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75
교랑의경 175화
“어머니, 그 애는…….”
주육낭이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주 부인이 말을 끊었다.
“그 애가 바보든 아니든 우리가 그 애를 맡아야 해.”
주 부인은 앞에 있는 서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 부친도 단단히 화가 나셨어. 정씨 가문 사람들이 참으로 뻔뻔하더구나. 네 고모의 혼수가 탐나 그 애를 아무한테나 시집보내려고 한다.”
아들은 여전히 잠자코 앉아 있었다. 자신의 말에 분노하며 길길이 날뛰기는커녕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그 바보한테 정이 깊다면, 이런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
“어머니,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주육낭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점포에 와서 소란 좀 피웠다고 아예 깔끔하게 죽여 없애는 사람인데, 감히 본인을 건드렸다간…….
주육낭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을 너무 쉽게 죽이는데.
“육낭.”
주 부인의 부름에 주육낭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모친의 눈빛이 보였다.
“아버지께 그 사람들이랑 그만 싸우라고 하십시오. 혼수를 탐낸다면 내버려 두세요. 우린 사람한테나 잘해 주면 됩니다.”
주 부인은 마음이 놓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네 아버지도 아실 거야. 그만 물러가거라.”
주육낭이 물러갔다.
“노야께 회신을 보내야겠다.”
여종이 팔걸이 책상을 옮기자 몸종이 붓을 들었다.
“우선, 육낭의 사주단자부터 써라.”
몸종이 팔을 움찔하는 바람에 먹물이 떨어져 종이에 얼룩이 생겼다. 여종도 놀란 얼굴로 주 부인을 쳐다봤다.
“부인! 안 되는 일이옵니다!”
“괜찮다. 일단 정씨 가문의 그 뻔뻔한 바보들부터 달래야지. 혼사가 성사되고 말고는 우리한테 달렸고.”
“그래도, 그래도 소문이 새어 나가면 육공자께 안 좋아요.”
여종이 말렸다.
“안 좋을 게 뭐 있누. 모질고 뻔뻔한 부친의 손에서 외조카를 구하려고 외숙부가 갖은 수를 쓰는 건데. 소문이 새어 나가도 다들 우리 편을 들걸.”
그렇다. 혼처는 그다음에 천천히 찾으면 된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도 아니고 도리에 어긋나는 혼사도 아니다. 나중에 적당히 핑계를 찾아 둘러대면 된다. 병이 났다고 해도 되고, 띠가 맞지 않아 상극인 팔자니 도사가 혼인은 절대 안 된다 했다고 해도 된다. 무슨 말인들 못 지어낼까. 그다음엔 그 바보를 고향 섬주로 보내 평생 돌보면 될 일이다.
“노야께 말씀 올리거라. 어쨌든 우린 두려울 게 없고, 관아에 가서 심문을 받는대도 당당하다고. 정씨 가문에서 당초 교랑을 익사시켜 죽이려 한 일을 잊지 마시라고 해. 그 도관에 가서 물어봐도 마찬가지다. 사계절 내내 쌀값을 공양한 게 누군데!”
주 부인은 눈썹을 치켜떴다.
“아버지입네 하고 우리 주씨 가문의 혼수에 눈독을 들이나 본데, 그리 쉽지는 않을 게야!”
주육낭은 마당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지난번에 현묘관 간식을 보냈는데 알아들었나 모르겠네. 그런 생각이 들자 코웃음이 나왔다. 그 여인이 얼마나 교활한데, 모를 리가 없지!
“말을 준비해라!”
주육낭은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치면서 성큼성큼 문을 나섰다.
“왜 또 왔어요! 우리 아씨 주무신다고요!”
옥대교 저택. 금가아가 손으로 대문을 밀며 말했다.
“자긴 뭘 자!”
주육낭은 호통을 치며 대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에 시녀와 반근이 모두 뛰어나왔다.
“왜 또 왔어요?”
시녀는 손을 허리춤에 대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내 간식이 입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물어보러 왔다!”
주육낭 역시 불쾌하게 대꾸했다.
거 핑계 하고는!
“관아에 발고할 거예요.”
시녀가 소리쳤다.
“괜찮아. 물어보러 왔다니, 대답해 줘야지.”
안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가 고개를 돌리자 언제 나왔는지 정교랑이 벌써 대청에 꿇어앉아 천천히 빗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육낭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회랑 아래에 선 채, 안에 있는 정교랑을 쳐다봤다.
“네 부친이 네 혼사를 정하셨다.”
주육낭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 말에 시녀와 반근은 대경실색했다.
“그쪽 아버지는요?”
정교랑은 표정 변화 없이 손에 든 빗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주씨 가문에서 정씨 가문의 결정을 절대 윤허하지 않으리라는 뜻일 터였다.
“아버지께선 아직 마땅한 혼처를 못 찾으셨어.”
주육낭이 굳은 얼굴로 대꾸하자 정교랑이 말했다.
“곧 찾으실 것 같네요.”
언제, 무슨 말을 하든 주육낭은 정교랑이 자신을 비아냥거리고 비웃는 듯 느껴졌다. 진십삼은 주육낭의 환각일 뿐이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했지만, 들어 보란 말이다. 분명 비아냥거리며 비웃고 있다! 주씨 가문에서 자신을 욕심내기라도 한다는 듯이!
“우리가 괜히 오지랖을 부려서, 네 잘난 아버지가 구한 좋은 인연을 망칠지 모르겠다.”
주육낭은 냉소한 후 옷소매를 뿌리치며 휙 뒤돌아 가 버렸다.
대문에서 쾅 소리가 나자 마당에 있던 시녀와 반근, 금가아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여간 저 자식은 멀쩡할 때가 없다니까. 시녀는 상대하지 않고 금가아에게 문을 닫으라고 한 후 정교랑 앞으로 가 앉았다.
“아씨, 어쩌죠?”
시녀는 초조하게 물었지만 정교랑은 여전히 빗질만 하고 있었다.
“뭘 어떡해?”
“아휴, 아씨의 혼사요.”
시녀는 초조하게 고개를 돌려 대문 쪽을 쳐다봤다.
“어느 댁인지 묻는 것도 깜빡했네요.”
“괜찮아. 서두를 것 없어. 언젠가는 말해 주게 돼 있어.”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지금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아씨, 아씨는, 초조하지 않으세요?”
시녀가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정교랑의 얼굴에서는 시녀와 같은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어쩌면, 본디 감정이라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정교랑이 어마어마한 혼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시녀도 알았다. 여인이 혼수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시집갈 때 든든한 자본이 된다. 하지만 정교랑 본인에게 결함이 있다 보니 혼수가 화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재주가 뛰어나면 도리어 시샘을 받아 화를 입는 법, 특히 바보였던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시집가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틀림없이 정씨 가문에서 혼수를 노려 술수를 부리는 게지.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중매인의 말과 부모의 명으로 이루어지는 법인데, 이를 어쩐다?
정교랑은 반근에게 머리를 묶어 달라는 뜻을 전하고, 시녀를 쳐다봤다.
“초조할 게 뭐 있어.”
시녀는 멈칫했다.
“아씨, 아씨는, 화도 안 나세요? 노야께서 혼처를 구하신다잖아요.”
시녀가 물었다. 시녀는 ‘노야’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실었다. 어릴 때 자식을 버린 부친이 자식을 위해 진심으로 좋은 혼처를 구해 줄 리가.
“당연한 일 아니야?”
정교랑이 눈을 찡긋하며 시녀를 보고 물었다. 정교랑과 시녀의 눈이 마주쳤다.
하긴. 혼인은 인륜지대사니 부모의 명을 따라야 하지.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달리 무슨 수가 있겠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당연한 일이니 초조한 거죠. 만에 하나 이상한 사람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시녀가 한숨을 쉬자 정교랑은 시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좋을지 나쁠지 어떻게 알아?”
뒤에서 정교랑의 긴 흑발을 빗어 위로 올리고 은빗을 꽂던 반근 역시 그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지? 부친은 떠나고 도관엔 불이 났다.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외로운 처지의 소녀와 힘없는 몸종이 어떻게 살았던가. 어찌어찌 지내다 보니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에게 멸시를 받고 도관으로 쫓겨나며 잊혀졌지만, 또 어떻게 살았던가. 어찌어찌 지내다 보니 경성으로 왔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어떻게 살지 어떻게 지낼지, 전부 아씨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아씨가 지금껏 딱히 좋은 날을 보낸 적도 없지 않은가. 혼인 따위야 생각해 보면 딱히 대수로울 것도 없다.
“그럼 아씨, 소인이 노야께서 구한 혼처가 어딘지 알아볼까요?”
시녀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 눈치였다.
“급할 것 없어.”
정교랑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 노야와 주 노야가 고르고 나서, 물어도 늦지 않아.”
시녀는 한숨을 토하고 바로 앉았다. 무사태평한 표정의 정교랑과 반근을 보니 실소가 나왔다.
“어쩐지, 그래서 우리 이름을 전부 반근이라고 지으셨군요.”
시녀가 웃었다. 이번에는 반근이 알아듣지 못했다.
“어째서인데?”
반근이 마지막 남은 정교랑의 머리칼을 묶으며 물었다.
“반근 넌 똑똑하고, 우린 너무 아둔하니까. 반근한테 배우라는 뜻으로 지으신 거지.”
반근은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반근 언니, 또 농담을 하네.”
“농담하는 거 아냐. 전에는 내가 꽤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다들 그렇다고 했거든. 근데 아씨를 모시면 모실수록 점점 내가 아둔하단 생각이 들어. 갑자기 이해가 안 가는 일이 너무 많아.”
“그럼 생각하지 마.”
반근은 정교랑의 덧옷을 정돈해 주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시녀를 보며 웃었다.
“머리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생각을 안 한다는 게 가능해?”
시녀가 한숨을 쉬었다. 정교랑이 책을 집어 들었기에 두 사람은 자리에서 물러나 회랑으로 나왔다. 마당에 있던 금가아가 시녀의 말에 헤헤 웃었다.
“그럼 물어봐.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지.”
금가아의 말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르는 건 물어보고 이해해야지.”
시녀가 반근을 잡아끌며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귓가에 쾅쾅 소리가 들렸다.
설마? 또 누가 왔나? 시녀가 고개를 돌렸다. 금가아 역시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쾅쾅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여기다, 여기.”
소년의 목소리였다. 시녀와 금가아가 쳐다보니 소년이 노을빛을 받으며 담벼락 위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너희 아씨 계시냐?”
소년은 담벼락을 붙잡고 웃음을 지었다.
또 저 사람이네!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계세요.”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짓말을 할 거면 좀 그럴듯하게 해라. 방금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집에 없을 수가 있나.”
“댁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그쪽은 손님도 아니고요.”
시녀는 씩씩거리며 퉤 하며 침을 뱉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엄연히 이 집을 찾아온 손님이야.”
진안 군왕이 목청을 높였다.
“단지, 문으로 드나들기 불편할 뿐이지.”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여 뒤쪽을 보며 눈짓을 했다. 쾅쾅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이것 봐라, 문도 두드렸잖아.”
시녀가 막 대청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정교랑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씨, 또 그 사람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웃었다.
“궁금해서 왔어요. 내가 준 간식, 먹을 만하죠?”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뭔 날이야? 경성의 인삿말이 언제부터 간식 얘기로 바뀌었어?
“괜찮았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입에 맞는 거예요? 또 가져다줄게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뭔지 알겠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냥 간식이니까요. 확실히,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긴 하죠.”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교랑을 보고 또다시 웃었다.
“아, 방금 그 소년이랑 관계가 어떻게 돼요?”
아니, 이 호색한이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아는 사이야? 뻔뻔하게 그건 왜 물어!
시녀가 눈을 부라렸다.
“외숙부님 집안의 오라버니예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니까 화난 것 같던데, 싸웠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시녀는 그 말에 또다시 눈을 부라렸다.
“아니요. 알려 줄 일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일인데요?”
진안 군왕은 담벼락 위에 팔을 걸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혼담이요.”
정교랑의 대답에 시녀는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아는 사이야? 어떻게 있는 그대로 대답하지?
“그래요? 어느 가문인데요?”
진안 군왕은 담벼락을 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빛을 반짝였다.
“아직 몰라요. 어느 가문으로 정해졌는지.”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은 하하 웃었다.
“대단하네요. 혼담을 넣는 가문이 많은가 봐요.”
“혼기가 찼을 뿐이죠.”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렇진 않아요. 나도 혼기가 찼지만 난 없거든요.”
소년은 자기 얘기를 하며 웃었다. 이번 웃음은 이전의 명랑한 웃음과 달랐다. 부드러운 웃음이었지만 소년의 말과 더해지자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