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20
교랑의경 220화
햇살 아래 비친 소녀의 맑은 얼굴은 솜털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서무수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놓고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당황하여 어찌나 서둘렀는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실례했네, 실례.”
서무수가 다급하게 말하자 정교랑이 싱긋 웃었다.
“내가 실례한 거죠.”
정교랑의 가벼운 말에 서무수도 그제야 미소지었다.
“천천히 하면 돼. 누이가 벌써 오두(五斗,) 육두(六斗)짜리 활을 들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과 시녀는 신선거에서 식사를 마친 뒤, 오 관리인과 서무수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손님들도 떠날 시간이라 다들 밖으로 나가는데 누군가가 신선거 안으로 허겁지겁 걸어 들어왔다.
급히 들어온 젊은 여인은 몸종 하나와 고개를 푹 숙인 채 졸래졸래 따라오는 사환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서무수와 오 관리인이 재빨리 옆으로 길을 비켜 줬지만, 그들 앞까지 오기도 전에 어느 별실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젊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시치미를 왜 떼요? 무슨 돈이 있다고 당신이 여기 와서 밥을 먹어요?”
여인은 사내를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뜨고 바락거리며 화를 냈다.
“나, 나도 이렇게 비싼 곳일 줄은 몰랐지.”
사내가 풀이 죽은 듯 조용히 말했다.
“남한테 부탁하는 자리이니 체면 좀 차리려던 건데…….”
“당신 체면만 체면이에요? 이제 나는 무슨 낯짝으로 아버지를 뵙겠어요. 당신 돈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겁도 없이 써요?”
부아가 치민 여인이 언성을 높이자 사내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사내는 한쪽에 서 있는 서무수와 오 관리인을 흘깃 쳐다보고는 더욱 곤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소리치지 말고,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사내가 조용히 여인을 타이르듯 말하자 여인도 그제야 서무수 쪽을 쓱 보고는 별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무수와 오 관리인이 다시 대문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별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서 오라버니?”
긴가민가하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서무수는 일순간 몸이 얼어버린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무수 오라버니 맞죠?”
여인이 별실 밖으로 한 걸음 나오며 재차 물었다. 사내가 여인의 뒤를 따라 나오면서 언짢은 표정으로 여인을 제지했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마시오. 잘못 본 거겠지.”
사내가 서무수의 뒷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랬구나.
정교랑이 서무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은 서무수가 좀 전에 고개를 살짝 돌리며 무심코 입을 틀어막으려는 듯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댄 것을 눈치챘다.
서무수는 몸을 돌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젊은 부부를 바라보았다.
“향(向) 아우, 너희였구나.”
“서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였네요!”
사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인 쪽에서 흥분한 표정으로 거의 뛰다시피 서무수 쪽으로 다가왔다.
“언제 경성에 왔어요? 왜 날 찾지 않고?”
여인이 연달아 묻는 통에 오 관리인은 헛기침을 하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시녀도 웃는 얼굴로 서무수와 여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제 막 왔어, 이제 막.”
서무수가 대답하면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별실 앞에 서 있는 사내를 흘깃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만나네. 안 그래도 두 사람을 찾으려고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정말 서 형님이 맞았군요.”
사내도 놀란 듯 이제야 웃음을 보이며 잰걸음으로 다가와 서무수의 팔을 잡았다.
“형님이 경성엔 어쩐 일입니까? 집으로 찾아오지 그랬어요.”
사내가 가볍게 탓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게요, 그러게요.”
여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전히 반짝이는 눈빛으로 서무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인의 얼굴이 점점 더 상기되더니 갑자기 멈칫했다.
“서 오라버니, 예전보다 많이 야윈 것 같아요. 서북 생활이 너무 고되어서 그런 거죠? 그럼 가지 말고, 경성에서 지내요.”
시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려고 하자 반근이 시녀를 손으로 쿡 찔렀다. 서무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색해했다.
“뭐, 그렇지.”
서무수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너희, 너희는 여기 밥 먹으러 왔어?”
서무수의 말을 들은 사내가 웃었다.
“그럼 여길 밥 먹으러 오지, 뭐하러 오겠어요?”
사내의 표정이 금방 머쓱하게 변했다.
“아, 꼭 그렇지만은 않겠군요.”
사내는 서무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무수는 조금 전 정교랑과 활을 쏘느라 평범한 천으로 만든 옷으로 갈아입고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 신선거에서는 손님을 응대하는 이도 값비싼 옷을 입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서무수의 모습은 뒷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으로 보였다.
“여기서 일을 구한 겁니까?”
사내의 물음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형님 혼자예요? 강림 형님이랑 다른 형제들은요?”
사내가 다시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다들 경성에 있긴 한데 여기에는 없어.”
서무수가 대답했다.
“그런 건 나중에 물어봐요.”
여인은 사내가 시답잖은 말이나 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내를 휙 밀쳐내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서무수를 빤히 바라봤다.
“할 말 있으면 우리 집에 가서 해요. 아버지도 오라버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같이 집으로 가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서무수는 더욱 난감해했다.
“그래, 좋지. 바쁜 게 좀 정리되면 꼭 갈게.”
옆으로 밀쳐진 사내가 서무수를 보며 비아냥 섞인 말투로 말했다.
“형님이 바쁠 게 뭐 있습니까? 이런 잡일은 하나 마나지요. 일단 집으로 가는 게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버님께 부탁해서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오 관리인이 그 말을 듣다 못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젊은 부부는 그제야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들 눈에 오 관리인은 경성에서 흔히 보이는 돈 많은 노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선 정교랑을 본 부부는 흠칫 놀랐다.
열 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소녀가 바닥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없었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소녀였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조용히 제자리에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본 부부는 이 소녀가 명문가 출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화려하고 진귀한 옷감 때문일 수도 있고, 일부러 꾸미려 하지 않아도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고귀함 때문일 수도 있었다.
신선거에 식사하러 온 손님이겠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서무수를 쳐다보던 부부는 더욱 확신이 들었다.
손님도 못 하는 점원 처지인가 보네. 그럼 저 건장한 몸은 귀한 손님들이 마차에 오를 때 계단으로나 쓰이겠군.
“어서 가서 손님 모셔다드리고 와요. 우린 여기 있을게요.”
미안한 척하는 사내의 말투에는 어쩐지 우쭐함이 묻어났다.
서무수는 드디어 살았다는 마음으로 얼른 알겠다 답하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여인이 또다시 서무수를 불러세웠다.
“서 오라버니, 오라버니 같은 사내대장부가 어찌…….”
여인이 속상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오 관리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는 이런 잡일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는 오 관리인에게 돈주머니를 쥐여주며 말을 이었다.
“어르신,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오 관리인이 여인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서무수는 오 관리인의 말을 듣고는 더욱 난색을 내비쳤다.
“동 낭자, 이럴 필요 없어요.”
서무수는 오 관리인을 밖으로 떠밀면서 조용히 읊조렸다.
“괜히 장단 맞춰 주지 마시오.”
오 관리인은 웃음을 참으면서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교랑도 시녀를 데리고 오 관리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대문 문턱을 넘고서야 서무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 관리인은 그런 서무수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굳히고 명령조로 말했다.
“이 녀석아, 돈을 몇 푼 더 줄 테니, 어서 아씨를 마차에 태워 드려라.”
오 관리인의 장난에 서무수는 관리인을 노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뒤에 서 있던 시녀도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옛날 고향 집에서 알고 지내던 형제야.”
서무수가 정교랑과 오 관리인을 보며 설명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알고 지내던 낭자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마차에 올라탄 시녀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순간 서무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서무수가 곁눈질로 오 관리인을 쳐다봤더니 오 관리인도 웃고 있었다.
“제 생각에도 알고 지내던 낭자 같습니다만…….”
서무수의 시선을 느낀 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만 일하러 가시오. 이번 달 봉급은 필요 없다는 소리요?”
서무수가 얼굴을 굳히고 말하자 오 관리인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주인어른, 제 봉급은 월 단위로 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 관리인이 서무수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옆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옛사람을 보니 마음이 심란해져서 잊으셨나 봅니다.”
오 관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문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옛날에 알고 지내던 낭자…… 아니, 형제가 왔네요.”
다시 고개를 돌린 오 관리인은 웃으며 서무수를 향해 조용히 말하고는, 서무수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몇 걸음 비켜서며 자리를 떴다.
이보시게, 하며 관리인을 붙잡으려 걸음을 떼던 서무수는 곧이어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 오라버니.”
서무수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인과 사내가 보였다.
“가요. 우리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에요.”
여인이 서무수를 보며 말했다.
“나,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말이야. 다음에 갈게.”
서무수의 대답에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사내가 말했다.
“무슨 일이길래요. 셋째 형님. 우리끼리 서먹하게 이러지 맙시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향칠!”
문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서봉추가 문 안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이 자식!”
서봉추는 사내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는 씩씩대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서무수가 얼른 서봉추 앞으로 다가가 서봉추의 허리를 꽉 둘러 붙잡았다.
“옛날 일 꺼내 봤자 골칫거리만 생겨.”
서무수가 조용히 서봉추에게 읊조렸다.
요사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골칫거리라는 네 글자는 서봉추의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서봉추는 격렬한 기침을 해대고는 사내에게 하려던 말들을 간신히 삼켰다.
“봉추 아우, 아우도 여기 있었네?”
여인이 기뻐하면서 서봉추를 향해 외쳤다. 격렬한 기침을 해대던 서봉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여인을 향해 손짓했다.
“너무 잘됐다. 강림 오라버니랑 다른 형제들도 다 경성에 있댔지? 불러와서 다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
여인이 뒤에 있던 사내를 흘겨보고는 나무랐다.
“멍하니 서서 뭐해요? 얼른 가서 마차를 불러오지 않고.”
“아니야. 우리가 지금 다들 바빠서, 다음에 시간 날 때 보러 갈게.”
서봉추가 쉰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말했다. 여인은 서무수 형제와 사내를 번갈아 보고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서 오라버니는 아직도 우리랑 서먹한 거죠?”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돌렸다.
“오라버니 형제를 보고는 너무 기뻐서 그만…… 실례했다면 부디,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동 낭자, 그런 게 아니야. 혹시 낭자한테 폐를 끼칠까 봐 그런 거지.”
서무수의 말에 여인은 다시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몸을 돌려 서무수 쪽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폐를 끼치긴요. 역시 서 오라버니가 날 서먹하게 대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서무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곁눈질로 뒤에 서 있는 사내를 흘깃 쳐다보았다. 사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조용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