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08
교랑의경 208화
날이 밝자, 조회를 마치고 돌아온 진소는 부인의 말에 옷을 갈아입던 손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부인을 쳐다봤다.
“농담하는 게 아니고?”
“농담 아니래요. 이제 막 나온 이야기긴 하지만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진소가 찻잔을 들고 읊조렸다.
“왜요?”
늘 정 낭자를 좋게 봐 온 남편인지라, 진 부인은 남편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남의 일일 때는 상관없지만, 막상 자신과 관련된 일이 된다면 다르다는 건가?
“정 낭자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오.”
진소가 서둘러 덧붙이고는 잠시 고민했다.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소.”
“뭐가 적합하지 않은데요? 정 낭자는 어릴 적 병에 걸리기도 했고, 모친을 잃은 데다 집안이 썩 훌륭한 건 아니라지만, 넷째 동서네는 관직에 나간 것도 아니고 십육도 적장자가 아니잖아요. 고향 논밭을 지키며 평온히 살면 좋을 텐데, 누가 비웃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진 부인이 썩 내키지 않은 말투로 말하자 진소가 허허 웃었다.
“내 말은, 낭자가 원치 않을 것 같단 뜻이오.”
진 부인은 예상치 못한 말에 멈칫했다.
“정 낭자가, 원치 않는다고요?”
가만있자, 아까 했던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낭자는 전에 병에 걸렸고 모친을 잃은 맏딸에다 집안도 보잘것없는 처지다. 거기에 대면 십육은 적장자가 아니니 가문을 위해 분주히 움직일 필요도 없고, 논밭을 지키며 평온히 살 수 있는데, 뭐가 어때서 원치 않는단 거야?
진소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부인을 쳐다봤다.
“아마 그래서일 거요.”
그래서라니? 진씨 가문에서 낭자를 깔보고 이 혼사로 시혜를 베푼다고 여겨서? 말도 안 되지!
“동서는 좋은 뜻에서 혼담을 꺼낸 거예요.”
진 부인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기왕 동서가 말을 꺼냈으니, 우리가 한번 물어볼 순 있잖아요. 우리 추측만으로 혼사를 거절하기에는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네요.”
진소는 생각에 잠겨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진소가 정 낭자를 유심히 지켜본 것은 사실이었다. 정교랑이 여인이 아니라 사내의 몸이었다면, 부인이 먼저 나서기 전에 자신이 벌써 움직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집에 있는 또래의 여식들을 죽 늘어놓고 살폈겠지.
명석한 데다 뛰어난 의술까지 가진 사내였다면, 사윗감으로 눈독을 들이는 이가 많았을 것이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가 있어 혼담을 넣었다고 하면 훌륭한 미담으로 남았겠지. 하지만 여인의 몸이라면,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좋소.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혼자 넘겨짚지 않겠소. 내 가서 물어보리다.”
남편도 결국 동의하자 진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를 여읜 데다 아버지는 아이를 내팽개치고 몇 년이나 방치했다는 게 맘에 걸리네요. 다행히 외숙이 있긴 한데, 그 외숙이란 자도 썩…….”
진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혼담을 넣으려면, 그 집안사람 중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까요?”
혼례는 인륜지대사인지라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라야만 했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했다. 진소가 다시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부인, 별걱정을 다 하는구려. 당연히 낭자 본인한테 물어봐야지. 혹 낭자가 다른 이에게 결정권을 주겠다 하면, 그 결정을 따르면 될 일이오.”
날이 서서히 밝아올 무렵, 태평거 부엌에서 탁탁탁 채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부방 사람들만 깨어 있고, 식당의 다른 사람들은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이대작이 오른손으로 수건을 들어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았다. 이대작은 도마 위에 놓인 채소를 응시하며 왼손으로 물을 한 사발 들이켠 다음 다시 오른손으로 도마 위의 채소를 붙잡고 왼손으로 칼을 들어 채를 썰기 시작했다.
해가 뜨자 식당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을 시작했다. 조수들이 부엌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이대작은 칼질을 멈췄다.
“형님, 벌써 채를 다 썰어 두신 거예요? 이러면 우리가 할 일이 없잖아요.”
“이런 일이 나한텐 딱이야. 채소만 몇 개 썰었을 뿐이지, 어차피 고기는 자네들이 썰어야 하잖나.”
아무도 없을 때 해야 남들한테 걸리적거리지 않기도 하고.
분주해진 부엌을 보며 밖으로 나간 이대작은 잠시 쉬면서 왼손에 호두 두 알을 쥐고 굴리기 시작했다.
“대작 형님.”
손재가 다가와 쭈그려 앉더니 이대작을 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오른손으로 굴리지 않고요? 오른손을 단련해야 빨리 회복되잖아요.”
이대작은 호두를 굴리며 허허 웃었다.
“내 오른손은 예전만큼 회복될 수 없어. 채소나 고기를 누르고, 솥이나 그릇을 들 수 있는 정도면 돼. 괜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건 깔끔하게 버리려고. 대신 온 마음을 다해서 왼손을 단련할 거야. 난 워낙 남들보다 더딘 사람이니 다시 처음부터 하려면 온 정성을 쏟아야 해.”
손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형님. 예전엔 형님을 무시했는데, 이제 보니 호걸이군요.”
“호걸은 무슨.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이대작이 웃어 보였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굳이 호걸이 될 필요 있나?”
손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저도 먹고사는 걱정만 없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고 싶다니까요.”
손재가 헤헤 웃자 이대작도 호탕하게 웃었다.
“재수 없는 소리 좀 그만해. 난 가서 칼질 연습이나 더 해야겠다.”
이대작이 몸을 일으켰다.
“저도 간수를 치러 갈 때가 됐네요.”
두 사람은 웃으면서 각자 부엌과 두부방으로 향했다. 뒷마당에는 이제 막 장을 보고 돌아온 마차와 두부를 옮기는 마차 여러 대가 있었지만, 어수선하게 뒤엉키지 않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같은 시각, 경성의 신선거에서는 문패와 편액을 떼어내고 있었다.
“여기 또 새로 열어요?”
지나가던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주인도 바뀌었고 일손도 준비되었으니, 앞으로 많이들 찾아 주세요.”
오 관리인이 문 앞에 서서 미소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과로신선만 팔 거요?”
어떤 행인의 물음에 오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과로신선만 팝니다.”
“과로신선은 낙득자재보다 맛도 없고, 비싸기만 하던데요.”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듯 외쳤지만 오 관리인은 개의치 않고 계속 눈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신선에게는 신선만의 장점이 있는 것처럼, 각자가 가진 색다름이 있지요. 한 가지 맛만 먹으면 무슨 재미입니까. 다들 오셔서 한번 드셔 보세요”
관리인은 온화한 태도였지만,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자부심이 드러나 도리어 호감을 샀다.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하러 오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한편 이춘당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가 신의 낭자가 진료하는 곳 맞아요?”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고 물어보자 점원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원칙은 그대로예요. 방문 진료는 하지 않고, 죽을병이 아닐 경우 치료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던졌던 이는 그 대답에 더욱 기뻐하면서 목을 쭉 빼고 안쪽을 살피려고 했다.
“정 낭자는 지금 안 계세요. 치료 받을 사람을 데려오면 저희가 바로 모셔 오겠습니다.”
점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정 낭자가 직접 만든 약도 팔고 있긴 해요.”
상대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그게 무슨 약이오?”
점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문을 밀고 들어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약 어딨소? 정 낭자가 만든 약을 내가 다 사겠소!”
뭐에다 쓰는 약인지도 모르면서 다 사겠다고? 앞서 물었던 사람이 아직 넋을 놓고 있던 사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 낭자의 약이라고?”
“내가 다 사겠소! 다 줘요, 다!”
“거, 시끄럽게 소리 좀 지르지 마시오. 내가 먼저 왔잖소!”
“먼저 온 게 대수요? 돈을 먼저 내는 사람이 우선이지.”
이춘당으로 잔뜩 몰린 사람들의 모습에 주위 다른 약포들은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다.
“신의가 있어 좋겠구먼. 이춘당이 예전엔 저리 문전성시를 이루지 않았는데.”
“그 신의라는 사람이 죽을병 아니면 치료하지 않겠다 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우린 벌써 길바닥에 나앉았을 거야.”
말을 끌며 걸어오던 왕십칠은 약방 앞에 몰려있는 인파를 보고 쯧쯧거리며 눈을 흘겼다.
“저거 봐라, 저거 봐. 저런 게 바로 경성이지.”
왕십칠은 몸을 빼고 약방을 흘깃 쳐다봤다.
“약 하나 사는 일에도 저렇게 앞을 다투어야 하다니.”
왕십칠을 따라 힐끔 쳐다보던 정사낭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정사낭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왕십칠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어디 가는 거야? 주씨 저택은 이쪽 길로 가야 해.”
“급할 게 뭐 있다고. 먼저 덕승루부터 가봐야겠어. 모처럼 경성까지 왔는데, 세상 구경 한번 제대로 하고 가야지.”
정사낭이 초조해하며 물었다.
“거기 가서 뭐 하려고? 누이를 데려가려던 거 아니었어?”
“급할 거 없잖아. 어차피 네 누이는 외조모 댁에 얌전히 있을 텐데.”
간신히 인파를 뚫고 나온 왕십칠이 말에 올라탔다.
“며칠 지나고 데리러 가면 그만인 것을. 난 일단 주 낭자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야겠어.”
가지지 못한 미인이 더 중하지.
말을 달려 유유히 사라져 가는 왕십칠의 모습에 정사낭은 초조한 마음에 부아가 치밀었다. 정사낭도 서둘러 말을 타고 왕십칠을 쫓아가려는데, 옆에 있던 사환이 갑자기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왜 그래?”
정사낭의 물음에도 사환은 멍하니 한 방향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금가아를 본 것 같아서요.”
사환은 경성으로 출발하기 전, 춘란 누나가 몇 번이고 당부했던 일이 생각났다. 금가아에게 안부를 전하고 잘 지내는지 물어봐달라고. 가능하다면 공자님께 부탁해 금가아를 데려와 달라고.
“금가아?”
정사낭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어디?”
거리는 행인과 마차들로 빈틈없이 메워져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잘못 본 걸지도 몰라요.
사환이 중얼거렸다. 정사낭운 고개를 내젓고는 서환을 내버려 둔 채 서둘러 왕십칠을 쫓아갔다.
금가아는 마차 앞에 앉아 신나게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았다.
“아니지, 아니지. 말을 그렇게 부리면 안 돼, 금가아.”
옆에 앉은 마부의 지적에 금가아는 혀를 날름거리고는 마부의 동작을 지켜봤다.
마차는 저택 앞에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린 정교랑이 바짝 뒤따라오던 마차를 쳐다보자, 진 공자가 마차 안에서 정교랑을 향해 공수의 예를 올렸다.
“덕분에 관부의 술을 팔 수 있게 되었네요. 고마워요.”
정교랑이 말했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진 공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정교랑도 미소를 지었다.
“아닐걸요. 내가 다리를 고쳐주게 하려고, 당연한 일이라 말하는 거잖아요.”
진 공자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건, 낭자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낭자가 기뻐하면 된 거죠.”
다시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되찾은 진 공자는 화를 내는 대신 웃음을 보였다.
“내가 아직 덜 기쁘다면요? 다리를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데요?”
정교랑이 진 공자를 빤히 보며 묻자 진 공자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낭자의 기분을 따라야죠.”
“그럼, 내 기분이 좋아진 뒤에 다시 얘기해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금가아가 문을 달칵 잠그는 소리가 났다. 문밖에 혼자 남겨진 진 공자는 마차 안에서 미소를 지은 채 다소 굳은 얼굴로 있다가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 막 출발하려던 찰나, 마차 한 대가 오더니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멈추어 선 마차 안에서 진소 부인이 내리자, 진 공자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대문을 다시 연 금가아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성에서 정교랑과 왕래가 가장 잦은 가문을 꼽으라면 단연 진씨 가문이었다. 하지만 진십팔랑이나 아랫것들만 저택을 자주 찾았을 뿐, 안주인인 진 부인이 직접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