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63
교랑의경 363화
커다란 마차 두 대에서 짐을 내리는 가운데, 아이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들은 경성에서 온 이들이 이따금 던져 주는 사탕을 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세 점포에서 따로 보냈네요?”
“대관리인이 한꺼번에 보내자고 했더니 다들 반대하지 뭐야. 주인 아씨께 점수를 딸 기회를 대관리인 혼자 독점하게 둘 순 없다나.”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정 대노야는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세 점포?
“그럼 대관리인만 더 좋은 거 아니에요? 각자 따로 보내면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생색만 내면 되는데.”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태평거 거고, 이건 신선거 거야. 그리고 이건 약포 거. 좀 특이해 보이지? 약포 관리인이 자기들이 버는 돈은 다른 두 점포에 훨씬 못 미치는 걸 알고 더 공을 들였거든. 이 물건들 좀 봐. 보통 정교한 게 아니야.”
마차 앞을 에워싼 아이들과 사람들이 물건을 구경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정 대노야는 홀린 듯 앞으로 다가가 한 사내를 툭툭 쳤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정 대노야를 쳐다봤다.
“그 신선거라는 곳 말인데, 거기서도 과로신선을 파나?”
정 대노야가 사내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르신, 아닙니다.”
아니구나.
정 대노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도 파는 게 아니라······.”
사내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우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서만 팝니다. 경성에서 우리 점포만 독자적으로 팔죠.”
정 대노야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우리 점포? 그럼 그 과로신선이······.”
정 대노야는 고개를 홱 돌려 정교랑 거처의 대문을 바라보고, 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가리켰다. 뭐라 말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과로신선은 우리 아씨 거예요.”
사내가 웃으며 말을 이어받았다. 사내는 정 대노야의 예사롭지 않은 옷차림을 보고 호기심이 인 듯 물었다.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누구냐고? 난 바보다!
정 대노야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안에서만 맴돌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이 떡 벌어진 정 대노야는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귓가가 웅웅 울렸다.
– 신경을 안 쓴다니? 그럼 관부의 탐관오리들 주려고 그 돈을 갖다 바친 게야?
– 그 돈은······.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이미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는데, 속 시원하게 분풀이나 하자고 푼돈 쓰는 걸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어쩐지 그런 맹랑한 짓을 한다 했네! 어쩐지 돈 아까운 줄 모른다 했어!
이 바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같은 시각 경성. 경성엔 눈이 내리지 않아 하늘이 맑았다. 겹겹의 전각으로 둘러싸인 황궁은 한층 활기차 보였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황궁도 분주해졌기 때문이다.
“전하, 전하. 왕부에서 새해 선물이 왔습니다.”
내시가 웃으며 들어와 예단을 건넸다.
“가서 보시겠습니까, 전하?”
진안 군왕은 쭉 폈던 다리를 오므리고 책상다리로 앉으며 손을 뻗어 예단을 받았다.
“이번에도 작년 거랑 똑같네.”
진안 군왕이 목록을 훑으며 말했다.
“옷도 못 입을 것 같고. 작년엔 작아서 못 입었는데, 이번엔 클지 작을지 모르겠네.”
왕부의 담당자가 일괄적으로 준비해 보내는 예단인지라 양식도 매년 똑같았다.
“어머니나 형제들이 보낸 서신은 없고?”
진안 군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묻지 않게 되는 일도 많았지만, 유독 이 질문만큼은 단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대답 역시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연말이라 바쁘다 보니 왕비님께서 챙길 겨를이 없으셨을 겁니다. 전하, 두 달 전에 왕비님께서 서신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내시가 웃으며 말하자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참, 두 달 전에 어머니께서 서신을 보내셨지. 그걸 잊었구나. 아우의 작위에 관해 알아보라고 하셨는데, 말씀을 올린다는 걸 깜빡했네.”
진안 군왕이 웃으며 자리에 일어났다.
“새해에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기분이 좋으실 때 기회를 봐서 말씀드려야겠다. 가자. 해마다 똑같지만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잖아. 집에서 온 선물인데 보러 가야지.”
진안 군왕의 손에 있던 예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안 군왕은 비단 옷자락으로 예단을 스치며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막 문을 나서는데 맞은편에서 이황자가 신이 난 얼굴로 걸어왔다.
“형님, 우리 지도 보러 아바마마께 가요.”
그날 이후로 이황자는 지도에 관심을 보였고, 지도 보는 법을 영리하게 깨쳤다. 그러자 황제는 아예 태사국 관리를 시켜 지리를 가르치게 했다. 딱히 무언가를 익히라기보다는 재미 삼아 놀라는 의미였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자는 지도를 볼 수 있지만 군왕에게 지도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 보세요. 난 어머니한테 새해 선물이 와서 보러 가야 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요? 좋겠다. 형님, 어서 가 봐요.”
이황자가 신이 나서 말했다.
“좋은 특산품이 있으면 남겨 둘게요. 막내아우가 전하의 또래니 분명 장난감을 보냈을 거예요. 갖고 놀게 챙겨 놓겠습니다.”
이황자는 더욱 신이 나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전하, 어서 가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뒤에서 내시가 주의를 주었다.
“황후마마께서 당부하셨잖습니까.”
이황자는 알았다고 하며 진안 군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쫄랑쫄랑 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대황자도 떠밀리다시피 문을 나서고 있었다.
“마마, 전 가기 싫습니다. 책도 아직 못다 외웠어요.”
귀비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책을 외워? 책을 외워 뭐해! 네 부황께서 좋아하시는 건 그게 아니야. 좀 배워라, 배워. 벌써 얘기 다 들었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 하문하실 때마다 제대로 대답도 못 한다며?”
“전 그거 배우는 거 싫어요.”
대황자가 억울한 듯 대꾸했다.
“시끄럽다. 좋고 싫은 게 어디 있어? 뭘 배우는지가 중요해? 부황께서 뭘 보고 싶어 하시는지가 중요하지.”
귀비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대황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온화한 말투로 다독였다.
“착하지, 우리 사가아(四哥兒: 대황자의 별칭). 어미 말 듣고 어서 가 봐.”
대황자는 하는 수 없이 알았다고 대답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 언니가 저한테 선물 안 보냈어요?”
진단랑이 외치며 안으로 통통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안에서는 진소 내외와 그 딸들이 여종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진단랑의 등장으로 얘기가 끊겼다.
“체통을 지켜야지 웬 호들갑이냐.”
진소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무라자 진단랑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잘못을 시인했다. 진십팔랑이 옆자리를 가리키며 이리 오라고 손짓하자 진단랑은 얼른 다가가 언니들 사이에 앉고는 기대의 찬 눈빛으로 여종의 보고를 기다렸다.
“정 언니는 잘 지낸대? 언제 돌아온대?”
진단랑이 소곤거리자 진십팔랑은 진단랑을 향해 고개를 가로젓고 입 다물라는 눈짓을 보냈다.
“지친 표정에 울적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진(秦)씨 가문 사람들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른다고?”
진소 부인의 물음에 여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수와 관련된 송사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거든요.”
“그럼 송사 때문이겠네.”
진소 부인의 말에 진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낭자가 소송 같은 문제로 괴로워할 것 같소?”
“어쨌든 여인이에요. 게다가 아직 십팔랑 또래의 어린 낭자죠.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가 봤자 뭐 좋을 게 있다고.”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더니 다시 여종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다른 가문에도 별 관심이 없다고?”
“당분간 혼사에 대해선 생각하고 싶지 않으시대요.”
여종이 대답했다.
혼사를 생각할 마음이 안 들 만도 하지. 그런 사람들이면 집안에서 좋은 혼처를 구해 줄 리도 없고.
진소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종에게 그만 나가 보라고 했다. 진소도 일어나 서재로 돌아가면서 대청에는 진소 부인과 자매들만 남아 분위기가 한층 편안해졌다.
“왜, 무슨 일인데?”
진단랑이 언니들을 붙잡으며 물었다.
“별건 아니고, 정 낭자한테 곤란한 일이 있나 봐.”
진십팔랑의 말에 진단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상관없어. 정 언니는 두려울 게 없거든.”
진십팔랑도 웃으면서 진단랑의 이마를 쿡 찔렀다.
“두려운 게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안 좋은 게 문제지. 생각해 봐. 부모님이 혼내실 때 넌 기분이 좋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진단랑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좋아.”
하긴. 혼나기만 해도 기분이 안 좋은데, 혈육들과 싸우며 소송까지 벌이고 있으니.
“전에는 정 낭자가 무슨 일을 만나도 놀라지 않고 침착한 게 부러웠는데, 지금 보니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불행을 안고 있네.”
“모든 걸 꿰뚫어 봐야 내려놓을 수도 있는 법이지. 지혜는 고난에서 나오는 법이야.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남이 무엇을 가졌다고 부러워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그걸 얻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을지부터 생각해야 해.”
자매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숙이며 모친의 가르침에 감사를 표했다.
대황자는 대전에 서 있었다. 앞에 걸린 지도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눈을 부릅떠 봤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졸면 안 돼, 졸면 안 된다고. 지난번에도 졸다가 부황께서 돌아가라고 하시는 바람에 귀비마마께 반나절이나 벌을 받았잖아.
책을 외우자. 그럼 졸음을 쫓을 수 있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는 것이 있기 마련이요, 모르는 것이 없으면 아는 것이 없기 마련이다(有不知則有知, 無不知則無知). 성인에게 본디 앎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음을 통해 앎이 있게 된다(聖人未嘗有知,由問乃有知).”
입에 잘 안 붙는 경서를 읽는 것이 대황자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대황자는 그런 책들이 좋았다.
읽고, 외우고, 듣고, 논하고. 얼마나 쉽고 재미있는데. 이런 천문이니 지리니 별자리니 하는 건 머리만 아프다고.
경서를 공부할 때면 잘 읽는다고, 빨리 외운다고 늘 칭찬을 받곤 했다. 스승은 대황자가 한 번 본 건 잊어버리는 법이 없을 정도로 영민하다고 감탄을 늘어놓았다.
영민하다고······.
대황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전하, 전하?”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대황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봤다. 태사국 관원이 어색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이황자가 대황자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고 있고, 용상에 앉은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대황자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사가아, 대하(大河)는 어디로 흐르지?”
황제가 물었다.
대하라······.
대황자는 얼른 지도를 쳐다봤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산하는 가뜩이나 눈에 안 들어왔는데, 지금 보니 더더욱 뒤죽박죽으로 보였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강이지?
진짜 대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본 적이 없으니 지도 위에 있는 점과 선으로 묘사된 강줄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저······.”
답을 귀띔해 주려는 이황자의 입 모양이 시야로 들어왔다.
뭐라고?
대황자는 이황자를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뺐다.
“사가아, 지도가 재미없으면 수업 들으러 올 것 없다.”
황제의 말에 대황자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또 쫓겨나는 건가? 이대로 돌아가면 마마께 꾸지람을 들을 텐데.
넌 왜 이렇게 아둔하니? 왜 이렇게 아둔해. 육가아도 하는 걸 너는 왜 못해? 네가 그 애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대황자의 귓가에 귀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찮고 성가시다는 표정의 얼굴도. 대황자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이황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바마마, 저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어요. 대인께 다시 한번 설명해 보라고 해 주세요.”
엄숙하게 굳어 있던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 웃음은 예전에 대황자도 자주 보던 것이었다. 부황 앞에서 책을 외울 때면 저런 웃음을 짓곤 하셨는데, 지금은······.
“녀석, 잔머리는.”
황제가 저쪽의 관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설명해 보게.”
관원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대황자는 이황자가 자신을 향해 헤헤 웃는 모습을 보고 무표정한 채로 시선을 돌려 지도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