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92
교랑의경 592화
궁 안이 한창 혼란스러울 때, 정교랑의 마차가 드디어 궁문 앞에 도착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만 돌아가세요.”
정교랑이 몸을 돌려서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진호에게 예를 표했다. 진호는 자신에게 예를 올리는 정교랑이 아닌, 그녀의 뒤를 내다보았다.
왜 저렇게 소란스러워 보이지?
정교랑이 진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궁문 너머에 서 있던 위병이 정교랑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이어 몇 명의 내시가 비틀비틀 허둥대며 정교랑을 향해 뛰어왔다.
“정 낭자, 정 낭자, 드디어 오셨군요.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내시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제가 정 낭자를 부른 이유는 문답하기 위함일 텐데, 어째 내시들의 표정과 태도가 영 이상하네.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정교랑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진호가 무의식적으로 정교랑의 손목을 잡았다.
반근이 깜짝 놀랐다.
대낮에 모두가 보는 궁문 앞에서 어쩜 저런 행동을 하시는 거야! 우리 아씨는 이미 군왕 전하와 혼인을 약속했는데!
반근이 진호를 밀어내려고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가려던 찰나, 진호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반근이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뭐가 또 틀어졌다고?
“아이고, 어서 서두르세요!”
내시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정교랑을 끌고 갈 기세로 소리쳤다. 정교랑이 웃으며 진호에게 예를 표했다.
“괜찮아요.”
머뭇거리던 진호는 결국 손을 놓았다. 정교랑의 손을 놓음과 동시에 그는 무척 괴로워졌다.
마음이 왜 이러지? 이 손을 놓으면, 앞으로 낭자를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참 이상하기도 하지.
아니야, 지금은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혼사는 사소한 일이니까.
아, 혼사가 사소하다면······.
멈칫했던 진호는 이내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설마 지금까지의 모든 게, 다 낭자의 예상 안에 있었던 일인 건가? 그렇다면······.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이 모든 일은 다 낭자와 무관한 일이야!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전부 진안 군왕이 낭자를 이용했기 때문이야.
진호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럼 가 봐요.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내가 호기심이 많은 것으로 칩시다. 낭자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싶어서 그래요.”
진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정교랑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예를 표하자, 기다리다 못한 내시들이 곧바로 정교랑의 팔을 잡고 끌다시피 하면서 그녀를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역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시들의 손에 끌려가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고 설핏 웃음이 났다.
저 여인도 참 대단하지. 내시들에게 끌려 저리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도, 넓은 보폭으로 여전히 안정감 있게 걷다니.
궁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사방에 깔린 금군 병사들은 무기를 더욱 세게 쥐고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근정전 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연로한 조정 중신들인지라, 강산이 변하는 일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도 이번 일은 가히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소란스러움이 멈추자, 대신들은 차분함을 되찾고 질서정연하게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했다.
하지만 근정전을 향해 걸어오는 정교랑을 본 순간, 수위를 서던 금군, 내시, 그리고 대신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정 낭자, 우선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진소가 말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근정전 안쪽에 있는 황제에게 가 있었고, 진소와 몇 명의 대신들만이 자리에 남아 평왕을 지켰다.
정교랑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진소의 말에 놀란 기색도 없이 조용히 그를 따라 근정전의 편전으로 갔다.
대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편전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신의 낭자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근정전의 편전은 대신들이 잠시 쉬는 곳인지라 그리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편전 안에는 침상 위에 홀로 누워 있는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진소가 걸음을 멈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 뒤섞였다.
“정 낭자, 이분은 평왕 전하입니다.”
진소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평왕 전하?
무덤덤하던 정교랑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 사람이 바로 평왕 전하로구나.
침상 위로 시선을 옮기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정교랑의 표정에 놀라움이 더해졌다. 하지만 진소의 눈에 정교랑은 놀란 게 아니라 감탄하는 것처럼 보였다.
“벼락에 맞았네요.”
벼락에 맞다니.
정말 재미있네, 아주 뜻밖의 일이야.
원래대로라면, 평왕은 내년에 제위에 올라 장장 사십오 년 동안 나라를 통치할 다음 황제가 될 텐데, 이렇게 없어지다니. 역사서에도 평왕에 대한 기록은 없어지겠군.
역시 바뀌는구나.
하늘이 내 성의를 외면하지 않았고, 나를 속이지 않았어. 하늘은 나를 속이지 않아.
우리 정씨 일족이 멸문의 화를 입을 거라고 하니 멸문의 화를 입었고, 변할 거라고 하니 정말 변했어.
바뀔 수도 있구나. 정말 바꿀 수 있어.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주먹 세게 쥐었다.
아버지, 보세요. 정말로 바꿀 수 있어요.
“정 낭자.”
정교랑의 표정을 보다 못한 진소가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그는 정교랑에게 이렇게 많은 표정이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놀라서, 그런 거겠지?
정교랑이 감정을 다스린 뒤, 진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보라고 데려온 게 아니오.”
진소가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대인께서는 제가 뭘 했으면 하시는지요?”
정교랑이 물었다.
또 바보인 척하는 거냐!
진소가 이를 악물었다.
“살릴 수 있습니까?”
진소가 평왕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대답했다.
“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죽을병이어야만 고친다 하지 않았소?”
“대인, 저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다고 했습니다.”
정교랑이 침상에 놓여있는 평왕의 시체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요.”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인 거고, 이미 죽은 사람은 시체에 불과하다.
평왕은 죽었어. 벼락에 맞은 그 순간에 죽었다고.
진소가 속으로 탄식했다.
그건 나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대신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제에게 달려가진 않았을 테지.
지금의 평왕은 그저 시신 한 구일 뿐이다.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잘 보이려는 사람이나, 지키려는 사람이 없어진 거지.
그래도 평왕은 황제의 유일한 혈육이자, 건강하게 자란 황자인데, 이를 어쩌면 좋을꼬. 이젠 없어졌다. 평왕이 없어졌어.
“진 대인, 진 대인.”
대전 밖에서 내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부르십니다.”
황후가 정 낭자를?
설마 폐하도······.
진소는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숨이 가빠왔다.
폐하까지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시기에 폐하까지 쓰러지시면 안 돼!
진소가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그를 본 내시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대인, 태의들이 이미 폐하를 진맥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은 일단 무탈하나, 황후마마께서 정 낭자가 궁에 들어온 김에 폐하의 용태를 한번 봐 주십사 하셔서······.”
지금은 일단 무탈하다······.
진소는 귀가 웅웅 울리는 느낌에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탈하시면 됐다. 잠시여도 좋으니, 무탈하시면 됐다.
“대인께서도 어서 그리로 가시지요.”
내시가 조용히 진소에게 말했다.
진소가 곁눈질로 편전을 훑어보았다. 내시의 눈빛에는 불쾌감과 두려움, 그리고 당장이라도 이곳을 피하고 싶다는 기색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평왕을 저런 눈빛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무려 평왕이야. 제위를 이어받을 황위 계승자이고, 장차 우리가 충심으로 모셔야 했던 천자. 하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모든 게 바뀌었어.
평왕이 시체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더욱 골치 아픈 건 벼락에 맞아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평왕이라도, 벼락 맞아 죽은 자의 시체라면 황릉에 안장되지 못할 수 있어.
내시들까지 저렇게 불쾌감을 내비치다니, 참으로······.
입술을 움찔거리던 진소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잠시 편전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참으로 무정하구나.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기니.
“가세.”
진소가 짧게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비가 그치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바닥에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만이 좀 전의 폭풍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황제의 침전은 평왕의 시신이 놓여있는 편전보다 시끌벅적했다. 아무리 근정전에서 대조회를 참가하는 조정 관리들이라고 해도, 황제의 침전까지 출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황제의 침전에 몰려들었다.
관리들은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은 일이 너무도 소름 끼쳤다. 아직까지도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침전 안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소가 침전을 향해 걸어오자, 관리들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평왕 전하께서는······.”
가장 앞장서 있던 관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진소에게 묻자, 진소는 말 대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그대로 두기에는······.”
관리가 재빨리 화두를 돌려서 말했다.
그렇게 참혹하게 죽었는데 버림까지 받은 친왕은 아마 평왕이 처음일 테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폐하는 어떠신가?”
진소가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마마, 정 낭자를 모셔왔습니다.”
내시의 말을 듣자,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던 황후와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이 시선을 돌렸다.
“들라 하라.”
황후가 말했다.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마마를······.”
정교랑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려던 찰나, 황후가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예는 됐다. 어서 이리 와서 살피거라. 폐하께선 어떠하시냐?”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고개를 들자, 정교랑과 황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저 여인이 바로 정 낭자로구나. 과연 신선의 제자다운 모습이로군.
황후가 속으로 생각했다.
정교랑이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의 침상 옆에 서 있던 태의들이 정교랑을 위해 자리를 비켰다. 비빈들과 공주들은 울음을 멈추고 긴장한 기색으로 정교랑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정교랑이 황제의 안색을 살핀 뒤, 손목의 맥을 짚었다. 정교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던 이 태의도 정교랑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다.
침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교랑이 낯설 수도 있겠지만, 이 태의는 정교랑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당초 정교랑이 경성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료를 봤을 때도 이 태의는 정교랑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여인이 진 노태야를 대할 때는 무척 여유롭고 담담해 보였어. 그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지.
하지만 지금 이 여인은 온 정신을 집중한 모습으로 황제의 맥을 짚고 있고, 표정도 꽤 다양하군. 정말로 이 여인이 황제를 치료할 수 있을까?
역시 중풍이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올해 조회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고, 일 년을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뜬다고 되어 있어.
재미있네. 바뀐 것도 있고, 그대로인 것도 있으니.
정교랑이 혼수상태인 황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몹시 진지한 모습으로 황제의 맥을 짚었다.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과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인데, 역사서에는 싸늘한 네 글자만 남았지.
질, 년후훙(疾, 年後薨: 병을 앓다가 이듬해에 훙서하였다).
후세의 사람들은 ‘질(疾’)이라는 글자 하나에 응축된 슬픔과 걱정스러움, 두려움과 황공함을 결코 느끼지 못하겠지. 싸늘하기만 한 그 네 글자를 볼 뿐.
매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