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59
교랑의경 259화
마지막 노을빛이 사라지자, 어둠이 대지를 덮었다. 주육낭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뜨고 있는 둥그런 달을 올려다보았다.
“경성의 중추절은 볼거리가 많은데, 이쪽은 어떨지 모르겠소.”
관리와 군관들이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경성의 중추가 시끌벅적하긴 하지. 그 여인도 꽃등 구경을 나가겠지?
아, 아닐 수도 있겠군. 그 여인은 성격이 괴팍하여 사람이 북적거리는 걸 싫어했었잖아. 명절날인데, 뭘 하고 있으려나?
우리 집에는 오기 싫어할 텐데, 혼자 집에 가만히 있으려나?
“육낭, 가자.”
옆에서 누군가가 주육낭을 부르자, 주육낭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 뒤 말을 재촉해 뒤따라갔다. 밝아오는 달빛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달빛이 훤히 비추는 경성은 마치 인간 세상의 선경과도 같았다.
거리는 온통 꽃등으로 가득해 눈이 어지러웠다. 권문세가나 부잣집에서는 위상을 뽐낼 수 있는 거대한 등산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선덕문 위에 서서 보니, 화려한 경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등불로 반짝이는 경성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아름다웠다.
“형님, 형님.”
성루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진안 군왕을 이황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전하, 천천히 가세요.”
내시들은 행여나 이황자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외쳤다.
성루에는 황제 이외에도 후궁의 비빈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황실과 가깝게 지내는 정통 황족들과 조정 중신들, 시녀며 태감들까지 모두 성루에 모여 있어서인지 성루는 다소 비좁아 보였다.
진안 군왕은 멈추어 서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황자가 진안 군왕의 손을 잡고 가까이에 섰다.
“형님, 예쁘지요?”
알록달록한 어가의 꽃등과 멀리서 보이는 경성의 화려한 등불들을 보며, 이황자가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전부터 형님한테 오라고 했는데, 한 번도 안 오고 방에서 잠만 잤잖아요. 이제 좀 후회되죠?”
진안 군왕은 이황자를 향해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시 성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황자는 진안 군왕이 꽃등 놀이를 구경하는 것 같다가도, 등을 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님, 뭐 찾아요?”
이황자가 물었다.
어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천막은 얼추 삼사십 개 정도였다. 가까이에 있는 천막 자리는 잘 보이지만, 멀리 있는 천막은 불빛이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주씨 가문의 천막은 아마 제일 멀리 있겠지?
“우리도 아래로 내려가 꽃등 놀이를 할 수 있습니까?”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 질문에 태후가 직접 나서기도 전에 내시들이 극구 반대했다. 내시들은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하, 장난치시면 아니되옵니다!”
예상했던 바였는지 진안 군왕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자, 우리는 여기서 보죠.”
진안 군왕이 이황자의 손을 잡고 성루의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높이 서 있어도 진안 군왕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가에 있는 몇몇 사람은 이미 성루 아래로 가까이 와 있었지만, 진안 군왕이 찾는 건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정 낭자가 안 왔다고요?”
진소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그러게요.”
주 부인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 자리를 여기 잡아 준 데는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겠지. 아무렴 어때? 난 누릴 수 있는 걸 누리는 것뿐인데.
“그럼…….”
진소 부인이 또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찰나에 천막 밖에서 잠시 소란이 일더니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이 집 꽃등 정말 예쁘다. 들어가서 한번 볼까?”
진소 부인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천막 안으로 들어온 진(秦) 부인을 보며 미소지었다.
“어? 언니도 있었네요?”
진 부인은 진소 부인을 보자마자 부채를 흔들면서 웃었다. 진소 부인은 미소 띤 얼굴로 진 부인의 뒤에 서 있던 진십삼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크지 않은 천막에 갑자기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일순간 공간이 협소해졌다. 조그마한 천막에 진소 부인과 진 부인이 모두 모여 있자 그 모습을 본 다른 집 여인들도 다가와 기웃거렸다.
주씨 가문의 딸들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피해 천막 밖으로 나갔다. 주 부인은 이 성가신 상황을 불만스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정 낭자는요?”
진 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없대.”
주 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진소 부인이 먼저 웃으면서 말했다.
“어딜 갔대? 밖에서 꽃등 놀이를 하고 있나? 난 왜 못 봤지?”
진 부인이 뒤에 있던 진십삼을 살짝 밀치면서 말했다.
“가서 좀 불러오렴.”
이번엔 주 부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기 안 왔어요.”
진 부인과 진소 부인 모두 놀란 눈으로 진십삼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안 왔다고? 그럼 집에 있다는 게야?”
“아니요. 오늘 선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십삼이 여유롭게 말했다.
“누구랑?”
두 부인이 또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정혼자요.”
진십삼이 대답했다.
정혼자! 두 부인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진 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십삼!”
진십삼은 진 부인을 놀리는 것에 성공했다는 듯 눈썹을 꿈틀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이나 입을 열려 했지만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주 부인은 한쪽에서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조용히 들었다.
그냥 부인들에게 차나 우려 주는 게 나을 것 같네. 어차피 조카의 일은 나보다 남들이 더 잘 아니까.
“진작 알았으면서 왜 말을 안 했어?”
노여운 얼굴의 진 부인이 부채로 진십삼을 툭툭 치면서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어찌 어머니의 흥을 깰 수 있겠습니까.”
진십삼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흘겨보았다.
“며칠 동안 말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대? 이 어미의 흥을 깨려고 그렇게 벼르고 있었단 말이야?”
진십삼이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자가 억울합니다.”
진씨 모자는 주씨 가문의 천막을 나와 어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크고 작은 꽃등과 등산들이 한데 모여 화려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등불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진십삼은 짙은 남색 장포를 입고 허리춤에 옥대를 묶어두었다. 깔끔하게 묶어 올린 올림머리에 금색 장식을 한 진십삼은 반짝이는 등롱 사이에서 더욱 환하게 빛났다. 진십삼이 진 부인과 담소를 나누면서 싱긋 웃자, 더욱 준수해 보이는 그의 용모에 뭇 여인들이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으이구, 널 상대하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구나. 저리 가서 혼자 놀려무나.”
진 부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발 앞서 나가 걷고 있던 진소 부인을 따라갔다.
진십삼은 제자리에 서서 진 부인이 진소 부인에게 가까이 간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어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십삼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차츰 사라져 갔다. 진십삼은 어가의 끝자락에서 고개를 들어 저잣거리를 내다보았다.
저잣거리의 꽃등은 어가의 등롱만큼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꽃등이 잔뜩 모여 있다 보니 분위기는 더욱 흥겨웠다.
저 화려한 저잣거리는 미인과 함께 꽃등 놀이를 즐기기에 퍽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 그 여인도 저기서 꽃등 놀이를 하고 있겠지?
높은 곳에서 저잣거리를 내려다보면 은하수와 같은 아름다움을 구경할 수 있겠지만, 은하수 안에 섞여 즐기면 그 나름대로 또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밤하늘에선 수시로 불꽃이 팡팡 터졌다. 반근과 금가아는 불꽃이 터질 때마다 고개를 치켜들고 다른 이들과 어울려 연신 감탄을 해댔다.
“아무 데나 뛰어다니지 말고. 길 좀 봐. 앞에 사람도 잘 보고.”
시녀는 계속 잔소리를 하며 금방이라도 앞으로 돌진할 것 같은 금가아를 붙잡았다.
“매년 이맘때면 인신매매 장수가 사람을 납치해 가. 너 또 그러다 잡혀가지 말고!”
금가아가 얼굴을 붉히고 외쳤다.
“난 잡혀간 적 없어! 길을 잃은 거지!”
시녀와 반근이 웃음을 터트렸다.
“야. 좀 빨리빨리 와.”
앞서 걷고 있던 소년 공자가 고개를 돌리고 귀찮다는 듯이 외쳤다.
“서두르긴 뭘 서둘러요? 구경 나온 거 맞아요? 그냥 걸으러 온 건가?”
시녀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저 계집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네! 왕십칠의 주위에 있던 시종들은 눈을 크게 뜨고 시녀를 눈여겨보았다.
“여기 볼 게 뭐 있다고!”
왕십칠이 말하자 시녀가 즉시 반박했다.
“그럼 우리 아씨를 왜 여기로 데려오신 건데요?”
저 계집이! 왕십칠이 눈을 부릅떴다. 내 나중에 넌 필히 손봐 주마.
왕십칠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시녀와 정교랑 일행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앞쪽에 예쁜 게 많아. 곧 강물에 꽃등을 둥둥 떠내려 보내니까, 우리도 서둘러 가자고.”
왕십칠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왕씨 가문의 시종들은 저잣거리에 잔뜩 몰려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면서 간신히 길을 터 가며 앞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 양쪽으로는 거대한 등산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금빛 찬란한 것도 있고 알록달록한 것들도 있어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어 등산과 꽃등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시종이 왕십칠에게 정교랑 일행이 또 뒤처졌다고 알리자, 왕십칠은 화가 솟구쳤다.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왕십칠이 정교랑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홱 낚아챘다.
“빨리 가자고.”
고개를 들고 불꽃놀이에 붉게 물든 하늘을 감상하고 있던 정교랑은 왕십칠이 갑자기 팔을 세게 당기는 바람에 비틀거리다 걸음을 헛디딜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시녀는 화가 나서 고함을 빽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시녀가 정교랑을 잡고 있던 왕십칠의 손을 마구 때렸다.
“그러는 넌 뭘 하는 거냐!”
왕씨 가문의 시종이 시녀를 확 밀치고는 깔보는 태도로 호통을 쳤다.
“몹쓸 년! 감히 우리 도련님의 몸에 손을 대다니!”
반근과 금가아도 서둘러 정교랑을 에워쌌지만, 대여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인파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만 멈춰 서 있자 주위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내가 빨리 걸을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화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왕십칠은 정교랑의 팔에서 손을 떼고 으름장을 놓았다.
“너 내가 특별히 데리고 나와서 구경시켜 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 나 아니었으면,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네가 어디 볼 수나 있겠어?”
정교랑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맞아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올 생각도 없었을 거예요.”
“알면 됐어. 내 말 잘 듣고 내 성질 긁지 마.”
콧방귀를 뀌며 말하던 왕십칠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말을 덧붙였다.
“참. 그리고 말도 하지 마. 넌 가만히 있으면 예쁜데, 입만 열면 깨.”
정교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왕십칠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사 줄게.”
귀걸이 외에 아무런 장식도 하고 있지 않은 정교랑을 본 왕십칠은 선심 쓰듯이 말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정교랑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왕십칠의 뒤를 따랐다.
“서둘러.”
왕씨 가문의 시종들이 나지막이 소리치면서 정교랑의 시중을 드는 세 사람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흘겨보았다.
우리 왕씨 가문에 시집오길 원하는 여인네들이 얼마나 많은데, 네 바보 윗전은 오죽하겠냐. 너희가 윗전을 따라 우리 가문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면, 닭이나 개가 승천하는 것과 다름없지. 벼락출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