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64
교랑의경 364화
황제는 아들들과 오래 놀아 줄 시간이 없었다. 재미 삼아 지도를 함께 보는 것인지라 수업은 금방 끝났다. 대황자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문을 나서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이황자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형님.”
대황자는 못 들은 척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대황자보다 체구가 작고 동작이 날랜 이황자가 금세 따라잡았다.
“형님, 책 외우는 거 가르쳐 줘요.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거 외워야 해요. 내일 물어보신대요.”
굳은 얼굴의 대황자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지만, 이황자는 노여워하지 않고 웃으며 뒤따라갔다.
두 황자는 곧 어화원을 지나쳤다. 이황자가 또 뭔가 생각났는지 대황자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형님, 우리 매화 꺾으러 갈래요? 저번에 황후마마께 갖다 드렸더니 엄청 좋아하셨어요.”
대황자는 콧방귀를 뀌며 옷소매를 뿌리치려 했지만, 옆에 있던 내시가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매화가 예쁘게 피었으니 가서 꺾으시죠. 돌아가는 길에 마마들께 드리시면 좋잖습니까.”
내시가 대황자에게 암시를 주듯 말했다. 대황자의 몸이 굳어졌다.
궁녀나 태감들이 할 일을 굳이 나더러 하라니. 그놈의 효도, 효도. 성가셔 죽겠어.
대황자가 이를 악물며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어화원 쪽으로 향하자 이황자도 신이 나서 따라갔다.
어화원에는 매화나무로 이루어진 매산이 있었다. 호수를 따라 크고 작은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빨갛고 하얀 매화들이 곧 흐드러지게 필 기세였다.
몸집이 비대한 대황자는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찼다. 대황자는 내시들에게 매화를 꺾으라는 명을 내렸지만, 이황자는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직접 꽃가지를 꺾었다.
“형님, 이거 예쁘죠?”
이황자는 수시로 꽃가지를 들고 대황자 쪽으로 돌아와 물었다. 대황자는 돌 위에 내시가 벗은 옷을 방석 삼아 깔고 앉아 쉬고 있었다.
“안 예뻐.”
대황자가 대꾸했다.
“형님, 형님,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이황자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대황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따라갔다.
저쪽 산석 근처에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구불구불한 매화나무 가지에 붉은 매화와 흰 매화가 뒤섞여 반쯤 피어 있었다. 화초에 별 관심이 없던 대황자조차도 가슴이 뛸 정도로 아름다운 매화였다. 순간 부황의 서재에서 보았던 매화도가 떠올랐다.
“아바마마께 갖다 드려야지.”
이황자가 웃으며 소리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내가 할 거야!”
대황자도 얼른 걸음을 옮기며 손을 뻗어 이황자를 홱 밀쳤다. 옆에 있던 내시가 그 광경을 보고 얼른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두 분 전하, 여기서 장난치시면 안 됩······.”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황자에게 떠밀린 이황자가 중심을 못 집고 비틀대다가 갸우뚱하는 모습이 보였다. 물기가 축축하게 남아 있는 돌을 밟은 발이 미끄러지면서 이황자는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대황자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붙잡았다. 대황자까지도 몸이 앞으로 쏠렸지만, 다행히 몸집이 비대하고 힘이 있어 함께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황자는 허공에 몸을 반쯤 걸친 채 간신히 버텼다.
내시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형님, 형님.”
한쪽 손만 대황자에게 의지한 채 허공에 매달려 있던 이황자가 울며 소리쳤다. 너무 놀란 탓에 몸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형님, 형님.
대황자는 이황자를 쳐다보았다. 꽤 놀라 정신이 없을 텐데도 아우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된 귀염상으로 보였다.
영리하고, 말도 잘하지. 부황은 저 녀석만 좋아하셔.
넌 왜 이렇게 아둔하니! 네가 그 애보다 뭐가 못나서? 걘 너보다 나이도 어리잖아!
다 이 녀석 때문이야······.
이 녀석만 아니었다면 그 알아듣지도 못할 내용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마마께 혼나지 않아도 됐어. 부황께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일도 없지. 모두가 칭찬하고 떠받들던 건 분명 나였어. 그런데 이젠 내가 글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어. 지도도 못 읽는 아둔한 놈이라고 비웃기만 하잖아.
전부 이 녀석 때문이야······.
이 녀석이 없다면 부황께서 가장 아끼시는 건 앞으로도 나겠지. 스승님께서 가장 영리하다고 하는 이 역시 앞으로도 나일 거야. 귀비마마께서도 더 이상 내가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실 리 없고.
그런 생각들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주변에 있던 내시들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으려 했다. 순간 그 모든 게 천천히 멀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황자는 울며 소리치는 이황자를 보면서 손을 놓아 버렸다.
* * *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은 집에서 보내온 새해 선물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구주(衢州) 수왕부에서 보낸 새해 선물은 결코 약소하다고 할 수 없는 규모였다. 비단이며 옷, 서화, 붓, 먹, 종이, 벼루 등등 소년에게 필요한 물건은 빠짐없이 고루 들어 있었다.
진안 군왕은 선물들을 하나하나 직접 살피며 정리했다. 옆에 있는 내시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내시는 조용히 기록만 했다.
전각 안에는 진열대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진열대 선반 위에 빼곡하게 쌓아 둔 선물 상자에는 몇 년 몇 월에 보낸 선물인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두 내시가 진안 군왕이 건넨 비단과 선물 상자를 들어 옮겼다.
“이거로 새 옷을 만들면 되겠다.”
진안 군왕이 내시에게 비단을 건네며 말했다. 내시는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내시는 정말 훌륭한 옷감이라며 감탄을 늘어놓고는 비단을 들고 진열대 선반 쪽으로 갔다. 이쪽에 놓인 옷감들도 전부 고급 비단이었다.
몸을 돌리자마자 내시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내시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떨리는 목소리였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내시 하나가 보였다. 창백한 안색에 경황이 없는 표정이었다. 내시는 ‘전하’만을 외친 후 말을 잇지 못했고, 입술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무슨 일이더냐?”
진안 군왕이 시선을 거두고 다른 선물 상자를 열어 보며 물었다. 그 안에는 토기 인형이 하나 들어 있었다. 물론 평범한 인형은 아니었다. 인형에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니 대가의 작품이었다.
이건 육가아한테 줘야겠다.
진안 군왕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전하, 이황자 전하께 일이 생겼습니다!”
내시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진안 군왕의 몸이 움찔하며 굳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토기 인형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 대인, 이게 얼마 만이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이 태의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왜요? 또 어디 몸이 불편하십니까? 제가 못 고친다고 하면 신의를 부르시려고요?”
진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속 좁기는. 웃자고 한 소리에 그리 꽁해서야 쓰겠소? 체통을 생각해야지.”
이 태의는 콧방귀를 뀌고, 진맥을 위해 탁자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진 노태야도 웃으며, 진맥하도록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 태의는 좌우 양쪽의 맥을 살핀 후 손을 거두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진소는 이 태의의 말에 순간 바짝 긴장했다.
“죽지는 않겠어요.”
이 태의가 말했다. 진소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지만 진 노태야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놀랍게도 내시였다.
진소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내시는 진소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 태의부터 잡아끌었다.
“어서요 대인. 폐하께서 입궐을 명하셨습니다.”
내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시의 말에 진소의 안색이 급변했다. 진소가 얼른 사방을 둘러보자 주위에 있던 시종들이 물길 열리듯 쫙 갈라지며 비켜섰다.
이 태의는 단 한마디의 질문도 없이 약상자를 챙겨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당에 있던 이들이 흩어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상태로 돌아갔다.
진 노태야와 진소는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던데······.”
“폐하일까요? 아니면 태후마마나 황후마마께서?”
진 노태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두운 얼굴로 황궁 쪽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보자. 금방 소식이 올 게야. 황궁에선 아무것도 숨길 수 없지.”
이 태의가 내시에게 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의로 묻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태의는 태의로서 물어야 할 말과 묻지 말아야 할 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게다가 내시의 안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통 엄중한 일이 아니구나.
곧장 황궁의 내궁으로 들어간 이 태의는 내시가 황제의 궁으로 향하지 않는 걸 보고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급사만 아니라면 조정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은 없을 터였다. 궁에서 몇 번 더 방향을 틀어 어느 전각 앞에 도착했을 무렵, 이 태의는 더욱 안도했다. 황자의 처소였기 때문이다.
궁에서 자라는 황자와 공주에게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른 황족 구성원에 비해 더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다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이 태의의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어쨌거나 황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특히 이황자라면 더더욱.
이 태의가 문 쪽으로 가 보니, 호리호리한 소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겨울 황궁의 쓸쓸한 그림자 아래에 있는지라 더욱 힘없고 애잔해 보였다.
이 태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진안 군왕을 지나쳐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진안 군왕 역시 이 태의를 보지 못한 듯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넓디넓은 황궁 전각 앞에 찬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스치자 버선만 신은 발이 드러났다.
그리 급하게 달려온 터였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내시가 커다란 두봉을 끌어안고 신발을 든 채 옆에 있다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앞으로 다가갔다.
“전하, 옷을 걸치시지요.”
내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라.”
진안 군왕이 냉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내시는 울상인 채로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바람이 창살을 때리며 우우 하는 소리를 내는 통에 굳게 닫힌 전각의 안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더욱 희미하게 들렸다. 안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창백한 안색에서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지라 두 눈은 더욱 새까매 보였다.
뒷걸음질을 치던 진안 군왕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문을 벌컥 열자 안에 있던 이들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안에 있던 이들은 진안 군왕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진안 군왕 역시 평소처럼 깍듯이 예를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침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진안 군왕에게 낯선 전각이 아니었다. 아니, 실은 익숙한 곳이었다. 종종 이곳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했으니.
“형님, 우리 바둑 둬요.”
침상에 누운 그 아이가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안 군왕이 얼른 따라가려는데, 눈앞에 있던 아이가 사라지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이황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황자의 얼굴은 여전히 발그스레했다. 얼굴에 묻어 있던 진흙 자국은 이미 깨끗하게 지운 후였다. 콧김을 내쉬면서 희미하게 코 고는 소리가 났다. 흰 천으로 머리를 싸매지 않았다면 쌔근쌔근 자는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직 숨을 쉬고 있어!
뛸 듯이 기뻐하며 침상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간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콧김을 확인해 보았다.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어요.”
진안 군왕이 소리치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의, 태의,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 태의가 안타까운 눈길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식을 회복하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이 태의가 하던 말을 끝마쳤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
황제의 물음에 이 태의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 부위를 다치셔서 지력에 큰 손상을 입으셨습니다.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정신이 온전치 않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