신 여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애들이 또 어딜 나가려는 거지? 육낭은 안 따라가고?”
“그 몸종만 나갔어요.”
“시골 계집이 싸돌아다니긴, 길도 잘 모르면서. 유괴나 안 당하게 조심할 것이지.”
주 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유괴나 당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계집이다.
시녀는 보수사 밖에 마차를 세운 후 홀로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 북적이는 인파를 지나 곧장 후문으로 간 시녀는 능숙하게 길을 찾아갔다. 시녀가 어느 집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조금 열리더니 노인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늘 읊던 인사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명첩을 주시면 소인이 대신 받아 놓겠습니다. 저희 노야께서는 지금 손님을 안 만나시니 며칠 후에 다시 오시지요.”
주절주절 읊조리던 노인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소심!”
“아저씨.”
늙은 문지기가 문을 활짝 열고 흥분하여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시녀를 살폈다.
시녀는 본디 물건과도 같아 내키는 대로 교환하고 증여하는 일이 흔했지만, 오래 함께 지내다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이었다. 윗전의 결정을 놓고 가타부타하는 이는 없어도 하인들끼리 있을 땐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소심은 어느 집으로 갔으려나, 잘 지내나 모르겠네. 멀리 떨어져 있으니 평생 다시 보긴 힘들겠지.
그런데, 그 소심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소심, 너 설마, 도망쳐 나온 건 아니지?”
문지기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무거운 표정으로 소심의 뒤쪽을 살폈다. 마차도 없이 홀로 찾아온 걸 보면, 아무래도…….
“아저씨,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저 경성 온 지 좀 됐어요. 오늘은 윗전의 명으로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나 보러 온 거고요.”
소식은 금세 전해졌다. 안으로 들어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심!”
몸종 하나가 안에서 달려 나왔다. 몸종은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을 반짝였다.
“아씨께서 돌아오셨구나! 아씨도 오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