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82
교랑의경 482화
이젠 아씨까지 합세했네.
더 듣고 있다가는 어지럼증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반근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차를 우렸다.
“내가 신경 쓰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말 돌리지 마요. 정교랑, 자기 자신부터 생각하면 안 돼요?”
“난, 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는단 거예요. 진호, 내가 무심코 한 말을 남이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남에게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걱정만 하다가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최소한 내가 말할 때는, 내가 하는 말에 다른 뜻을 얹으려 하지 않는 것이고요.”
정교랑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잠시 정교랑을 쳐다보던 진십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릴 때,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찻잔을 들어 올리던 진십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난 당신의 초대를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 아무 선물이나 준 것도 아니에요. 나에게는 선약이 있었고, 선물도 주고 싶던 것으로 준 거지, 겉치레로 준 게 아니니까요.”
정교랑이 진십삼의 앞으로 간식 접시를 더 밀어 주면서 말했다. 진십삼은 눈을 크게 뜨고 간식 접시와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이요?”
진십삼이 물었다. 정교랑이 빙긋 웃었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냥 장난삼아 이야기한 건데, 낭자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줄 몰랐네요.”
진십삼이 활짝 웃으며 간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난 개의치 않으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그런데 정말로······.”
잠시 뜸을 들이던 진십삼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말할 때 좀 더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재능 있는 사람은 도리어 시샘을 받아 화를 입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정교랑이 가볍게 예를 표하며 감사를 전했다. 차 한 잔과 간식 세 개를 얻어먹은 진십삼이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연말에는 낭자를 귀찮게 하러 오지 않겠습니다. 과거 시험이 코앞이라, 이제는 스승님 댁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걸고 공부해야 하거든요. 무슨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사람을 보내 날 찾아 줘요.”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십삼을 배웅했다. 정교랑은 문밖까지 나와 진십삼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생 댁에서 공부하겠다고? 예전에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 부인이 놀란 얼굴로 진십삼에게 물었다.
“마음이 영 불안해서요. 장원급제하겠다고 동네방네 큰소리를 쳤는데, 만에 하나 낙방이라도 한다면 어머니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마음을 다잡고 스승님 댁에서 공부만 하려고요.”
진십삼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얼씨구, 우리 십삼이 이젠 긴장도 할 줄 아네?”
진 부인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머니, 긴장하는 게 아니라 늠름해진 거죠.”
진십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학문의 길에는 끝이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서는 아니 되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밖으로 걸어 나오던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을 존경하고, 도리를 중시해야 하느니라. 사람은 똑똑하되 경망스러워서는 안 된다. 네가 세상에 발을 내딛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항상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진십삼이 예를 올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소자는 내일 나갈 채비를 마치고, 스승님 댁에서 섣달 23일까지 공부하며 지내겠습니다.”
진 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삼.”
문을 나서는 진십삼을 바라보던 진 부인이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제는 방에 갇혀야 할 만큼, 네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는 거니?”
진 부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진십삼은 몸을 흠칫할 뿐, 진 부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진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이젠 장난도 안 통하다니. 이번에는 정말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 보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연주가 경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던 태후는 기어이 정교랑을 태후궁으로 불러들였다.
“연주, 하고 싶어요?”
황궁 문을 넘어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물었다.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불렀다는 건, 분명 정 낭자의 연주를 듣고 싶어서일 테지.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떻게 연주를 하나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우리 하지 말죠.”
앞서서 길을 안내하던 내시가 마른기침했다. 사담을 나누지 말라는 뜻을 두 사람에게 전하는 듯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겁먹을 거 없어요.
입 모양으로 말한 뒤, 진안 군왕은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가 큰 소리로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도착을 알리자, 이미 태후궁에 도착해 있던 비빈들은 일제히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들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이 문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귀비였다.
지난번에 태후궁 앞에서 정 낭자를 봤을 때는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고, 내가 정 낭자를 별로 신경 쓰지 않기도 했지. 뒤늦게 태후궁으로 가서 정 낭자를 보려고 했을 땐, 진안 군왕이 이미 정 낭자를 데려간 후였고.
문이 열리자, 미소를 머금은 진안 군왕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정교랑이 보였다.
다들 아직 정교랑의 용모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일자로 뻗은 어깨와 걸음을 옮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움직임이 없는 치맛자락, 별다른 장신구 없이 우아하게 올려묶은 머리카락만 보아도 종친인 진안 군왕과 잘 어울릴 만한 벗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기개와 분위기는 보잘것없는 벼슬아치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규수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심지어 저 여인은 십수 년을 바보로 살았다지? 그래서 사람들이 저 여인을 신선의 제자라 여기는구나.
“소손, 태후마마를 뵈옵나이다.”
진안 군왕이 태후에게 큰절을 올렸다.
진안 군왕이 허리를 숙이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뒤에 있던 정교랑에게 향했다. 진안 군왕과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정교랑은 정중하게 소매를 들고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이리 오너라.”
태후가 미소를 머금고 진안 군왕에게 손짓했다.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켜 태후 옆에 앉았다.
“소녀, 태후마마를 뵈옵나이다.”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일어나거라.”
태후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도 않은 채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는 비빈들을 곁눈질로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정씨,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정리하고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에서는 황공함이나 부끄러움 따위를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事無不可對人言), 남에게 구경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나아갈 때는 정도를 지키고, 물러나야 할 때는 깔끔하게 물러나라.
그것이 바로 우리 정씨 가문의 자손이니라.
양쪽에 앉아 있던 비빈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정교랑을 보고 놀란 이도 있고, 부러움의 눈빛을 보내는 이도 있고,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는 이도 있었다.
“정 낭자는 칠현금도 탈 줄 안다지?”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단 한 곡을 알 뿐이에요.”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딱 한 곡밖에 모른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최 악공을 매료시킨 그 추풍조 말인가요?”
비빈 중 한 명이 묻자, 정교랑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최 악공 이야기가 나오자, 태후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최 악공을 불러오게 했다.
“최 악공이 영영 넋이 나간 채로 지낼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정신을 차렸더구나. 또 어떤 곡을 아느냐?”
태후가 웃으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전 그 곡 하나밖에 할 줄 몰라요.”
다른 비빈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그 한 곡밖에 못 한다는 거죠?”
정교랑이 대답을 하려던 찰나, 최 악공이 뛰다시피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최 악공은 태후에게 허둥지둥 예를 올린 뒤, 감격한 얼굴로 정교랑을 향해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최 악공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본 비빈들이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이는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불안해진다더니(近鄕情怯), 이럴 때 쓰는 말이로구나.”
태후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말했다.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경외감이 드는 걸 수도 있죠.”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군왕은 사람의 마음을 잘 꿰뚫네요.”
귀비가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책을 많이 읽었으면 더 잘 알았을 텐데, 아쉽게도 제가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요. 제가 평왕의 총명함의 절반만이라도 따라갔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진안 군왕이 귀비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귀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정 낭자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토록 사람을 매료시킨다는 연주를 안 들어 볼 수가 없지.”
태후가 말했다.
“최 악공, 어서 칠현금을 정 낭자에게 내주게.”
비빈 중 한 명이 웃으면서 최 악공을 재촉했다.
“마마, 공주들은 잠시 자리를 비키게 할까요?”
어린 공주를 품에 안고 있던 비빈이 물었다. 다른 공주와 함께 앉아 있던 또 다른 비빈이 기대 반, 두려움 반의 눈빛으로 태후를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연주를 귀담아들었던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하나는 칠현금 소리에 매혹되어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신선의 깨우침 덕에 칠현금 실력이 신선의 경지에 이른 최 악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곡이 아닌데도 춥다고 소리친 경왕이었다.
황실 공주들의 칠현금 솜씨는 훌륭해도 그만 훌륭하지 않아도 그만이었지만, 정교랑의 연주에 매혹되어 신선의 가르침을 얻는다면 그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비빈들은 자기 소생의 공주가 최 악공처럼 신선의 가르침을 깨우쳤으면 하는 마음에 정교랑의 연주를 기대하는 한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게 아닌 연주에 반응한 경왕의 꼴이 날까 봐 두려워했다.
“자리를 피할 게 뭐 있지? 칠현금 연주 하나 못 듣는 이가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비빈들의 생각을 알아챈 태후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태후에게 질문했던 비빈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최 악공은 공손한 태도로 정교랑에게 칠현금을 건넸지만, 정교랑은 칠현금을 받지 않았다.
“정 낭자?”
최 악공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불렀다. 순간 정교랑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생각이 최 악공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렇게나 어린 낭자였다니!
며칠 전에 정교랑이 생각보다 어린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눈앞에서 정교랑의 나이를 가늠하게 되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린 낭자가 어떻게 그리 구슬픈 추풍조를 연주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정 낭자?”
칠현금을 받지 않는 정교랑의 모습에 태후가 정교랑을 불렀다.
왜 멍하니 서 있는 거지? 혹시 놀랐나? 하긴, 여기는 황궁이니까.
“소녀는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릅니다.”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예를 올리며 말했다.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른다고?
정말 연주할 줄 모르는 거야, 아니면 연주하지 않겠다는 거야?
“뭐라고 하였느냐?”
태후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소녀는 칠현금을 연주할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정교랑이 다시 대답했다. 태후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