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22
교랑의경 122화
단정히 꿇어앉은 시녀가 중앙에 앉은 노인에게 절을 올렸다.
“그래, 그래.”
장 노태야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어서 일어나거라.”
옆에 있는 몸종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씨께선 언제 경성에 오신 거야? 왜 경성으로 왔어? 노야께서 쫓아내신 거야?”
몸종이 눈물을 펑펑 쏟자 시녀와 장 노태야가 웃었다.
“반근, 너희 아씨를 너무 얕잡아보는구나. 누가 너희 아씨를 내쫓을 수 있단 말이냐?”
장 노태야는 껄껄 웃었다.
“왔으면서 왜 날 안 찾아왔어?”
몸종이 울며 물었다.
“이렇게 왔잖아.”
시녀가 웃으며 몸종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반근, 울지 마. 사정을 아는 사람은 네가 옛 주인이 그리워 이러는 걸 알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노태야께서 널 괴롭히시는 줄 알아.”
장 노태야는 허허 웃음을 터뜨리며 소심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아, 날 띄워줄 것 없다.”
몸종도 정신을 수습하고 얼른 눈물을 닦았다.
“노태야, 추태를 보였네요.”
몸종은 목멘 목소리로 노태야를 향해 예를 올리고, 이어 시녀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역시 언니가 똑똑하고 말도 잘하네. 난 아둔해.”
시녀가 헤헤 웃었다.
“걱정 마. 명석하신 노태야 앞에선 우리 모두 같은 처지야.”
장 노태야가 껄껄 웃었다.
“너희 아씨 앞에서도 이렇게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느냐?”
“저희 아씨도 명석하세요. 저도 아씨 앞에선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걸요.”
시녀가 한숨 쉬는 시늉을 하자 몸종도 함께 웃었다.
“그래, 새 주인은 그만 치켜세워라.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온 거야? 언제 왔어?”
“연말에 왔어요. 지금은 아씨의 외조모님 댁에서 지내고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하자 장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잘 지내셔?”
몸종이 물었다.
“잘 지내시지.”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남이 잘 대해 주든 말든 아씨는 잘 지내실 수 있어.”
잘 못 지내신단 말이네. 집에서도 사람을 내팽개쳐 둔 채 혼수만 놓고 다퉜으니. 사람을 데려와 놓고 춥지 않고 배곯지 않게만 하면 다인가. 개나 고양이는 따뜻하고 배만 안 곯아도 잘 지낸다지만, 어쨌거나 사람은 개나 고양이와 다르지 않은가.
몸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집안에 바보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온 가족의 수치였다. 열에 아홉은 갓난아이일 때 익사시키는 길을 택했다. 익사로 죽지 않은 갓난아이는 오점과도 같아서, 두 집안 사람들의 몸에 딱 달라붙어 수시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러는 동안 뼛속 깊이 혐오가 스미다 보니 두 집안 모두 아이에 관해서라면 진저리를 쳤다.
“세속에 대한 욕망이 없으면 의연해질 수 있고, 바라는 바가 없으면 모든 게 해결되느니라.”
장 노태야가 몸종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 아씨는 아무 일 없으니 괜히 걱정할 것 없다.”
몸종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래, 난 이만 가야겠다.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는지 보고 오라고 보내신 건데 너무 오래 머물렀네.”
몸종은 못내 아쉬운 듯 무언가 더 물어보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장 노태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더 붙잡거나 캐묻지 않았다.
“그래, 가 보거라.”
시녀는 예를 표하고 일어난 후 몸종을 향해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몸종은 못내 아쉬워하며 시녀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그만 보거라. 금방 볼 수 있을 게야. 그동안 네 아씨에게 무슨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지나 생각해. 아씨한테 보여 줘야지. 아씨를 떠난 후 네 솜씨가 이만큼 늘었는데 후회하는지는 않는지.”
몸종이 기뻐하며 웃었다.
“노태야, 제 솜씨가 아무리 많이 늘었어도 아씨한테 배운 거예요. 아씨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죠.”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네 아씨가 최고고 천하제일이야. 견줄 자가 없단다.”
장 노태야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몸종 역시 생긋 웃고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주씨 저택.
빨랫감이 담긴 통 두 개를 허드렛일을 하는 몸종 두 명이 힘겹게 옮기고 있었다.
“언니, 힘든데 좀 쉬었다 하자.”
반근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무 막대에 걸린 두 나무통은 명백히 반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뒤에 있던 몸종은 심드렁하게 몸을 굽히며 나무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왜 이쪽 길로 가? 먼 길을 돌아가려니 힘들어 죽겠네.”
반근은 웃으며 고생했다고 하고 무심결에 옆쪽 집을 쳐다봤다. 열린 마당 문 사이로 몸종 몇 명이 모여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여인은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모든 습관이 그대로였다. 곁에 있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반근 언니.”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 반근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고운 자태의 시녀가 걸어오자 옆에서 지나가던 몸종들과 여종들이 웃으며 인사했다. 반근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나무 막대를 들어 올렸다.
“어서 가자, 어서. 늦으면 양 어멈한테 또 혼나.”
다른 몸종이 심드렁하게 막대를 들어 올렸다. 앞쪽의 반근이 하도 급하게 걷는 바람에 몸종이 비틀거렸다.
“야, 천천히 가. 급하면서 괜히 길을 돌아가자고 해서는.”
몸종이 투덜거리며 따라갔다.
세탁방 안.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던 여종들은 반근과 몸종이 다가오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에 놓인 나무 함지를 반사적으로 가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여종들이 인상을 썼다.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다 이제야 와?”
여종이 무거운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반근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몸종이 어깨를 주무르며 불평을 쏟아냈다.
“쟤 때문이에요. 쟤가 꾸물거려서 오래 걸렸어요.”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나무통을 수조 앞으로 옮겼다.
“알았으니 넌 이만 가서 쉬어.”
여종이 몸종을 노려보며 말했다. 몸종은 신이 나서 고맙다고 인사한 후 뒤돌아 뛰어갔다. 여종이 수조 앞으로 옷을 꺼내놓는 반근을 쳐다봤다.
“넌 방에 있는 옷 챙겨 나와.”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하고 젖은 손을 몸에 쓱쓱 문지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여종은 다른 여종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어쩌지?”
여종은 고개를 숙이며 앞에 있는 나무 함지를 쳐다봤다. 나무 함지에 담긴 치마 두 벌에 얼룩덜룩 물이 들어 있었다.
“부인께서 제일 아끼시는 치마야.”
다른 여종이 말했다.
“누가 나서서 잘못을 책임져야 해.”
그 말에 다들 눈을 피했다.
“보아는 어렵사리 부인을 모시게 됐고, 그 어미는 새로 부엌일을 맡게 됐어. 그 애 동생이 조 집사의 부인과 가깝기도 하고. 이번에 보아를 감싸주지 않으면 그 애가 벌 한 번 받는다고 다가 아니야. 일가족이 두고두고 벼를걸.”
“그럼 어떡해? 우리가 책임질 순 없는 노릇이잖아.”
“다른 사람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 세탁방 식구들만 해도 따지고 보면 이리저리 안 얽힌 사람 있어?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누구는 저래서 안 되고 다 어렵지.”
여종들은 일순 침묵에 빠졌다. 그때 누군가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방 쪽을 쳐다봤다.
“적당한 사람이 하나 있긴 하네.”
다들 멈칫하여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작고 왜소한 형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보따리를 안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
어둠이 내리고 태평거 안은 등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지만 대청에 손님이라곤 없었다. 계산대에 기대앉은 두 사내는 밖에서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등롱을 멍하니 바라봤다. 멀지 않은 도로에서는 이따금 마차가 지나갔다.
“아무도 안 오려나 보네.”
사내가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문 닫읍시다.”
“밤샘 영업을 해야지. 손님 오시면 어쩌려고.”
“여긴 경성으로 가는 길목이에요. 경성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인데 성문이 닫혔잖아요. 오밤중에 누가 또 오겠습니까.”
먼저 말했던 사내가 대꾸했다. 두 사내가 실랑이를 벌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셋째 형님.”
사내들이 부르는 소리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닫자.”
두 사내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일어나 불을 끄고 문단속을 했다. 서무수는 옆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이대작과 노인 하나가 일어나 맞이했다. 자리에 앉은 서무수는 장부를 펼쳐놓은 범강림을 쳐다보며 물었다.
“매일 정산해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범강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이대작이 불안해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어른, 이제 막 개업했으니, 아직은, 장사가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이대작이 말을 더듬었다.
“입소문이 나야죠. 취봉루도 오랜 시간을 들여 단골을 모았어요.”
노인이 말했다. 이대작이 소개한 옛 관리인이었다.
“오(吳) 관리인, 주인어른의 말씀부터 들어보죠.”
이대작이 나지막이 부르며 눈짓을 했다. 취봉루 얘기 좀 그만하라고.
노인의 장점은 경험이 많다는 것이고 단점은 늘 과거만을 얘기한다는 것이었다. 옛 주인과 비교하길 좋아하고.
서무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관리인의 말이 맞소. 차차 입소문을 내면 되겠지.”
오 관리인이 하하 웃었다.
“주인어른이 잘 아시는군요. 당초에…….”
오 관리인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대작이 옆에서 쿡 쑤시자 취봉루 얘기를 접어 두기로 했다. 범강림과 서무수는 못 본 체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대낭도 오랫동안 음식을 만들어 요리는 문제가 없는데, 신선거가 워낙 인기 있어서 말입니다. 여기 사람들을 다 데려갔어요. 그러니 명성은 차차 쌓아야죠.”
오 관리인의 말에 서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꽤 됐군. 그만들 가서 쉬시오. 매일 걱정이 많구려.”
이대작과 오 관리인이 자리를 떴다.
“저들이 우리보다 더 걱정이구나. 장사를 접을까 봐 그러겠지.”
범강림이 웃었다.
“그래서 그리 걱정하는군요.”
서무수가 장부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 상태로면 확실히 계속 장사하긴 힘들겠소.”
“입소문이 중요해. 입소문이 안 나면 누이한테 도움도 안 되잖아. 장사까지 맡겼는데 면목이 없네.”
서무수가 잠시 침묵하다가 웃음을 지었다.
“형님, 사실 누이는 우리한테 도움 받을 생각 없을 겁니다. 누이가 우릴 돕는 거죠. 우리한테 고마운 일이고.”
“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싸우는 거 말고는 도움 될 게 뭐 있겠느냐.”
범강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다, 우리는 싸움도 잘 못 하지.”
“우리가 누이를 돕는 길은 조용히 이 점포를 지켜 주는 것뿐이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얌전히 주인 노릇을 하는 겁니다. 억지로 뭘 하려고 근심할 필요 없소. 그러다 오히려 누이한테 폐만 끼칠 테니까.”
범강림이 웃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우린 누이를 위해 이 가게를 잘 지키기만 하면 돼. 지금은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나중에 입소문이 나면 못된 놈들이 와서 시비를 걸 거야. 그럴수록 우리가 잘 지켜야지.”
하지만 나쁜 놈들이 와서 시비를 거는 날이 오기나 할지, 그런 날이 오더라도 이들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