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72
교랑의경 372화
“그 낭자에 대해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존경할 만해.”
진 시강이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옷소매를 털었다. 진십삼은 그런 아버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 있던 진 노태야를 금침으로 사흘 만에 일어나 앉게 하고, 숨이 끊어졌던 동 내한을 술과 안주를 약 삼아 하룻밤 사이에 회생시켰다.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진 시강의 물음에 진십삼이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괴력난신을 떠올렸습니다.”
“너도 그러할진대, 저잣거리의 평범한 이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신기와 같은 비술을 가졌으면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떼돈을 벌 만도 한데, 정 낭자는 거기서 과감하게 멈추고, 그 명성이 잊혀지도록 조용히 지냈다.”
“아버지, 그게 옳은 일입니다. 괜히 귀신이니 뭐니 하는 말이 돌아 태평도(太平道: 후한 말기에 생겨난 도교 교단)나 미륵교처럼 신도들이 생겨나면, 결국 조정에서 칼을 빼지 않겠습니까.”
진십삼이 말했다.
“그런 세상사의 이치를 꿰뚫어보긴 쉽지만, 막상 그 당사자가 되었을 때 그만두고 물러나기란 그리 쉽지 않아. 흐드러지게 핀 꽃은 사람을 홀리기 마련이지.”
거기까지 말한 진 시강이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십삼, 그리 이치에 통달하고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인데, 네가 굳이 귀띔할 필요 있겠느냐?”
진십삼이 멈칫했다.
“아들아, 관심이 지나치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진 시강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관심이 지나쳐 마음이 어지러워졌다니······.
부친이 이런 농담을 건넨 건 처음이었기에, 진십삼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됐다.
“정말 잊었나 보군. 병을 고치지 않는 세 원칙 말이다.”
진시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세 손가락을 내밀었다.
방문 진료를 하지 않고, 죽을병이 아니면 고치지 않으며, 병을 고쳐 준 집안과 혼인하지 않는다.
속으로 원칙들을 되뇌던 진십삼은 순간 멈칫했다.
죽을병이 아니면 고치지 않는다!
“그래서, 원칙이라는 게 좋은 거다.”
진 시강이 다시 서책을 들으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경왕의 병이 낫는 걸 원치 않으시는······.”
잠시 침묵하던 진십삼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서책을 쥐고 있던 진 시강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원하고 원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해.”
진십삼은 네 하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가로 걸어가던 진십삼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만약, 원칙은 원칙일 뿐이고, 정 낭자가 고칠 수 있다면요?”
어쨌거나 바보의 병을 고친 예가 생생하게 있지 않은가. 그런 낭자가 못 고친다고 하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자신과 부친조차도 못 믿지 않는가. 그들은 그 원칙이 좋은 원칙이라는 걸 믿을 뿐이었다.
“그건 그 낭자의 선택에 달렸지.”
진 시강이 아들을 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귀띔을 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진십삼은 알았다고 하며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이 훅 불어오자, 회랑을 걷던 진십삼이 걸음을 멈췄다.
“그건 낭자 본인의 선택이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거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진십삼은 웃으며 혼잣말을 하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같은 시각, 준마 여러 마리가 경성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각기 다른 성문에서 나왔지만 전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깊은 밤, 곁채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반근은 옷을 걸치고 앉아 손에 든 서찰 한 통을 쳐다봤다. 탁자 위에도 서찰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어두컴컴한 등이 반근의 얼굴을 비췄다. 다소 창백한 얼굴이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개 짖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리는가 싶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반근은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옷깃을 꽉 잡았다. 귀를 기울여 보니, 발걸음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누구냐?”
대문 밖에서 야간 당직을 서던 시종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역시 누가 왔어!
반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 밖에서는 더 이상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군가가 곁채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조 집사.”
반근이 문을 열자, 등롱 아래에 서 있는 조귀의 모습이 보였다. 조귀가 무거운 표정으로 반근을 향해 손짓했다. 반근은 얼른 문을 닫고 나와 마당 한쪽 옆으로 갔다.
“또 한 통이······.”
반근은 조 집사가 건네는 서찰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어느 집이에요?”
반근이 물었다.
“이번에도 주씨 가문이래.”
조 집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룻밤 사이에 네 통이라니, 주씨 가문이 방패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네.
별수 없는 일이었다. 당초 경성을 떠날 때 주 노야가 했던 말처럼, 이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주씨 가문은 평생 정교랑과 같은 배에 탄 것과 마찬가지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은 가족과 떨어질 수 없었다.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일이 생기면, 그 가족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 낭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주씨 가문도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주씨 가문은 가장 좋은 표적이자, 맨 앞에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방패였다.
“경성에 일이 났나 보다.”
“아씨를 깨울까요?”
조 집사의 말에 반근이 물었다. 조 집사는 한숨을 내쉬고 손에 든 서찰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깨우자.”
서찰 네 통을 금세 읽은 정교랑은 알았다고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근과 조 집사는 정교랑을 보며 지시를 기다렸지만, 정교랑은 다시 자러 가려는 듯했다.
“아씨, 무슨 일인데요? 중요한 일이에요?”
하는 수 없이 반근이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반근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이 서찰들엔 요즘 경성에서 일어난 새로운 소식들이 담겼어. 내 안부도 물었고. 그다지 중요한 건 없어.”
경성의 새로운 소식이라······.
조 집사는 짚이는 게 있었다. 예상대로 뭔가 일이 났음을 알리는 서찰이었다. 아마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하룻밤 새에 서찰이 네 통이나 왔다. 그것도 각기 다른 곳에서 전부 주씨 가문의 이름을 빌려 보낸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어쨌거나 아씨한테 경계하라는 귀띔을 한 셈이니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반근은 조 집사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안도했다.
아씨께서 별일 아니라고 하시니 별일 아니겠지.
“그럼 아씨, 내일 그대로 출발할까요?”
반근이 물었다.
“물론이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정교랑은 전에 얘기한 대로 양주로 가는 채비를 시작했다.
경성에서 보내온 새해 선물과 점포 배당금으로, 먼 길을 떠나기에 충분한 돈과 식량이 마련됐다. 반근 역시 정씨 가문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다들 이곳 사람이 아니니 새해 명절이라 해도 조상 앞에 제를 올리거나 하는 일은 챙기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다들 새해 명절 준비로 바쁜 이때, 이들은 먼 길을 떠날 채비에 여념이 없었다.
요 며칠 마차와 말까지 준비를 마쳤고, 내일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씨, 그럼 쉬세요.”
반근과 조 집사가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촛불의 불을 끄고 문을 닫자 어둠과 함께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반근은 다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동녘이 밝아오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러 나갔다. 날이 조금씩 밝을 무렵, 대문 밖에서 또다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나 싶더니 대문 밖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멈춰라. 누굴 찾아왔느냐?”
소란 속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경성에서 왔다. 정 낭자를 뵙고자 한다.”
또 경성에서 사람이 와? 이번에도 서찰을 보낸 건가?
반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두모까지 쓴 사내가 서 있었다. 주씨 가문 시종들이 누군지 물으며 두모를 벗기자 소년의 용모가 드러났다.
문 여는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소년 역시 새벽빛을 받고 선 반근을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 고, 공자셨군요!”
반근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날 알아보는 이가 있네. 정말 다행이야.”
소년은 기쁨이 감춰지지 않는 눈으로 씩 웃었다.
알아보다마다. 이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아씨께서 아직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셨을지도 모르는걸.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공자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
반근이 물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소년을 볼 수 없었다. 이따금 생각이 날 때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 같기도 하고, 모든 게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나타날 줄이야.
소년은 반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차에 짐을 싣느라 분주한 주씨 가문 시종들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어디, 가려고?”
질문을 던지는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햇빛을 받으며 선 소년의 웃음이 갑자기 서늘해지는 것 같아 반근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네, 막 출발하려던 참이에요.”
소년은 아, 하며 대꾸했다. 얼굴의 웃음기는 더욱 진해졌지만, 눈빛은 침울해 보였다.
“그렇구나. 정말 딱 맞춰 왔네.”
소년이 천천히 말했다.
딱 맞춰 왔다고? 이게 딱 맞춰 온 건가?
공자가 막 도착했을 때, 이들은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못 만났을 것이다. 근데 이게 딱 맞춰 온 거라고?
아, 하긴. 딱 맞춰 온 것도 맞네. 한발만 늦었으면 못 만났을 테니까.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반근이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는 반근을 쳐다보았다.
“반근, 아씨께서 마차 두 대를 줄이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거라고······.”
저쪽에서 걸어오며 말하던 조 집사는 대문 앞에 선 소년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가, 상대를 알아보고 더욱 놀랐다.
“아니, 너, 너, 너는 그·········.”
그날 밤 산골짜기, 늑대의 울음소리, 커다란 두봉을 걸치고 있던 그 불량한 소년이 아닌가.
“늑대 떼를 몰고 온 그 녀석 아니냐?”
조 집사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맞소. 납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늑대 떼를 몰고 온 그 녀석입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 또 그러고 있네요.”
뭐라고?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 또 그런다는 게 무슨 말이야? 또 뭐가? 또 늑대 떼를 몰고 왔다고?
조 집사가 뭐라 더 묻기도 전에 안에서 반근이 나왔다.
“공자님, 안으로 드세요.”
반근이 웃으며 길을 비켜섰다. 진안 군왕은 곧장 걸음을 옮기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어 대문 안을 쳐다보았다. 마당은 아주 작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곧장 안채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작았다. 따라서 대문을 열자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짙은 색상의 치마를 입고, 커다란 검은색 두봉을 걸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오목조목한 얼굴, 새까만 두 눈과 담담한 표정이 보였다.
언제 보든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두봉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진안 군왕은 그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휘잉 부는 밤바람에 화르르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작고 여윈 체구에도 정해신침(定海神針: 중국 황룡 동굴 내 가장 긴 종유석)처럼 우뚝 서 있으면서, 주변의 비명 소리와 늑대 울음소리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저놈들의, 코를, 태워.”
여인이 횃불을 들고 말했다. 침착하고, 태연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저놈들의 코를 태워라! 저놈들의 코를 태워! 저놈들의 약점을 태워 버리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