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95
교랑의경 695화
깊은 밤, 야시장과 술집이 즐비한 곳 외에는 경성 전체가 단잠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한 저택의 주위에서 시커먼 그림자 몇 개가 움직였다. 그들이 손에 쥔 것을 담벼락 너머로 힘껏 던지자,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마당 안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불이야! 불이야!”
불꽃이 튀는 동시에 저택 안에서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그림자들이 멈칫했다. 한편 멀리 길가에서도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 불이 났소!”
누군가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흘러들어왔다.
“젠장, 지금쯤이면 순찰 도는 병사들도 술 퍼마시면서 농땡이 피울 시간 아닌가? 왜 하필 지금 이쪽 순찰을 도는 거야?”
그림자 중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냈다.
“거 쓸데없는 소리는. 정말로 누구를 태워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이렇게 겁준 정도로 충분하니까. 어서 가자고.”
다른 사람이 조용히 대꾸했다. 그림자들이 저택 근처에서 사라졌다.
마당 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여보.”
황급히 밖으로 나온 황씨는 겉옷을 걸친 채 회랑 아래 서 있었다. 황씨가 마당에서 시종들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리는 범강림을 불렀다. 회랑의 흔들리는 등롱에 비친 황씨의 얼굴에는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시종들이 범강림을 향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불을 끄러 뛰어갔다.
범강림이 회랑 아래로 걸어왔다.
“괜찮소. 다시 가서 눈 좀 붙이시오.”
황씨가 범강림의 소매를 붙잡았다.
“차라리 우리 다시 서북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요?”
황씨가 말했다.
누이가 떠났고, 고십사가 죽었다. 경성 인근에 마적이 나타났다는 소문까지 퍼진 것을 보니, 지금 경성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벽에 갑자기 집에 불이 붙은 건, 절대로 날씨가 건조한 탓이 아니었다.
범강림이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황씨가 곧바로 물었다.
“우리가 떠나야 할 때.”
범강림이 에둘러 말했다.
황씨가 이어 물으려고 하던 찰나, 후원 쪽에서 화르르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씨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저기엔 또 왜 불이 붙은 거예요?”
황씨가 다급하게 사람을 부르려고 하자, 범강림이 황씨를 제지했다.
“괜찮소. 기왕 누가 불을 질렀다면, 이참에 태워 버리지 뭐.”
뭐라고?
황씨가 경악했다.
이참에 태워 버리자고? 이참에?
황씨가 고개를 들고 후원을 내다보았다. 불이 난 곳은 후원의 고방이었다.
다행히도 고방에는 중요한 물건이 없었지만, 범강림이 소보아를 위해 만들던 대나무 집과 거죽들, 그리고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대나무 집.
황씨가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일렁이는 불길에 비친 범강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진호가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수군거리고 있던 두 시녀는 깜짝 놀라며, 내의만 입은 채로 소매를 걷어붙인 진호를 쳐다보았다.
“공자님.”
시녀들이 서둘러 예를 표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냐?”
진호가 물었다.
“공자님, 저쪽 거리에 불이 났대요.”
시녀가 대답했다.
“불길이 우리 집까지 번질 정도더냐?”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묻자, 시녀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들 그러고 있어?”
진호의 물음에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공자님, 그게, 정 낭자 댁에 불이 났습니다.”
진호가 흠칫 놀랐다가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진씨 저택과 정씨 저택은 정반대인 동쪽과 서쪽 거리에 있어서, 아무리 목을 빼고 본다 한들 보일 리 없었다.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순찰을 돌던 병사들이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간 덕에, 불길은 금세 잡혔대요. 다친 사람은 없고, 그냥 집이 조금 탔다고 들었어요.”
시녀의 말에 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진호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기네 사람들이 아직 덜 죽었다고 생각하나 보군. 더 빨리 죽여 달라고 이리 애원을 하다니.”
지금 누굴 말씀하시는 거지?
시녀들이 의아해하던 사이, 진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깊은 밤인데도, 진호의 방 안은 등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방바닥에는 온갖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진호가 바닥에 놓여 있던 단도 한 자루를 집어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등불에 비친 단도에 서늘한 빛이 반짝였다.
“아니지.”
진호가 멈칫하고는 허리를 펴고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칼을 쓸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아니야.”
진호가 혼잣말을 하면서 다시 단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진호는 무기들을 한번 쭉 훑어보고 단창을 집어 들었다.
“지금 이 정도 거리라면 이걸 써야지.”
진호가 또 허공을 향해 무언가 찌르는 시늉을 했다.
눈앞에 빗속의 여인이 스치자, 진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화살을 쏘고, 장창과 호두창(虎頭槍)을 날려서 가장 앞선 놈을 찔러 죽였다.
빗속의 여인은 단창을 채찍 삼아 말에 박차를 가하고, 끝이 날카로운 장창으로 앞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의 목을 베어 말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대나무와 강철을 엮어 만든 채찍을 휘둘러 상대를 근거리로 끌어온 뒤 도끼로 머리와 심장을 쪼갰고, 양쪽으로 삼지창이 달린 탁천차(托天叉)와 눈썹 높이의 나무 봉인 제미곤(齊眉棍)을 각각 한 손에 들고 순식간에 빈틈을 찾아내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환한 방 안, 진호가 날렵하게 무기를 휘두르면서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에 쥔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등불을 흔들리게 했다. 벽과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쉼 없이 움직였다.
같은 시간, 아직 잠들지 못한 사람은 여럿이었다.
황궁 안, 태후의 침궁에서 연이어 큰소리가 들려왔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태후가 휘장을 홱 젖히며 호통쳤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궁녀가 서둘러 이마를 땅에 찧었다.
“잠을 자라는 게냐, 자지 말라는 게냐? 시중 하나도 제대로 들 줄 몰라?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태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밖에 서 있던 상궁과 내시들이 서둘러 후전에 있는 태자의 처소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사람들이 몰려오자, 후전에 있던 내시들이 불안에 떨며 예를 올렸다.
“연유는 모르겠으나, 태자 전하께서 잠을 주무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태후의 상궁과 내시들이 전각 안을 들여다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밤바람이 코를 찌르는 악취를 고스란히 문가로 전달했다.
태자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니, 아무리 자주 옷을 갈아입혀 주어도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궁과 내시들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태후마마께서는 정사를 돌보느라 고단하시네.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겐가? 자네들이 전하를 잘 보필해야 태후마마께서 편히 주무시지!”
내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태자의 내시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계속 시끄럽게 해서 태후마마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바로 목숨이 달아날 것이야.”
상궁이 경고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내시들은 태후의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태자의 궁 안에서 또다시 괴이한 소리가 들려오자, 내시들이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태자는 침상에 밧줄로 손발이 묶인 채 천장을 보며 악을 쓰고 있었다.
“정말 성가셔 죽겠네. 도대체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왜 날이 가면 갈수록 잠을 거부하시느냔 말입니다!”
내시가 고개를 저으며 윽박질렀다.
“일단 입부터 막자고.”
다른 내시가 재빨리 방법을 생각해 냈지만, 다른 내시들이 곧바로 그를 제지했다.
“태의가 말했지 않은가. 태자가 너무 뚱뚱하다 보니 입을 막아버리면 숨을 제대로 못 쉬어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나?”
내시들이 방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럼 여인들을 다시 불러오게. 몸에 있는 화를 좀 내보내면, 조용해지시겠지.”
한 내시가 태자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시가 곁방에서 자고 있던 여인을 불러왔다. 여인은 내키지 않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전하께서 요 며칠 힘드십니다. 한 번 하면 끝나 버린다고요.”
내시들 앞인지라, 여인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하품을 해대며 말했다.
“다 제가 움직여야 하는 거라지만, 전하께서 그걸 세우기라도 하셔야지요.”
내시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거야 쉽지. 보약 한 그릇 더 들이켜시면 될 일 아닌가.”
여인이 눈을 흘겼다.
“공공들이 드시고 싶은 건 아니고요?”
여인이 웃음기 서린 눈으로 말했다.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시시덕거리며 떠드는 사이, 얼마 안 가 다른 내시가 보약을 들고 들어왔다.
밤이 더욱 깊어질 때쯤, 태후의 침전 밖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내시가 손을 비비며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태자의 괴성이 들리지 않자, 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모르겠군.”
달이 지고 해가 뜨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범강림의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도 오후 경에는 청원 역참으로 전해졌다.
반근과 소심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진안 군왕도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되겠어요. 우리 경성으로 돌아갑시다. 복수를 하든 뭘 하든, 하려던 대로 해야겠어요. 고씨 가문은 이미 미쳤습니다. 당신도 말했잖아요. 미친 사람과 내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요.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정사낭에게 일어났던 비극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돼.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지금은 아직 돌아갈 수 없어요.”
“정방,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경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들이 나를 죽이고 싶다고 해도, 저들 뜻대로 쉽게 죽이지는 못할 거예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당신이 걱정되어서가 아니에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요. 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할 거예요. 큰 오라버니 내외가 소보아를 데리고 군감사로 거처를 옮겼거든요. 고씨 가문이 아무리 미쳐 날뛴다고 해도, 군감사에 불을 지르고 살인을 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영원히 숨어 살 수는 없잖아요. 그들 내외를 경성 밖 안전한 곳으로 먼저 보내 놨어야 하는 건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경성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이었다면, 진안 군왕도 지금에서야 경성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범강림 내외는 비록 진안 군왕과 같은 종친 신분이 아니었지만, 정교랑의 가족이었다. 따라서 정교랑이 경성에 있는 한, 그들 역시 어딘가를 자유롭게 오가는 건 힘들었다.
진안 군왕이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멀리 가면 갈수록, 그들은 안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정교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폭죽이 도착했습니다.”
문밖에서 내시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활짝 웃고는 정교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나랑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요.”
“불꽃놀이요?”
정교랑이 물었다.
“모레가 태자의 국혼일이에요. 경성에서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서 불꽃놀이로 축하해 주려고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손을 잡자,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을 잡아끌었다.
문이 열리자, 병사들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누굽니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딜 아무렇게나 쳐들어······.”
하인들이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장수가 허리춤에서 명패를 흔들었다.
“군감사에서 나왔다.”
하인들이 흠칫 놀랐다.
“분실된 무기를 찾아오라는 명을 받았다. 군감사 소속의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가택 수사에 응해야 한다. 이 일은 범 군감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다.”
장수의 말에, 하인들은 더는 막아서지 못하고 길을 비켰다.
“한 곳도 빠짐없이 꼼꼼히 조사해라. 우리 사람이라고 대충대충 하지 말고. 우리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범 군감의 결백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을 테니.”
장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병졸들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일사불란하게 마당 안으로 흩어졌다.
“이곳은 어떻게 된 것이냐?”
새카맣게 탄 후원의 담벼락과 다 허물어진 고방을 본 장수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정말로 증거를 인멸하려 했던 건가? 흔적조차 남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