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63
교랑의경 163화
달빛이 드리워질 때쯤, 서무수, 범강림과 서봉추는 옥대교 저택 안에 앉아 있었다.
“무뢰배들이 어딜 감히!”
이야기를 들은 시녀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씨, 제가 지금 당장 가서 노태야께 말씀 올릴게요.”
그런 시녀의 모습을 보고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무뢰배 따위로 장 노태야를 귀찮게 해선 안 되지.”
시녀는 이전에도 같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주육낭이 강제로 정교랑의 마차를 빼돌려 주씨 가문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다. 그때도 시녀는 장 노태야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했지만, 정교랑이 거절했다.
“필요 없어. 아직은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잖아.”
정교랑은 또 이렇게 말했었다.
“난 희망을, 남에게 거는 게, 내키지 않아. 그뿐이야.”
“더구나, 지금은 모든 게, 내 뜻대로 되고 있고.”
설마, 지금의 모든 것도 아씨의 뜻대로인 건가?
서무수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별일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그 인간들을 봐서는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아.”
범강림도 서무수의 말에 동의했다.
“잡배들이 구걸하러 온 거면 모르겠는데, 배후에 있는 자가 작심하고 꾸민 짓이라면 곤란하지.”
옆에 있던 서봉추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말이 착하면 탈것이 되고, 사람이 착하면 괴롭힘을 당하오. 아까 무뢰배들이 소란 피웠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때려죽였어야지! 내가 거기 있었으면 벌써 이 주먹으로 싹 다 죽여 버렸을 거요. 지금도 늦지 않았소. 우리가 그 몹쓸 놈들을 찾아내 혼쭐을 내주자고.”
서봉추는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다. 무뢰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다른 형제 한 명과 함께 장을 보러 갔었다. 태평거로 돌아온 뒤에야 이야기를 들은 서봉추는 제 손으로 그 몹쓸 것들을 패 죽이지 못했다며 분한 듯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헛소리하지 마라.”
서무수가 서봉추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이렇게 사리 분별을 못 해? 여기는 경성이다. 사람을 죽이면 관아로 끌려간다고. 가게를 망치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났어?”
서무수가 이번에 굳이 서봉추를 데려온 것도 그래서였다. 혹시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뢰배들이 찾아왔다가 서봉추와 마주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맞아요, 관아에 끌려가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치자 서봉추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씩씩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일곱째 오라버니가 한 말도 맞아요.”
서봉추가 고개를 번쩍 들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며 목청을 높였다.
“그렇지, 누이? 내가 한 말이 맞지? 그런 몹쓸 것들은 때려죽여야 해.”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때려죽여야죠.”
서봉추가 흥분해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풀이 죽은 모습을 했다.
“누이, 위로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어디 사람을 마음처럼 때려죽일 수 있겠나.”
정교랑이 그런 서봉추를 보며 웃었다.
“오라버니, 그럴 용기는 없나 봐요?”
사내대장부의 자존심이 걸린 질문에 서봉추가 고개를 번쩍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용기가 없긴 누가! 나 서봉추가 죽인 나쁜 놈들만 해도 여덟은 되는데, 고작 무뢰배 따위가 뭐라고!”
“그럼 죽여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하자, 서봉추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이, 진담이야?”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서봉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무수와 범강림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누이가 서봉추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나? 어쩌려고?
“일을 관아로 끌고 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죠.”
관아로 이 일을 끌고 가게 된다면, 다들 관부로 잡혀들어갈 것이다. 관부가 어떤 곳이고, 감옥은 또 어떤 곳인가? 그곳이라면 관리들 마음대로 일을 키울 수도 덮을 수도 있다.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허비하는 곳인데, 서무수 형제들은 그럴 시간도, 돈도 없었다.
하지만 일을 관아로 끌고 가지 않기 위해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이 좀 앞뒤가 안 맞는데?
서무수는 자신의 머리가 좀 모자란다고 생각했고, 범강림과 서봉추는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럼, 누이의 말은 아예 일을 키우자는 거야?”
서무수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살인은 동네 패싸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다.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공개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이잖아.
서무수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앞의 열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여인, 아니 소녀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단정한 자태, 조곤조곤한 투로 말하고 있는 정교랑의 행동과 표정에서는 한 치의 무례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입으로는 살인을 말하고 있다. 날씨가 어떤지 묻는 게 아니라! 살인!
서무수는 순간 자신이 처음으로 이 소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병상에서 깨어나 고맙다고 인사했던 때가 아니라, 다 죽어가던 어두운 밤이었다. 남들 눈에는 의식을 잃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이고 잘 들렸다. 어쩌면 죽기 직전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서무수는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칠흑처럼 새카만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통증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게 운명일 테지.
단지 병일 뿐,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닌데, 못 고치긴요.
죽어가는 그의 앞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던 여인의 쉰 목소리가 일순간 새카만 밤하늘을 가르는 듯했다.
서무수가 고개를 들자, 어두운 밤 등불에 비친 맑고 부드러운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한번 이야기해 봐, 누이.”
서무수는 회상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튿날 오후. 옥대교 저택의 마당은 조용했다. 정교랑은 여전히 낮에 잠시 눈을 붙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회랑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반근에게도 졸음이 몰려왔다.
반근이 하품을 하며 옆에 앉아 있는 시녀를 쳐다보았다. 시녀는 손에 바늘과 실을 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반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녀를 부르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똑똑 소리에 시녀는 화들짝 놀랐다.
“누구세요?”
시녀는 손에 있던 바늘과 실을 바닥에 떨구고, 문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나야, 반근.”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당 한쪽에서 뛰어나온 금가아는 이제 헷갈려 하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반근이 세 명 있고, 둘은 이 저택에, 하나는 다른 집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아씨께서는 주무셔?”
몸종이 회랑 아래에 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찬합을 두 사람에게 건넸다.
“간식 몇 개를 만들어서, 아씨께 가져다드리려고.”
이런 건 여기서도 만들 수 있는데. 반근이 웃으며 찬합을 건네받았다.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며칠 있다가 노태야를 따라서 먼 길을 나서거든. 그래서 핑곗김에 아씨 뵈러 왔어.”
몸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시녀가 갑자기 퍼뜩 고개를 들고 몸종에게 물었다.
“노태야께서 떠나신다고?”
시녀의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어디로? 며칠 뒤에 바로 떠나? 며칠 동안 가는 거야?”
몸종과 반근이 시녀를 쳐다봤다.
“응. 근데 언니, 무슨 일 있어?”
시녀가 침착한 척 다시 자세를 고쳐앉았다.
“아니야.”
시녀가 무언가를 숨기는 듯 대답하자 몸종과 반근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씨께선 아직 주무시는 것 같은데, 우리끼리 먼저 간식 좀 먹을까?”
몸종이 화제를 돌리려고 웃으면서 찬합을 열었다. 그새 반근이 차를 끓여와, 반근 세 명이 나란히 회랑 아래에 앉았다. 금가아도 함께 불러 넷이서 오붓하게 간식을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 왜 그래?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아직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듯한 시녀에게 몸종이 대놓고 물었다.
장 노태야께서 경성을 잠시 떠나있는 사이에, 아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어 저러는 건가? 노태야 외에는 기댈 곳이 없어서?
시녀가 주춤하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너희, 사람 죽이는 거, 본 적 있어?”
반근과 몸종이 시녀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반근이 고개를 가로젓고 이어 몸종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멈칫했다. 얼굴에 공포감이 서렸다.
사람을 죽인다니……. 마른하늘에 갑자기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몸종은 순간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하늘에서 벼락이 한 번 내리치자, 몸종의 눈앞에 있던 두 사람이 불덩이가 되어 고통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몸종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악 내지르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갑자기 내지른 비명에 반근과 시녀까지 덩달아 비명을 지르면서 회랑 아래서 꽁꽁 부둥켜안았다.
“무슨 일이야?”
천둥소리가 지나가고, 정교랑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반근 셋이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자, 머리도 묶지 않은 채 겉옷만 대충 걸친 차림의 정교랑이 태연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천둥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마당도 다시 조용해져서 대나무 통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놀라서 바닥에 자빠져있던 금가아가 몸을 일으키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는 바닥에 나뒹구는 간식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슨 천둥소리에 그렇게들 놀라!”
소년은 비명 소리에 놀라 자빠진 자신의 모습이 창피해서 더욱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먹구름이 몰려와 초저녁쯤이면 비가 올 것 같았다.
“밤은 되어야 비가 올 거야.”
정교랑이 돌아가려는 몸종에게 말했다.
“아씨, 놀라셨죠. 죄송해요.”
몸종이 자책하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시녀도 겸연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반근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니까. 천둥 번개 같은 건 무서운 것도 아니지.”
반근이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괜찮아, 이미 깨어 있었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인사를 올렸다.
“제가 배웅하러 갔다 올게요.”
시녀가 먼저 말하자 반근은 멈칫했다. 문 앞까지 배웅하는 일은 원래 내가 하는 일인데. 반근은 층계를 내려가는 시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씨, 제가 서재를 정리해 두었어요. 글씨 쓰러 가시겠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몸종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언니, 그만 나와. 어서 들어가 봐.”
몸종이 웃으면서 말하자, 시녀가 몸종의 손을 잡으며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며칠씩이나 경성을 비우는 거야?”
또 같은 질문이네. 몸종은 의아한 듯 시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니,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시녀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라니까.”
시녀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노태야께서 경성에 계시면 아씨도 기댈 곳이 있으니 좋잖아. 가업은 점점 더 커져 가는데, 아씨의 친족들은 썩 믿을 만한 사람들이 못 되니까.”
시녀의 말에 몸종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친족이 못 미더우면 또 어때? 도관에서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한들 또 어떻고?
“겁내지 마.”
몸종이 시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씨의 말만 잘 들으면 돼. 그럼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어.”
시녀가 몸종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언니, 사람 죽이는 거 본 적 있지?”
몸종이 어린아이도 아닌데, 천둥소리 따위에 그리 새파랗게 질릴 리가. 반근의 말처럼,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는 법이다.
“죄를 지은 사람을 하늘이 벌하는 건 본 적 있어.”
몸종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