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58
교랑의경 258화
“생각이 났습니다.”
진십삼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정교랑을 향해 말했다. 마차에서 내린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8월 15일에, 같이 꽃등 보러 갈래요?”
진십삼의 제안은 신세를 갚는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고 가벼운 제안이었다. 정교랑은 진십삼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선약이 있어요.”
진십삼은 잠시 놀라나 싶더니 이내 미소지으며 물었다.
“선약이요? 진(陳)씨요, 주씨요?”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니에요. 정혼자와의 선약이에요.”
정혼자! 진십삼은 잠시 넋이 나갔다. 이렇게나 낯선 단어를 저 여인의 입에서 듣게 되다니.
“진짜로요?”
진십삼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정교랑은 이미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진십삼의 말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가짜일 게 뭐 있죠?”
가짜일 리가 뭐 있겠나. 젊은 남녀라면 누구나 혼례를 올려서 남편과 아내를 가지게 될 텐데. 다 생기기 마련이지.
진십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간 후 대문이 닫히는 걸 바라보았다.
정혼자라……. 당연히 진짜지. 그 왕씨 가문 공자. 내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있으니까, 가짜일 리가 없지.
진십삼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만인의 마음 하나 되니, 하나의 원수는 모두의 적이 되리. 충성과 의리는 무소의 뿔처럼 하늘을 찔러.”
진십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에 탄 진십삼의 몸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말 머리를 틀고 큰길가를 따라 말을 내달렸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어느덧 중추절이 되었다.
8월 15일, 경성의 경치는 정월 대보름 꽃등 축제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가가호호 각양각색의 꽃등을 준비하고 중추절이 되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진단랑이 마당의 꽃등 사이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유모도 진단랑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라갔다.
“어머니, 어머니.”
진소 부인은 대청에서 여종들과 함께 새로 만든 옷을 살펴보고 있었다. 뛰어오는 진단랑을 본 여종 하나가 서둘러 옷을 한쪽으로 치워 두었다.
진단랑이 진소 부인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잘 다녀왔니? 배는 안 고프고?”
진소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진단랑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 정 언니는 우리 집에서 중추절을 같이 안 보내요?”
진단랑이 다급하게 묻자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중추절을 어떻게 우리 집에서 보내겠니. 정 낭자도 가족이 있는데.”
“정말 그런 거예요?”
진단랑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정 언니가 우리 집이랑 사이가 안 좋아져서 오지 않는 게 아니고요?”
진소 부인은 웃음기를 싹 걷고 문 앞에 꿇어앉은 유모와 몸종들을 쳐다보았다. 진단랑은 그런 진소 부인의 모습을 보고는 모친의 소매를 늘어지게 잡으면서 흔들었다.
“어머니, 유모가 알려준 게 아니에요. 십팔랑 언니도 정 언니를 보러 가지 않고, 정 언니도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잖아요. 제가 정 언니를 보러 간다고 하면 십팔랑 언니랑 할아버지가 다 못 가게 막는단 말이에요. 셋째 언니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들었고요. 정 언니도 셋째 언니처럼 다시는 우리 집에 안 오는 거예요?”
진단랑의 입에서 셋째 딸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소 부인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야. 괜한 생각 말거라. 정 낭자가 요즘 바빠서 그래. 우리가 귀찮게 하면 안 되잖니.”
진소 부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미가 잘 봐뒀다가 정 낭자가 좀 한가해진다 싶으면 너를 데리고 보러 가마. 저기 정 낭자에게 줄 새 옷도 지어 놨어. 조금 이따가 사람을 시켜 보내려던 참이란다.”
진소 부인이 한쪽에 치워진 옷가지를 가리키자 진단랑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진소 부인은 화제를 돌리며 진단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단랑이 방을 나가자, 진소 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진소 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15일에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가 천가(天街)의 어디에 위치한다더냐?”
진소 부인이 묻자 여종이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대답했다.
“부인, 주씨 가문의 천막은 천가에 세울 자격이 못 됩니다.”
천가는 다름 아닌 어가(御街: 대궐로 통하는 길)였다. 중추절에는 황제와 백성이 함께 기쁨을 나누며 선덕문(宣德門)에 오르는 문화가 있었다. 조회에 참석하는 고위급 관료인 승조관(昇朝官) 이상의 가문들만 천가에서 천자를 뵐 자격이 있었다.
진소 부인도 아차 싶었는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천막을 하나 더 놓는다 한들, 크게 다를 바 없겠지. 바깥쪽에 자리 하나를 더 마련하는 게 어려울지 노야한테 물어봐야겠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진소 부인은 좋은 생각이라는 마음이 들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야를 찾으러 갔다.
같은 시각 진(秦)씨 가문.
진 부인도 진십삼을 붙잡고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를 묻고 있었다.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로 물으세요?”
진십삼이 물었다. 진 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혼사 얘기를 해야지. 나더러 혼담을 넣으러 가라고 했잖니. 왜? 필요 없어졌어?”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혼담을 넣을 만큼 알맞은 사람이 있으면요.”
진 부인이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아니면 네가 먼저 가서 말해 봐. 내가 고른 사람이 적당할지, 정 낭자를 한번 떠보는 건 어떠니?”
진십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정씨 가문에서 적당하다고 여긴 이라면, 정 낭자도 괜찮다고 했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정 낭자에 대해서 잘 알게 됐대? 다 얘기가 된 거야?”
진 부인이 문득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진십삼에게 물었다.
“그날 밤엔 어딜 갔었어?”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상의하고 말 것도 없죠. 부모나 중매인이 맺어준 인연을 따를 뿐인걸요. 그날 일은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주육낭을 배웅하러 갔다고요.”
진 부인은 이미 진십삼의 사환에게서 똑같은 대답을 들었지만, 사환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진십삼에게 다시 한번 물어본 것이었다.
이 아들내미가 정말.
진십삼은 모친에게 알리고 싶은 것만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알리지 않고 싶은 건 사환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해두곤 했다.
요즘 진십삼이 공부에 매진하느라 정교랑을 볼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진 부인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알겠다.”
진 부인이 여종을 향해 말했다.
“가서 노야께 말씀드리거라. 이번 꽃등 행사 때, 주씨 가문의 천막을 우리 천막 옆으로 배치해 달라고.”
여종이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야기하기도 편하겠지.”
진 부인이 천천히 부채질을 하며 진십삼을 향해 웃었다. 진십삼도 진 부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께서 좋으시면 소자도 좋습니다.”
두 진씨 가문 덕분에 주씨 가문의 천막 자리는 하루 사이에 결정됐다. 남의 일에 선심 쓰듯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주씨 가문은 금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신의 천막 자리를 알게 된 주 노야는 깜짝 놀라 집사가 수리한 등산(燈山: 산 모양의 대형 등롱)을 보러 가는 것도 미뤄 두었다.
“자리가 어가에 있다고? 그럴 리가!”
주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정말이야. 진(陳) 상공 가문과 진(秦)씨 가문에서 그리 시킨 거라더군.”
주 노야는 대청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진(陳) 상공 가문 하나로도 기뻐 죽겠는데, 진(秦)씨 가문까지 합세했다니, 진정 겹경사로구나.
주 부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뭘 하려는 걸까요?”
주 노야가 쯧 소리를 내면서 대꾸했다.
“뭘 하기는. 다 우리 교교의 은혜를 입어서 그런 게지. 난 또 저들이 은혜를 다 잊은 줄로만 알았네. 암,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지.”
교교 얘기가 나오자 주 부인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 애는 15일에 정말 우리 집에 안 온대요? 우리랑 불화가 있다고 일부러 티 내려는 건 아니겠죠?”
“무슨 불화? 갑자기 불화는? 왕씨 가문 사람들이 와서 직접 말했소. 교교를 데리고 꽃등을 보러 간다고.”
“정말로 꽃등을 보러 가자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바보라서 간덩이가 부었나.”
주 노야는 주 부인의 마지막 말이 듣기에 거북했다.
“안 될 건 또 뭐요? 바보라서 간덩이가 부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바보든, 간덩이가 부었든, 정교랑 곁을 지키는 사람이 내 아들만 아니면 돼. 주 부인은 웃으며 다른 화제로 대화를 돌렸다.
“아니, 내 말은 왕씨 가문 공자가 참 다정다감하다고요. 그러니 교교가 좋아하겠죠.”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주 노야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교교가 혼례를 올리고 나서도 경성에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주 노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인네는 혼례만 올리면 남의 집 사람이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태평거, 신선거, 태평 두부가 떠올랐다. 마음먹은 대로 남을 쥐락펴락하는 수완이며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의술까지. 그 모든 게 남의 집 것이 된다니.
주 노야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듯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꾹 눌렀다. 정말 배 아파 죽겠군.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전령병이 이리저리 먼지가 나도록 뛰어다니며 야영 소식을 전했다.
“또 야영한다고? 겨우 며칠 걸었다고!”
서봉추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대인들께서 수성부(遂城府)에서 중추절을 보내시겠다는군.”
병졸 한 명이 나지막이 대꾸하자, 서봉추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집을 나선 마당에 중추절은 무슨 중추절이야.”
“급할 게 뭐 있나? 쉴 수 있으니까 더 좋은 것 아니오.”
병졸이 웃으며 말했다.
“쉴 시간이 어딨다고 그래? 이 몸은 하루빨리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워야 한다고.”
서봉추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불평은 불평이고, 서봉추와 병졸들은 야영을 준비하기 위해 막사를 치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모두 현지의 관원들에게 성 안으로 초대되었지만, 병영의 병사들은 모두 규율대로 성 밖 영지에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넷째 형님은?”
천막을 다 치고 난 서봉추 형제들은 문득 사람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아챘다.
“어디 있겠어. 또 말들 돌보고 있겠지.”
범강림이 말했다. 서봉추와 다른 형제들이 의아한 얼굴로 근처에 있는 말 울타리를 내다보자, 역시나 서사근이 말들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넷째 형님은 저러다 저 말들을 받들고 살겠어.”
서봉추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누이가 정말로 천금짜리 귀한 말을 선물해 준 건가?”
서무수가 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던 서사근의 옆으로 갔다.
“어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서사근이 말에게 시선을 고정해둔 채 대답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말굽을 보고 있었다. 정교랑이 선물해 준 말 일곱 필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시선을 낮춰 말굽을 보면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로가 평평하기도 하고, 매일 행군하는 거리도 짧다 보니 아직은 다른 말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사근이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흥분한 얼굴로 눈빛을 반짝이고는 목소리까지 떨면서 외쳤다.
“그래도 말입니다, 형님!”
서사근이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서무수의 팔을 움켜잡았다.
“서북에 도착하면 차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서사근은 두서없이 떠들어대며 서무수의 팔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형님, 형님. 볼 수 있을 거란 말이오! 다른 점을! 아주 다릅니다! 형님, 이건 정말로 큰 선물이오. 누이가 준 엄청난 선물이라고!”
서무수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서사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나도 알아. 누이가 우리에게 평범한 선물을 줬을 리가 없지.”
“큰 선물입니다. 너무 큰 선물이에요. 정말, 정말로.”
서사근은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는 정교랑이 배웅 왔던 다음 날 아침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다들 모릅니다. 모른다고. 말들이 얼마나 아픈데. 내 마음도 얼마나 아프다고. 그렇게 많은 말들이, 그 좋은 말들이 죽을 일도 아닌 일로 버려져 죽어간다는 게……. 만약, 만약 이게 정말로 효험이 있다면!”
서사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굽을 바라보았다.
서무수는 머쓱하게 웃다가 누군가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중추절을 보내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가려던 관리와 군관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서무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서무수가 쳐다보는 모습이 보이자 주육낭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몇 필 말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조상님 떠받들다시피 하고 있어. 못난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