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11
교랑의경 311화
정교랑은 이쪽의 소란이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반근의 손길에 따라 천천히 머리를 올려 묶은 뒤 덧옷을 벗고 외출용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정육랑이 정칠랑을 밀치면서 말했다.
“쟤 가잖아!”
정육랑의 말에 고개를 들자, 그들 옆을 유유히 지나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얘!”
정육랑이 외쳤다. 걸음을 멈춘 정교랑이 정육랑을 내려다보았다.
“왜?”
“어, 어디 가?”
정육랑이 물었다.
“이 집 남자 주인을 뵈려고.”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 집 남자 주인?
“정 대노야예요.”
반근이 옆에서 정교랑에게 알려 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정씨 자매들은 밖으로 나가는 정교랑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나는, 쟤, 쟤가 바보 같아. 이상하잖아.”
정육랑이 말했다. 정사랑과 정오랑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면서도 멀어져가는 정교랑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이상하긴 해.”
“근데 예쁘잖아. 저런 언니랑 같이 밖에 나가면, 얼마나 기세등등할까.”
정칠랑이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정칠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 이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니? 교랑, 왜 밖으로 나왔어? 칠랑, 네가 네 언니 쉬는 거 방해했지? 네 언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따 혼날 줄 알아!”
정칠랑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나 언니 필요 없어!”
정칠랑이 소리를 빽 지르고는 발을 굴렀다. 정 이부인은 그런 정칠랑을 무시하고 놀란 얼굴로 정교랑을 붙잡으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정 대노야를 뵈러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렇게 급하게 뵐 필요 없어. 일단 하룻밤 푹 쉬고, 내일 노부인이랑 대노야를 같이 뵈면 돼.”
정 이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달라고 할 게 좀 있어서요.”
달라고 할 게 있다고?
정 이부인이 눈빛을 반짝이더니 정교랑의 손을 꼭 잡았다.
역시, 주씨 가문이 얘를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어쩐지 아무런 소식도 없다고 했어. 바보를 데리고 가서 좀 가르치고, 꾸며 준 뒤에 사람들 앞에 멀쩡한 척 깜짝 등장을 시키다니.
바보가 아니라 멀쩡한 사람임을 보여줬으니, 이 아이가 나서서 말하면 그 인간들도 이 아이 말을 듣는 수밖에. 이젠 당신들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거야.
“교랑, 일단 날 따라오렴. 할 말이 좀 있어.”
정 이부인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은 정 이부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교랑, 나는 비록 네 계모지만, 널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한단다.”
정교랑과 반근이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위한다고요?”
정교랑의 시선에 정 이부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지만, 웃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네가 믿지 않는다는 건 알아. 어찌 됐든 나는 네 계모니까 안 믿······.”
정 이부인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 이부인의 말을 끊었다.
“믿어요.”
“정말로?”
정 이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죠. 당신이 믿는다면, 나도 믿어요.”
이 소식은 금세 정 대부인의 귀로 전해졌다.
“노야를 보겠다 했다고?”
정 대부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빛을 살폈다.
해가 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아이가 이 집 문턱을 넘은 지는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씨가 아니라 주씨 가문에서 노야를 뵙고자 하는 게 아닐까요.”
여종이 조용히 말했다.
“주씨 가문에서 그 바보를 데려다가 뭘 가르쳤을지 누가 알아.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얘기를 꺼내겠느냐.”
정 대부인이 소매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주씨 가문 쪽만 급히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 게 아니니 문제죠. 좀 전에 이부인께서 아씨를 붙잡고 한참 동안 뭐라 말하고 있던데요.”
여종이 말했다.
“도대체 뭣들을 하고 싶은 건지, 내가 직접 한번 봐야겠다. 가서 이르거라. 대노야께서는 출타하셔서 오늘 집에 계시지 않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라고.”
정 대부인이 여종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곧바로 대부인의 말을 전하러 나갔던 여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
정 대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여종에게 물었다.
“아씨 말로는······.”
여종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정 대부인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노야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다음에 오겠답니다.”
감히 나를 안 보겠다고?
정 대부인의 놀란 얼굴은 금세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바뀌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주 안하무인이 따로 없구나!
“부인, 부인. 노부인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정 대부인이 부아가 치밀어 올라 속이 뒤집히려던 때에 다른 여종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 뒤로 나이가 있어 보이는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노파는 노부인의 측근 여종이라, 정 대부인을 보고도 가볍게 목례만 하였다.
“대부인, 노부인께서 밖으로 나가 지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노파는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응?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정 대부인이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 어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부인, 어떻게 저 아이를 이 집에 들일 생각을 하셨습니까.”
노파가 고개를 저으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참, 노부인께선 저 바보를 끔찍이도 싫어하셨지. 내가 그걸 깜빡했구나.
“아니, 부 어멈. 그게 아니라, 저 아이가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와서.”
정 대부인이 다급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노파는 고개를 저으면서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갑작스럽다니요. 아무리 갑작스럽다 해도, 반나절씩이나 되는 시간은 노부인께 말씀드리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노부인께서는 이미 반나절 동안 화가 단단히 나셔서 아무 사찰이나 들어가 기도나 올리면서 살겠다고 하십니다. 어디서 기도를 드리든 똑같으니, 차라리 부처님 가까이에 있는 게 더 낫다고 하시면서요.”
“그래, 내 불찰이 맞네. 그런데 사정상 저 아이를 그냥 내쫓을 수는 없었어. 어머님께 말씀드리러 가는 걸 깜빡 잊었구먼.”
정 대부인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부 어멈도 알다시피 우리 친정에서 저 아이와 혼담을 주고받을 텐데, 시집을 가더라도 밖에서 가게 둘 수는 없지 않나.”
정 대부인의 해명을 들은 부 어멈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부 어멈은 정 대부인을 재촉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어서 노부인께 말씀을 올리러 가시지요.”
“알겠네, 알겠어.”
정 대부인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어멈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허리를 꾹 짚으면서 걸었다.
“부인, 왜 그러세요?”
어멈이 정 대부인의 모습을 보고는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별거 아닐세. 급하게 일어나느라 삐끗했네.”
정 대부인이 짚은 손을 내려놓았다.
“건강에 유의하세요, 부인. 집안에 챙기셔야 할 일이 많습니다.”
부 어멈이 말했다.
한평생을 이 집안의 안주인으로 지냈는데, 집안에 일이 많은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난 그저 쓸데없이 화낼 일만 없어도 감지덕지야.
이번엔 제대로 일이 틀어졌네.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사람을 마중 보내서 왕십칠을 집으로 데려오고, 그 바보는 곧장 도관으로 보내버렸어야 했어. 혼담을 끝낸 뒤에 다시 도관에서 바보를 데려와 시집보내면 됐을 일인데, 이 꼴이 다 뭐야. 온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바보를 집으로 들였으니, 마음대로 내보낼 수도 없고.
단지 한 걸음을 잘못 내디뎠을 뿐인데, 일이 이 지경으로 꼬이다니.
정 대부인은 후회가 막심했지만, 노부인 앞에서 그런 속내를 들킬 수는 없었다.
노부인께는 혼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바보를 집에 들였다고 잡아뗄 수밖에 없겠군.
정 대부인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등지고 서둘러 노부인의 거처로 향했다.
같은 시각. 정교랑과 반근은 정 이부인을 따라 거처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대노야께서 돌아오시고 머지않아 네 아버지도 집으로 오실 테니, 오늘은 일단 쉬는 게 좋겠구나.”
겉으로는 침착한 양 말했지만, 정 이부인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대노야께서 집에 계시지 않다면, 대부인을 뵈러 가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거늘, 이 아이는 고민도 안 하고 돌아서네. 주씨 가문에선 도대체 얘한테 뭘 가르친 거야?
정 이부인은 저도 모르게 반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반근은 정교랑 옆에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저 계집도 주씨 가문이 붙여 둔 거겠지? 저 아이가 뭘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수시로 가르쳐 주려고 말이야.
“교랑, 내가 좀 전에 네게 한 말은 다 진심이란다.”
정 이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시집을 가는데 혼수를 전혀 안 해 가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야. 당장 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우선 네 아버지가 돌아오면 같이 이야기해 보자꾸나.”
“급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싫어! 싫어! 나는 내 방에서 지낼래!”
정칠랑이 얼굴을 가린 채 방 안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정 이부인은 화도 나고 초조하기도 한 마음에 정칠랑을 손으로 두어 번 때렸다.
하지만 그런 정 이부인의 행동은 도리어 벌집을 쑤신 꼴이 되고 말았다. 정칠랑은 더욱 악을 쓰면서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울어댔다.
“제가 지낼 거처도 정돈이 다 됐다고 하니,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니야, 여기서 지내도 돼.”
정 이부인이 울며 떼쓰는 정칠랑을 밀치면서 말했다.
“넌 네 동생 방에서 지내거라. 내가 네 동생을 데리고 자마.”
정칠랑은 정 이부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괜찮아요. 제가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요.”
정교랑이 미소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 이부인은 난감한 얼굴로 정칠랑을 두어 번 더 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낯설어서 저러는 거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여기지 말렴.”
정 이부인이 정교랑에게 사과하자 정교랑은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요.”
정교랑은 정 이부인이 밖으로 배웅 나오려는 걸 손짓으로 공손하게 거절했다. 정 이부인은 몇 번 인사치레를 한 뒤, 여종을 시켜 정교랑을 배웅하게 했다.
정 이부인의 마당을 벗어나자 반근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정 이부인이 정칠랑을 품에 안은 채 달래고 있었다. 환하게 켜진 등불이 안을 더욱 따스하게 비췄다.
반근이 시선을 거두고 앞쪽을 내다보자, 두봉을 걸친 정교랑이 밤공기를 맞으며 은은한 불빛 사이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연못 옆에 있던 방의 정리가 끝났다. 경성에서부터 마차에 싣고 왔던 정교랑의 집기와 가구들도 모두 방 안에 놓여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땐 덕에 방 안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당직을 서는 몇 명의 여종과 몸종들 외에도, 누군가가 문 앞에 서서 정교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춘란이 아씨를 뵈옵니다.”
춘란이 회랑 아래에서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춘란.”
반근이 활짝 웃으면서 춘란을 반겼다.
“반근 언니, 금가아를 보살펴 줘서 정말 고마워.”
춘란은 곧바로 반근을 향해서도 큰절을 올렸다.
“아니야, 아니야. 오히려 그 애가 우리를 도와주는걸? 금가아가 나보다 더 오래 아씨 곁을 지켰어.”
반근이 서둘러 말했다. 춘란은 다시 한번 정교랑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저, 저는 다른 게 아니고 아씨께 인사를 올리러 왔어요.”
춘란은 고개를 살짝 들어 방 안에 앉은 정교랑을 힐끗 쳐다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씨께서 이젠 다 나으셨네요. 소인도 정말 기뻐요.”
정교랑은 춘란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그 앞으로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간식 가져가서 먹어.”
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