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54
교랑의경 154화
“정 언니.”
진단랑도 몸을 돌려 진안 군왕과 정교랑을 차례로 쳐다보더니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역시 어린아이인지라 묻고 싶은 건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물었다.
“한 번 본 적이 있어.”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진안 군왕이 환하게 웃었다.
“정씨였어요?”
진안 군왕은 무언가 깨달은 듯 말을 이었다.
“아, 그 저택도 낭자 거였고.”
이번에도 맥락 없는 말이 이어졌다.
“네. 원래 진씨 가문의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내 것이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웃었다.
“낭자를 보러 찾아갔는데, 진씨 저택이 아니라길래 사람을 잘못 찾은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뭡니까.”
여종과 시녀는 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교랑의 뒤에 있던 시녀가 진안 군왕을 빤히 보더니, 짧은 탄성 소리를 냈다. 시녀는 예의도 잊은 채 진안 군왕을 향해 삿대질했다.
“아, 아, 그때 그 사람. 그 사람이네요.”
진안 군왕이 시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대며 쉿, 하는 동작을 했다.
역시 아는 사이였구나. 진단랑의 여종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남녀가 유별하잖아. 인사말 몇 마디 주고받는 거면 몰라도 말이 길어지면 안 되는데. 진단랑의 여종이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정교랑이 진단랑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응? 어디 가요?”
진안 군왕이 얼른 물었다.
“가야지요.”
정교랑이 고개만 살짝 돌려서 답했다.
“왜 벌써 가는데요?”
“다 봤으니까요.”
진안 군왕이 잠시 멍해졌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대자전을 다 둘러봤으니 가는 게 맞지.
정교랑이 진단랑의 손을 잡고 대자전 밖으로 걸어갔다.
“우리 보탑 보러 가요.”
신난 진단랑이 걸음이 빨라지자 여종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진안 군왕도 뒤따라 나왔다.
“공자님.”
시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진안 군왕을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그만 따라오세요.”
진안 군왕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따라가는 거 아니다. 나도 보탑을 보러 가는 길이야.”
시녀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우리가 다 보고 나면 그때 가세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알았다.”
이자는 경성 제일의 호색한이다. 사람들 앞에서 감히 아씨의 두모에 손을 댄 인간인데, 이런 자의 말을 어떻게 믿어.
“네 아씨가 저 멀리 가셨구나.”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시녀의 뒤편을 가리켰다. 시녀가 급히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정교랑 일행이 보였다.
시녀는 정교랑을 따르고부터, 아니, 장 노태야를 따르고 나서부터 한시도 불안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여유롭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꼭 이 호색한 앞에만 서면 여유를 잃어버렸다.
시녀는 진안 군왕을 다시 한번 흘겨본 후 서둘러 정교랑을 따라갔다.
“저 계집이 참 간도 크네요.”
내시가 말했다.
“늑대 떼를 본 사람인데, 간이 작을 리가 없지.”
진안 군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 주인에, 그 아랫것인 법이지.”
어찌 됐든 간에, 저 낭자가 좋다는 말일 테지. 내시가 속으로 생각하고 웃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소인이 항상 칭찬을 듣나 봅니다.”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시가 멀어져가는 정교랑 일행을 보면서 합장했다.
“전하, 과연 영험하지요?”
영험하고말고! 진안 군왕은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영험해.”
정말 영험하잖아!
드디어 찾았어, 드디어 찾았다고. 이렇게 쉽게 저 여인을 찾아낼 줄이야!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눈앞에서 만나다니!
진안 군왕도 성큼성큼 걸어 정교랑 일행을 뒤따라갔다.
진단랑은 탑 주위를 한참 동안 뱅글뱅글 돌았다. 여종은 진단랑을 따라 같이 돌면서 어떻게 소원을 빌어야 하는지 알려 주고, 대충 아무거나 빌어선 안 된다는 귀띔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럼 내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를 위해서 복을 빌면 돼?”
진단랑이 물었다.
“그럼요, 그럼요. 그건 됩니다.”
여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 언니, 언니도 와서 소원 빌어요.”
진단랑이 해맑게 웃으며 정교랑을 향해 손을 흔들자, 한쪽에서 석탑을 보고 있던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정 아씨는 진인 문하의 사람이라, 부처님께 기도드리지 않아요.”
여종이 조용히 진단랑에게 말했다. 도교 이 진인 문하의 제자가 어떻게 불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겠나.
정교랑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칠층 높이의 석탑에 걸린 구리 방울을 보았다. 봄바람이 스치자, 구리 방울이 맑고 청량한 종소리를 냈다.
시녀는 탑을 돌지도, 정교랑을 따라 석탑 구경을 하지도 않았다. 불안한 듯 끊임없이 뒤를 힐끔거렸다. 예상대로 아까 그 호색한이 몸을 흐느적거리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탑은 처음 세워질 때 서북향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시녀가 얼른 진안 군왕의 말을 빼앗아 이어 말했다.
“……그 당시에 누군가가 연유를 물었더니, 이 탑을 만든 장인이 백 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바르게 세워질 거라고 대답했죠.”
그러면서 정교랑의 팔을 잡아끌어 옆쪽으로 몇 걸음 비켜섰다.
“내년이면 딱 백 년이니, 낭자가 참으로 적시에 왔습니다!”
진안 군왕이 목청을 높이고 웃으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도 눈 안 멀었어요. 잘 보이거든요?”
시녀가 고개를 휙 돌리고는 진안 군왕을 노려보았다. 정교랑이 시녀를 따라 자신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아무 말 없이 탑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이 대꾸하지 않자 시녀는 한시름 놓고, 진안 군왕을 향해 누가 널 상대하겠냐는 눈빛을 쏘아댔다.
그런데도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그렇네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의 얼굴빛이 더욱 환해졌다.
곧게 솟은 측백나무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깍깍 울며 날아갔다. 진안 군왕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측백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경성에 온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이곳은 처음인가 보죠?”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녀는 정교랑의 옆에 꼭 붙어서서 진안 군왕이 더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키가 이 무례한 호색한보다 작은 게 몹시 분했다. 정교랑보다도 작았으니.
문득 예전에는 자신이 정교랑보다 조금 더 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나니 아씨의 키가 더 커진 것 같네. 옷도 새로 해드려야겠다.
“내가 이겼네요. 난 이번이 두 번째거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지만,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았다.
“듣자니 이 측백나무는 한나라 때 거랍니다.”
진안 군왕이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은 측백나무였다. 가지에 난 잎에는 푸르른 초록빛이 돌았다.
“내가 여기를 고작 두 번밖에 오지 않았다는 게 지금은 좀 후회되네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그를 쳐다봤다.
“지난번에 왔을 때 여기 노승이 너무 수다스러워서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내쫓았거든요. 내가 여기 여러 번 와서 이야기를 좀 더 들었더라면, 오늘 낭자한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도 많았을 테니 아쉽잖아요.”
“그리 마음 쓰실 것 없어요.”
시녀가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까치발을 들어 군왕의 시선을 가렸다.
“이야기라면, 제가 아씨께 많이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가볍게 다가섰다.
“네 이야기는 네 것이고,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내 것인 게지. 완전히 달라.”
진안 군왕이 웃으며 정교랑을 봤다. 시녀는 이를 갈면서 자신도 진안 군왕을 따라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이런 유치한 기 싸움을 하는 사이, 진단랑이 탑을 다 돌았는지 쪼르르 달려왔다.
“나 배고파. 내 간식은?”
시녀가 반색하며 말했다.
“반근과 금가아한테 따뜻한 물과 함께 준비해 두라고 일렀어요. 우리 다시 연못 쪽으로 가서 먹을까요?”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다 못 먹으면 물고기한테 줘도 되겠다. 물고기들도 우리 정 언니가 만든 간식을 맛있게 먹을 거야.”
반근이 연못 옆에 방석을 가지런히 두고 고개를 들자, 반대편에서 금가아가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나뭇가지로 연못 안을 휘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장난치면 못써.”
반근이 금가아를 향해 외치자, 금가아가 헤헤 웃고는 나뭇가지를 한쪽으로 던졌다.
“아씨, 오셨어요?”
금가아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정교랑 일행을 보며 외쳤다. 여종이 진단랑의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자, 반근도 따뜻하게 데운 손수건을 정교랑에게 건넸다.
“반근 누나.”
반근이 돌아보자 시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금가아의 모습이 보였다.
“왜 그렇게 허둥대? 개한테 쫓기기라도 했어?”
시녀는 황급히 금가아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장랑에서 걸어 나오는 내시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무엄하다!”
내시가 벌컥 성을 내며 호통을 쳤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금가아는 놀라 굳어버렸고, 나머지 사람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행색은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보수사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는 지위였다. 소년의 언행만 봐도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티가 났다. 같잖은 말싸움 정도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작정하고 욕한다면 무슨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었다.
시녀는 내심 불안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딱 잡아떼는 수밖에. 모르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지 않았던가.
시녀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욕을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여기 있었네. 지금 누가 무엄한 건데? 누가 무례하고?”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따졌지만 내시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 사찰이 너희들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설령 무례했다 하더라도 함부로 욕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내시가 천천히 말하자 분위기가 무겁게 변했다.
“그러게.”
진안 군왕이 발을 들어 내시를 걷어찼다.
“저쪽에서 별말도 안 했는데, 네가 나서서 나를 욕할 게 뭐냐? 네가 바로 개로구나!”
걷어차인 내시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더니 얼른 웃어 보이며 굽실거렸다. 진안 군왕 덕에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영문도 모른 채 불안에 떨던 금가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섰다. 정교랑이 손을 닦은 손수건을 돌려주자 반근도 금가아를 따라 물러났다. 시녀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정교랑이 자리에 앉도록 부축해 주었다.
진단랑은 급작스럽게 긴박해졌다가 풀어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여종이 손을 꼼꼼하게 닦아주자, 진단랑은 방석 위에 앉아 곧바로 찬합에서 쌀떡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진안 군왕도 자연스럽게 다가와 연못 난간에 기대어 물속의 잉어를 구경했다.
“진씨 가문과는 친척 사이예요?”
“난 정씨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씨라……. 진안 군왕은 나지막이 읊조리더니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곧 웃음을 터트리며 정교랑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 그 정 낭자가 바로 그쪽이었군요!”
길에서 만났을 때 남쪽에서 오는 길이었고, 진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였다. 가는 길이 급하지 않았다면 밤길을 재촉하지도 않았겠지. 시간을 셈해 보면, 진씨 가문이 그 저택을 팔았던 시점도…….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의술로 이 태의를 궁으로 숨어들게 했던 그 정 낭자가 바로 이 여인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