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19
교랑의경 519화
“방백종이 정 낭자께 부탁드립니다. 경왕을 돌봐 주십시오.”
진안 군왕이 말했다.
경왕을 돌봐 달라고?
범강림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경왕을 다시 황궁 안으로 들여보내 괴물 취급을 받으며 갇혀 있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궁 밖에 두자니 안심이 안 되고요. 먹고 마실 줄도 모르고, 추운지 더운지 아픈지 괴로운지도 모릅니다. 은혜도, 원한도 기억하지 못하니 어쨌든 정상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나한텐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요.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생각나는 건 친구뿐이네요. 그래서 부탁을 좀 할까 합니다.”
친왕을 돌봐 달라고? 그, 그런 일을 누가 감히 감당한단 말인가!
범강림은 다시금 예를 표하는 진안 군왕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이더러 경왕을 돌봐 달라는 건 또 무슨 뜻이지? 누이가 경왕을 돌보면, 자기는 뭘 하려고? 돌봐 달란 말이 아니라 병을 치료해 달라는 말인가?
“그럴게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한 건가? 이렇게 깔끔하고 시원시원하게?
범강림이 다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감격을 표하거나 무언가를 더 묻지도 않은 채 대뜸 목패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있으면, 평왕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 겁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안에 있던 이들은 전부 일어나 배웅하러 나갔고, 진안 군왕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질문하고 답하고, 청하고 응낙하는 게 처음부터 끝까지 시원시원하네.
“누이.”
범강림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세상엔, 언제나 일이 있기 마련이죠.”
정교랑이 빙긋 웃었다.
“너무 걱정 마요. 대단한 일은 없을 거예요.”
누이의 말을 들으니 범강림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가씨, 밥 먹고 가요.”
황씨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케, 신경 쓰지 마요. 난 저쪽에 가서 먹을게요.”
반근은 어느새 두봉을 가져와 정교랑에게 걸쳐 주었다. 아기를 안고 대문 밖으로 나온 범강림과 황씨는 정교랑이 마차를 타고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보, 그 전하 말인데······.”
잠시 망설이던 황씨가 못 참겠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한테 엄청······ 잘해 주는 것 같아요.”
“누이는 뭐 잘해 주지 않나? 누가 됐든 인간성이 남아 있고 예의를 지킬 줄 알면, 누이는 다 잘해 주지. 도움을 준 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누이는 열 배, 백 배, 천 배로 돌려주는 사람이잖소.”
멈칫했던 황씨가 실소를 터트리며 손을 들어 범강림을 탁 쳤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범강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씨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무슨 얘긴데?”
황씨는 범강림을 잠시 노려보다가 아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말을 말아야지!”
황씨가 아기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범강림은 영문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
“같은 여인인데 어쩜 저리 달라. 누이 말하는 것 좀 봐. 얼마나 간단명료한지.”
정씨 가문의 새 저택 마당은 새집이라 그런지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부인, 부인, 고기와 찬거리를 사 간 돈을 달라고 재촉합니다.”
여종 하나가 대청으로 급히 들어와 말했다. 벌써 대청에 들어와 있던 여종 서넛이 돌아보았다.
“부인, 향초 값도 더는 미룰 수 없어요. 벌써 신을 모셨는데 향불을 꺼트릴 순 없잖습니까.”
“부인, 예약해 놓은 장신구는 어떻게 할까요? 점포에서 사람이 와 재촉하네요. 필요 없으면 다른 사람한테 주겠다면서요.”
여종들이 앞을 다투어 말을 올렸다.
“그만, 그만!”
정 이부인이 소리를 지르며 탁자에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대청 안에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어머니, 어머니.”
밖에서 정칠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 장신구는 왜 새 옷이랑 같이 안 왔어요?”
정 이부인은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께서 좋은 거로 골랐다고 하셨잖아요.”
정칠랑이 말했다.
“그래, 알았다. 금방 보내 주마. 그만 나가 보거라. 어미가 바빠서 그래.”
정 이부인이 손을 휘휘 내젓자, 정칠랑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나가려 했다. 그때 어린 몸종 하나가 기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부인, 큰 아씨께서 돌아오셨어요!”
그 말에 대청에 있던 이들이 전부 반색을 했다.
“어서 가자, 어서.”
정 이부인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여종들도 정 이부인을 따라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정칠랑만 대청에 홀로 남아 씩씩거렸다.
“뭐 하는 거야? 다들 왜 나가는 건데?”
“큰 아씨를 마중 나가는 거죠.”
옆에 있던 어린 몸종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정칠랑은 눈을 부라리며 몸종을 노려보았다.
“마중을 나가? 대체 왜? 걔가 무슨 아버지라도 돼?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온 가족이 배웅하고 마중을 나가게?”
“무슨 일이냐? 칠랑, 갑자기 아버지는 왜 찾아?”
문밖에서 정 이노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세밑 휴가에 들어간 정 이노야가 평상복 차림으로 건들건들 움직이며 들어왔다. 사랑스러운 딸을 본 정 이노야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아비가 너와 아우를 데리고 나가 장터 구경을······.”
“아버지!”
정칠랑이 정 이노야의 말을 끊으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걔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어머니가 아랫것들을 데리고 마중도 나가고 배웅도 하는 것 좀 보세요!”
“걔라니?”
정 이노야가 영문을 몰라 물었다.
“언니 말이에요.”
정칠랑이 못마땅한 투로 대답했다. 정 이노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것.”
정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콧방귀를 뀌었다.
“밖에서도 버릇없이 굴며 사고를 치더니, 집에서도 예의범절을 무시하고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구나. 체통을 지켜야지!”
한편 같은 시각 정 이부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교랑과 함께 마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춥지는 않고? 저녁엔 뭐 먹고 싶니?”
정 이부인은 정교랑이 더우면 더울세라 추우면 추울세라 살뜰한 모습이었다. 정교랑이 정 이부인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오자 여종들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교교, 이제 곧 새해잖니. 집안에 사야 할 게 적지 않은데······.”
“수고가 많으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정 이부인은 정교랑의 대답에 더욱 환히 웃었다.
“한 식구끼리 무슨 그런 말을 해.”
정교랑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반근이 건네는 따뜻한 차를 받았다. 정 이부인은 목록 하나를 내밀며 무엇을 살 건지 하나하나 소상히 일러 주고, 새로 보내 준 옷이며 장신구는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하던 정 이부인은 정교랑보다 먼저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교교.”
정 이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돈이 적잖이 들 것 같은데······.”
반근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알다시피 우리 정씨 가문은 분가를 안 했잖니. 집안 재산은 전부 대방 손에 있어. 집을 떠나면서 받은 돈은 오는 길에 다 썼고 말이야. 여기 도착해서도 돈이 많이 들었고······.
새해를 사치스럽게 맞이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게 맞이하는 건 또······.”
정 이부인은 말을 빙빙 돌리며 앓는 시늉을 했다.
“원하는 게 뭐죠?”
“돈이야.”
정교랑이 말을 자르며 묻자 정 이부인은 엉겁결에 솔직히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돈이 필요할 땐, 반근한테 말하면 돼요. 돈은 다 반근한테 있거든요.”
반근?
정 이부인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아니에요.”
반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둠이 내리자 마차 한 대가 대문을 통과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냐?”
정씨 가문에서 따라온 시종이 소리쳤다. 이어 시종은 대문 근처에 서서 대화 중이던 두 시종을 보며 물었다.
“너희는 왜 묻지도 않아?”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시종은 정교랑을 따라 이곳으로 온 이들이었기에 정씨 가문의 시종과는 잘 모르는 사이였다. 물론 당초 강주에서 본 적이 있긴 했다. 듣기로는 주 노야의 사람이라고 했다.
명목상으로는 문지기지만 형식적일 뿐이었고 가끔 청소나 하는 정도지 문은 늘 정씨 가문 사람이 지켰다.
“그 반근 낭자야.”
“그 반근?”
정씨 가문의 시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퍼뜩 깨달았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고, 온몸에 금은을 두르고 있으며 심부름 따위는 전혀 안 하는 그 하녀?”
“반근 낭자, 반근 낭자.”
두 여종이 문 앞에서 외쳤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반쯤 풀어 헤친 시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왜요?”
놀란 두 여종이 뒷걸음질을 쳤다.
“부, 부인께서 잠깐 오라고 하시는데.”
여종 하나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여종은 시녀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갈 거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시녀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딱히 기분 나빠하는 내색 없이 말했다.
“알았어요. 옷 갈아입고 머리부터 좀 빗고요.”
내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정 이부인은 시녀가 왔다는 말에 얼른 일어나 나가 보려 했다. 정 이노야가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딸자식을 마중 나가는 것도 모자라 이젠 시녀 같은 아랫것도 직접 마중을 나가려고? 체면은 어디로 집어 던진 게야?
정 이부인은 정 이노야가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는 걸 보고 눈웃음을 지으며 달래 준 후, 얼른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인을 뵈옵니다.”
위아래도 모르진 않는 걸 보니 그래도 똑똑하구나. 안 그랬다간 이 자리에서 매질해 죽여도 시원치 않은데!
정 이노야는 차가운 냉소를 짓고 계속해서 책을 들여다보았다. 시선은 책을 향해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바깥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가 있었다.
“이제 곧 세밑이라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안 그래도 부인께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우선 일손이 부족한 건 오늘 심부름할 몸종이랑 여종, 사환을 골라 놨으니, 내일 데려올 거예요.”
“정말 잘됐네. 집에서 데려온 사람들도 있으니 많이 필요하진 않아. 청소랑 허드렛일 정도만 하면 돼. 그보단 새 물건들을 사들이는 게 더 급한데······.”
“네, 필요하신 만큼 양껏 사세요. 정산은 나중에 제가 한꺼번에 할게요.”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예의 바르고 깍듯하며 목소리도 사근사근하여 듣기 좋구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부류는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지?
“반근, 더 사야 할 건 없는 것 같니?”
“소인은 안 봐도 돼요. 부인께서 알아서 하세요.”
저쪽에서 정 이부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정 이부인이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들어왔다.
“노야, 올해는 얼마나 많은 손님이 오갈지 모르겠네요. 선물을 한 백 개쯤 준비하면 될까요?”
정 이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백 개?
강주 집에서 친구와 지인들한테 전부 선물을 보낼 때도 그리 많이 필요하진 않았는데.
“아휴, 아무튼 많이 준비해서 나쁠 것 없어요. 남으면 뒀다 쓰면 되죠. 그 애한테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돈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으니, 어디 한번 펑펑 써 봐야겠네.
정 이노야가 손뼉을 쳤다.
그게 문제였어!
“문제라니요?”
정 이부인은 여전히 여운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장부를 꺼냈다.
먹을 거며 마실 거며, 새 옷이며 장신구까지 전부 아무 문제 없어. 문제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뭘 더 사야 하나 고민하는 정도일까.
물론 금은보화가 우선이지. 그래야 나중에 칠랑의 혼수로도 쓰고······.
아니지, 칠랑 혼수는 급한 게 아니잖아. 그때쯤이면 제 언니도 시집을 갔을 텐데, 설마 동생을 초라하게 보내겠어?
일단 일상에서 쓸 것부터 마련하자. 새해를 맞이하려면 접대해야 할 곳도 많은데, 경성에서 창피당하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