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732
교랑의경 732화
진단랑이 고개를 저었다.
“숙모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미 밥을 먹고 왔어요. 저는 조부님을 뵈러 온 거예요.”
진단랑이 손에 쥔 장궁을 흔들면서 말했다. 진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겉옷을 챙겨 문가로 다가갔다.
“단랑, 참 기특하구나. 하루도 빠짐없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말이야.”
진 노태야가 칭찬하자, 진단랑이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요.”
“옆 마을에 노장이 한 명 살고 있대서, 사람을 시켜 네게 활쏘기를 가르쳐 주십사 부탁해 두었다.”
“우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조부님.”
진 노태야와 진단랑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지자,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 사부인의 딸이 입을 열었다.
“진단랑은 하나도 변한 게 없네요.”
진 사부인이 고개를 돌려보자, 딸들이 일제히 문밖을 내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단랑이 저렇게 잘 지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곧 태자비가 될 아이였는데, 그리 엄청난 변고가 생기다니.
갑자기 닥친 큰일에 집안의 다른 몇몇 여인들은 목을 매달고 자결하기도 했어. 그런데 정작 이 일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인 진단랑은 모든 걸 받아들인 듯 담담한 모습이야. 끼니도 거르지 않고, 예전처럼 쾌활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야.
“속상한 것을 꼭 남에게 보여줘야 속상한 게 아니잖아.”
진 사부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도 억지로 웃는 건 티가 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단랑의 모습을 보면, 정말로 괜찮아 보여요.”
딸들이 대꾸했다.
“정말로 괜찮을 리가 있나. 일생이 망가져 버렸는데.”
진 사부인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길이 끊긴 건, 비단 단랑뿐만이 아니야. 진씨 가문의 자제들이라면 모두, 심지어 내 아들딸들의 앞길도 영영 막혀 버렸지. 황후마마께서 좋은 뜻으로 우리를 챙겨 주신다고 해도, 인생이라는 게 꼭 배불리 먹고 자는 것만이 다는 아니잖아.
어디 자식들뿐인가. 후손은 또 어떻고.
진씨 가문의 후손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 사부인은 더욱 슬퍼졌다.
아들딸의 혼삿길이 다 막혔으니, 이제 진씨 가문에 후손은 없겠지.
슬픔에 잠긴 진 사부인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리던 찰나, 문밖에서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했다.
“여기가 진 사노야 댁입니까?”
깜짝 놀란 진 사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두 사내와 두 여인이 진 사부인을 향해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저희는 태주(泰州) 유(劉)씨 가문에서 온 사람입니다.”
태주 유씨?
진 사부인이 놀란 모습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태주 유씨가 어느 집안이지? 왜 우리를 찾아온 거야?
“다름이 아니라, 댁의 진십육 공자에게 혼담을 넣으러 왔습니다.”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혼담이라니!
진 사부인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길 가는 행인조차 우리 진씨 가문을 피해 가려고들 하는데, 먼저 우리 집에 찾아와 혼담을 넣는다고?
게다가 옷차림과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결코 보통 집안의 사람들 같진 않은데.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태주 유씨?”
산에서 불려온 진 사노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태주 유씨라면 무장 집안이오. 지금 태주로의 수비를 담당하는 유년춘(劉年春)이 바로 그 가문의 사람이지.”
진 사노야의 말에 진 사부인이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꽤 괜찮은 가문이네요.”
태주 유씨 가문은 나름대로 좋은 가문이었다. 진소가 생전에 있을 때였다면 진소의 자녀에게 혼담을 넣을 정도는 아니지만, 진 사노야의 자녀들에게는 혼담을 넣을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 처지에서 태주 유씨 가문은 진 사노야 가족이 꿈에도 넘볼 수 없는 가문이었다.
“유씨 가문의 유규라는 사람의 딸이래요. 유규는 이번에 서북로의 도감(都監)이 된 사람이고요.”
진 사부인이 손에 쥔 명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 사노야가 깜짝 놀라 물었다.
“혹시, 그 사람 딸이 장님이라고 하오?”
진 사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벙어리라거나, 바보? 아니면, 품행에 무슨 문제가 있다든지?”
진 사노야가 연달아 묻자, 진 사부인이 실소를 터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 아니에요. 올해 열일곱이고, 문무에 재능이 출중하대요. 그 사람들이 그 낭자의 초상화도 가져왔어요.”
진 사부인이 옆에 놓인 두루마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초상화라고 다 믿을 건 못 되지.”
진 사노야가 말했다. 진 사부인이 그를 쳐다보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 대꾸했다.
“보아하니, 경성 범(范) 대가의 화풍이 느껴지던데요.”
진 사노야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범 대가!
범 대가라면, 미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유명한 화공인데.
정말 범 대가라면 아무나 모실 수 있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누구와 짜고 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 진십육과 혼담을 넣으려고 범 대가까지 초청해 초상화를 그렸다고?
물론 예전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은······.
“유씨 가문에서 온 사람들 말로는, 유 노야가 경성에서 우연히 십육낭과 마주쳤대요. 그때 십육낭이 마음에 들어서 혼담을 넣고 싶었는데, 그때는 유 노야가 신분이 낮았던지라 감히 우리 가문에 혼담을 넣을 수가 없었다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우리 십육낭한테 미련이 있던 차에, 십육낭이 퇴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서둘러 혼담을 넣으러 온 거라던데요?”
정, 정말 그렇게 된 거라고? 그런데 어째 잘 짜인 연극을 보는 느낌이지?
진 사노야가 경악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오.”
진 사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친께 여쭤보고 오리다.”
눈이 내린 겨울의 마을에는 지나다니는 행인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화살이 날아가자 나뭇가지 위에서 쉬고 있던 새들이 지저귀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진단랑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진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진 노태야는 진 사노야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단랑이 장난스럽게 혀를 날름거리고는 다시 활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조준하며 화살을 쏘았다.
진 노태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낭, 정말 이상한 일이긴 하구나.”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진 사노야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당장 가서 혼담을 거절하고 오겠습니다. 우리 대답을 들으려고 아랫마을에 묵으면서 기다리고 있다더라고요.”
“그래, 그럼 당장 가서 만나 봐야지. 하지만 이 혼담을 거절할 게 아니라, 수락해야 한다.”
진 노태야의 말에 진 사노야는 크게 놀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낭.”
진 노태야가 웃음기를 거두고 진 사노야를 불렀다. 진 노태야는 진지한 얼굴로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눈가에 스치는 감격을 숨기지는 못했다.
“앞으로 우리 진씨 가문의 앞날은 십육낭에게 달렸구나.”
이 혼사로 십육낭의 앞길이 트인다는 뜻인가?
하지만 역모의 대죄를 저지른 자의 후손이기에, 관리 가문과 사돈을 맺는다고 해도 진씨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을 텐데?
“사낭, 유규가 누구인지 아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태주 유······.”
진 노태야가 진 사노야의 말을 끊었다.
“당초 네 형이 생전에 있었을 때 말이다. 네 형이 고능준과 서북 군정을 놓고 다투게 된 계기인 서북 탈영병 사건을 기억하느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진 사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었던 것이 생각난 그는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 그 탈영병들이 바로 황후마마의 의형제였지요.”
진 사노야가 말했다.
“유규라는 자는 바로 황후마마의 의형제를 붙잡아 이 사건을 조정에 올렸던 사람이야.”
진 노태야가 말했다.
그 사람이, 유규라고?
진 사노야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유규라는 자는 바로, 무원산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목숨을 걸고 무원산 형제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 증인이었지.”
진 노태야가 이어서 말했다.
그럴 수가!
진 사노야가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유규라는 사람이 황, 황후마마와······.”
진 사노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지만,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다.
황후마마께서 의형제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그 의형제들과 관계가 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설마 이 일도······.
더는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진 노태야를 보자, 확신이 든 진 사노야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거로구나.
유씨 가문과 혼인을 맺는다는 것은, 단순히 처가의 도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황후마마의 든든한 지지까지 받는다는 뜻이지. 십육낭에게는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의 아들딸에게는 분명히 새로운 기회가 있을 거야.
황후마마께서 우리 진씨 가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신 거로구나!
역모죄를 저지른 셋째 형님네는 다시 재기하기 힘들겠지만, 진씨 가문에는 아직 우리 집안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진씨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겠어.
죄를 저지른 집안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잘 수 있게 해 주신 황후마마의 배려에 감사했는데, 진정한 배려는 바로 여기에 있었어!
진 사노야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왜, 왜 이렇게까지······.”
진 사노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후는 진씨 가문의 은인이기도 하고, 진 노태야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조정에서도 항상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진씨 가문을 도와 고능준과 대적했다. 그런데 진씨 가문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탈영병 때도 그렇고, 양자 입적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도 그렇고. 진씨 가문은 언제나 황후와 같은 편에 서지 않았다. 심지어 황후와 대립각을 세우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중에도 너의 셋째 형수 일가를 잘 챙기면 되느니라.”
진 노태야가 더는 말하지 않고 웃음 띤 얼굴로 단랑을 불렀다.
단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단랑이 장궁을 높이 들면서 외쳤다. 차디찬 바람에 피부가 튼 진단랑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저도 이제 과녁 중앙을 맞출 수 있어요!”
진 사노야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진단랑을 쳐다보다가 이내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육낭의 혼사는 금세 결정되었다. 중매인을 보내 신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고, 길일을 택해 신부 집안에 알린 다음 육례(六禮) 절차를 순조롭고 마쳤다. 두 번째 큰 눈이 내릴 무렵 신부가 가마를 타고 진씨 가문에 들어왔다.
친영 행렬이 둔보에 나타나자, 둔보 인근의 마을이 시끌벅적해졌다.
“어서 구경하러 가세! 진씨 가문에 신부가 들어왔다네.”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저었다.
“진씨 가문의 신부라면, 볼 게 뭐 있겠어. 어디서 몇 푼 쥐여 주고 사 온 가난한 신부겠지.”
“무슨 소리요. 돈이 엄청 많은 신부가 시집왔어. 혼수 행렬이 얼마나 긴지, 이 둔보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니까!”
둔보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고?
그럼 혼수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십만 관은 족히 넘는다던데?”
다른 사람이 외쳤다.
십만 관!
에구머니나! 미친 거 아니야?
세상에. 혼수를 십만 관이나 해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부 대인 댁에도 혼담을 넣을 수 있을 텐데, 누가 제 딸을 죄지은 관리 집안으로 시집보내?
사람들이 우르르 둔보 쪽으로 몰려갔다.
북과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붉은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혼례를 알리는 폭죽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하늘에는 오색찬란한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입을 떡 벌린 채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고개를 치켜들고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어머니, 저거 봐요. 정 언니, 아니, 경성에서 봤던 불꽃놀이랑 똑같은 거예요!”
진 사노야의 집 앞, 진단랑이 신이 나서 외쳤다.
그때 누군가가 진단랑과 진아리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면서 지나갔다.
“어이, 좀 비켜 봐요. 이따 새 신부가 들어오면 셋째 형님은 어디 가서 좀 숨어 있고요.”
두 사람을 밀친 아낙이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진아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어색하게 웃고는 진단랑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했다.
신부의 가마가 마당 안에 들어오고, 모두가 진 사노야의 거처로 들어가 마당 가득 놓인 혼수를 구경했다.
“단랑, 우리는 그만 돌아가자.”
진아리가 단랑의 손을 잡고 말하자, 진단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몸을 돌리던 찰나, 누군가가 진아리를 불렀다.
“셋째 형님, 어서 이리 와 봐요. 어서요.”
자신을 급하게 부르는 진 사부인을 본 진아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진 사부인은 다짜고짜 진아리의 소매를 붙잡고 사람들을 비집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란 기색으로 진아리 모녀를 쳐다보았다.
진아리를 끌고 들어온 진 사부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진아리 모녀를 혼수 앞으로 데리고 갔다.
“형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것 좀 보시라고요.”
진 사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