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83
교랑의경 483화
“거짓말하는 사람은 숱하게 봤어도, 저렇게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귀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할 줄 모른다면 정말로 할 줄 모르는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귀비가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전하께서는 정 낭자에 대해서 참 많이도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둔해서 그런지, 도무지 정 낭자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어서요. 그럼 그날 경왕부에서 칠현금을 연주한 사람이 다른 사람인가요?”
귀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 낭자,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애가는 낭자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 없구나.”
“마마께 아뢰옵니다. 좀 전에 마마께서 소녀에게 물으셨지요, 또 무슨 곡을 할 줄 아느냐고요. 소녀는 딱 한 곡밖에 연주할 줄 모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떻게 딱 한 곡만 연주할 줄 알죠?”
최 악공이 들어오기 직전 질문했던 비빈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 이 한 곡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왜 딱 한 곡만 가르쳤대? 참 이상하지. 이래서 바보였던 저 낭자가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건가?
태후가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자신의 귀밑머리를 만졌다.
“그럼 그 곡이라도 연주해 보아라.”
“마마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곡도 연주할 수 없습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또 왜?”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여기는 새로운 거처가 아니기에 액막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곡도 연주할 수 없지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귀비궁에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너희가 보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구나. 태후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셨는데!”
귀비가 탁자를 손으로 탁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에 꽂은 장신구가 격하게 흔들렸다. 궁녀와 내시들이 귀비의 눈치를 보며 따라 웃었다.
“그럼 도대체 정 낭자는 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하기 싫다는 거예요?”
궁녀가 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게냐? 내가 보기에는 그냥 바보인 척하는 게야.”
귀비가 손으로 입을 가리지도 않고 크게 웃었다.
“신선의 제자라는 소문을 등에 업고,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는 것을 등에 업고, 또······.”
신이 나서 말하던 귀비가 돌연 웃음기를 거두고 냉소를 지었다.
“이제는 진안 군왕까지 등에 업었지. 내가 보기에, 정 낭자의 연주에 홀린 사람은 비단 최 악공뿐만이 아니야.”
같은 시각, 태후궁.
머리끝까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는 황제까지 불러와 화를 냈다.
“그 계집이 만백성을 현혹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젠 애가까지 바보로 아는 거요? 뭐라? 새로운 거처가 아니라 연주할 수 없다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이오! 말을 지어내 거절할 거면 그럴싸한 말로 성의라도 보일 것이지!”
“마마.”
진안 군왕이 입을 열려고 하자, 태후가 삿대질까지 하며 고함을 쳤다.
“그 입 다물어라!”
태후의 삿대질에도 진안 군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헤헤 웃으며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정 낭자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닙니다. 정 낭자의 말대로 스승께 배운 곡이 딱 그 한 곡뿐인데, 그게 하필이면 액막이할 때만 연주하는 곡이라고 하잖습니까. 액막이용 곡조를 어찌 사람에게 감상하라고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감상을 위한 글씨를 안 쓰느니 뭐니 하는 말처럼 말이더냐? 그게 다 무슨 헛소리야! 세상 어느 누가 곡만 배우고 악기를 배우지 않는단 말이야!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어!”
태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그럼 이젠 들어 본 적 있으시네요.”
진안 군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태후가 손을 들고 진안 군왕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너는 오늘 정 낭자의 입이 되려고 궁에 따라 들어온 것이냐?”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나무라자, 진안 군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소손이 열었던 연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정 낭자가 오늘 궁에 불려온 것이니, 소손이 당연히 따라와야죠.”
너무나도 당당한 진안 군왕의 태도에 태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황제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짐이 가서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어마마마께 제대로 된 해명을 하라고요.”
황제가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 정교랑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아니라,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황제가 편전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정교랑은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배짱이 대단하더구나. 못하는 말이 없어.”
황제가 말했다.
“폐하, 할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왜 배짱을 가져야만 말할 수 있는지요?”
할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왜 배짱을 가져야만 말할 수 있는 거냐고?
황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교랑을 잠시 쳐다보았다.
– 신은 뭐든 있는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정 낭자가 꽤 솔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그때 무례하게 말하며 협박했을 때도, 뒤늦게 사과한 지금도, 정 낭자는 한결같이 무덤덤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요.
– 꼭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서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때로는 밉기도 합니다.
그래, 참 밉기도 하구나. 태후를 저 정도로 화나게 만들다니.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떤 연유로 곡만 배우고, 악기는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냐?”
황제가 물었다.
정교랑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버지, 저는 뭘 배워야 해요?”
“다 배워야 한다.”
“아버지, 제가 아무리 똑똑해도 다 배울 수는 없잖아요.”
“배울 수 있지. 뭐든 일도(一道)만 파면, 다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일도가 뭔데요?”
정교랑이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일도,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이지요. 스승님께서 제게 칠현금을 가르치실 때,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액막이 목적으로요. 그래서 소녀는 추풍조 한 곡만 배웠습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일도라, 그건 무슨 이치인 게냐?”
“일도를 깨우친다면 무엇을 배우더라도 한 가지를 제대로 배울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소녀가 칠현금을 배웠다면, 분명 배움에는 끝이 없었을 것이고 평생 그 칠현금 한 가지에만 몰두했을 겁니다. 하지만 칠현금이 아니라 한 곡만 배우게 된다면, 그 한 곡을 제대로 깨우쳤을 때 배움이 끝나지요. 그럼 그때부터는 또 다른 일도에 집중하여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요.”
그런가?
황제가 놀라서 물었다.
“죽을병이 아니면 못 고친다는 그 말도, 그런 연유에서 한 것이냐? 네 스승이 가르친 의술이 오직 그 한 가지여서?”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편자도 일도고, 신비궁도 일도고, 글씨도 일도라니.”
황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잠시 넋을 놓았다.
“일도,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도리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네 스승이 진정한 기인이로구나. 참으로 아까운 인재야.”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을 뜬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그런 귀인을 조정에서 일찍이 알아보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구나. 일찍이 그자를 찾아내어 조정 대신으로 임명했더라면, 벌써 오랑캐들의 씨를 말리고도 남았겠지.
그런 기인의 유일한 제자가 저 바보였다는 것도 아까워. 저 여인에게 그런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전수했는데도, 저 여인의 심지가 온전치 않은 탓에 충분히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정상적인 사람을 제자로 삼았더라면, 분명히 청출어람이 되어 그 기술들을 더욱 정교하게 갈고 닦을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안타까운지고.
황제의 이야기를 들은 태후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괴상한 스승 밑에서 괴상한 제자가 난 셈이구려.”
태후가 말했다.
“원래 기인 중에는 괴상한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가 한숨을 쉬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진안 군왕이 기쁘게 말하고는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는 무슨 감사?”
태후가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진안 군왕이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 마마의 화를 풀어 주셨으니까요. 마마께서 계속 진노해 계셨더라면, 이번 일이 더욱 커졌겠지요. 그럼 소손이 저지른 잘못도 더 커지는 것이고요.”
태후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유의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삼가거라. 위낭, 너는 궁에서 쭉 자랐으니 바깥사람들이 얼마나 험악하고 영악한지 모를 게다. 과거에 바보였던 여인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돼. 그 여인의 눈에 누가 바보일지는 모르는 일이야.”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한 뒤, 큰절을 올리면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소손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궁에 남아서 애가와 함께 저녁을 먹고 가거라.”
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손이 출궁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몇 번이나 궁에 드나들었습니다. 소손이 여기 남아 저녁까지 먹고 간다면, 마마께서는 분명히 대신들의 질책을 받고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실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애가가 그들의 입을 무서워할까.”
“마마께서는 괜찮으시겠지만, 소손은 마마께서 질책받으실 것이 마음 쓰입니다.”
진안 군왕이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있던 태후가 미소를 지었다.
“입만 살아서는. 저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건지 모르겠네.”
“짐은 건강이 좋지 않아, 위낭을 가까이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황제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태후가 황제를 향해 눈을 흘겼다.
“황상, 그렇게 급하게 결백을 주장할 필요는 없잖소? 애가도 알고 있소. 애가가 위낭을 데려다 키웠다는 거. 다 애가를 보고 배운 거겠지.”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보니, 과연 어마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태후가 침을 뱉는 시늉을 하고는 황제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애가는 저 정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소.”
태후가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황상이 나랏일을 위해 정 낭자를 어떻게 치켜세우든 상관하지 않겠다만, 애가까지 정 낭자의 일에 휘말리지는 않게 하시구려.”
황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어마마마, 정 낭자는 여인의 몸입니다. 짐이 여기서 더 어떻게 치켜세울 수 있겠습니까. 정 낭자에게 관직을 하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정 낭자는 공을 세웠으니, 짐이 이미 낭자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상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정 낭자를 더 치켜세우고 싶다 한들, 조정의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여인의 몸이라면 아무래도 혼인이 가장 중요하겠지.”
태후가 천천히 말했다.
“정 낭자가 모친을 일찍 여의었다고는 하나, 친부가 아직 건재한데 짐이 어찌 낭자의 혼인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맞소. 그건 남의 집안일이지. 하지만 정 낭자는 과거에 몹쓸 병을 앓았으니, 오불취(五不娶: 아내로 삼아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경우)에 해당하오. 현명한 스승을 만나 병이 완치되었고는 하나, 세상에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정 낭자에게 접근하는 이도 있을 거요. 어찌 됐든, 정 낭자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니까. 집안 어른이 어련히 알아서 혼사를 진행하겠냐마는, 황상도 정 낭자의 혼사에 대해 신경을 써 주시구려. 정 낭자와의 혼담을 기회 삼아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은 늘 있기 마련이니까.”
권력에 빌붙으려는 비천한 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