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97
교랑의경 97화
안에 있던 세 사람은 아리따운 시녀의 웃음에 영문을 몰랐다.
“공자님, 그런 거 아니에요. 저희는 사위를 들이려던 게 아니라고요.”
시녀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 말에 한원조는 안도하면서도 멋쩍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 두 사내를 노려봤다. 두 사내 역시 머쓱해서 서로 쳐다본 후 따라 웃었다.
“거 아쉽네. 난 또 도의의 결단을 내릴 기회가 온 줄 알았잖아.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고뇌의 선택 말일세.”
“그러게. 난 원조가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에게 가면 절교할 마음까지 먹었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무 자르듯 자르려고 했다고.”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던 시녀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퍼져나가면서 연말이라 한산하던 객잔에 생기가 돌았다.
“저 수재들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네.”
객잔 점원들이 궁금해했다. 곧 웃음소리가 그치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낭자의 윗전이 내게 도움을 청할 게 있다고?”
한원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한 후 전대를 내밀었다.
“어제 그 여인과 아이의 사정이 딱해서 약소하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런데 저희 윗전께서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출타하기 어려우시거든요. 공자님은 그 여인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공자님께서 대신 가시면 그 부인이 더 신뢰할 수 있기도 하고요.”
한원조는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협심이 뛰어난 분이군. 다만…….”
“공자님의 공부를 방해하게 된 건 정말 죄송해요.”
시녀가 말을 이어받아 송구한 뜻을 전하며 예를 올렸다. 한원조가 얼른 가볍게 답례했다.
“아니다. 글공부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원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일 함께 가지.”
“내일 이곳으로 공자님을 찾아올게요. 그 부인한테 다녀와서 저희 윗전께 전하면 마음을 놓으실 거예요.”
시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배웅을 나온 한원조는 두봉을 걸치고 두모까지 쓴 시녀가 눈보라 속으로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원조, 사기꾼은 아닐까?”
동료가 어딘지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사기꾼? 뭐 때문에 날 속여?”
한원조가 웃었다. 동료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한원조를 꼼꼼히 뜯어보며 말했다.
“욕정.”
한원조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절교하기 전에 서둘러 마차나 한 대 빌려 봐. 내일 자네들의 시종들 데려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겠어.”
마차도 빌리고 시종 예닐곱 명까지 수행하면 경성의 좀도둑쯤은 충분히 상대할 것이다. 하지만 대도라면…….
“우리 한씨가 숙주에서는 명문이지만 경성에서는 누가 신경 쓸 지위가 아니야. 작심하고 날 상대하려 드는 거라면, 내가 대응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섣불리 움직이느니 일단 지켜보는 게 나아.”
“의협심이 넘치는 자는 아둔하다던데, 누가 한 말인지 그 주둥이 다물어야겠네.”
동료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감탄했다.
시녀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각자 보따리를 안은 사환 둘이 따라왔다. 안으로 두어 걸음쯤 들어가자, 옆쪽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금가아, 장난치지 말랬지!”
시녀는 얼른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문을 열고 뛰어나오던 금가아는 히히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를 내던졌다.
시녀가 문을 열자 따뜻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퍼져 나오면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들리던 말소리가 멈췄다.
“반근이 왔구나.”
서무수가 웃으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을 뵈옵니다.”
시녀는 예를 올린 후, 안에 앉은 다른 사내들에게도 차례로 예를 표했다. 예를 마친 시녀는 사환에게서 보따리를 건네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사환이 물러가자 시녀가 문을 닫아 바깥의 한기를 막았다.
“반근 낭자, 너무 예의를 차리는 거 아니오? 우리가 어딜 봐서 도련님 소릴 들을 사람이냐고. 셋째 형님 말로는 예를 받는 게 낭자를 존중하는 일이라던데, 이 봉추는 그런 거 못 알아듣겠소이다.”
맨 끝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못 알아듣겠으면 잠자코 있어. 말 삼가고.”
한 사내가 목소리를 낮춰 호통을 쳤다. 다 합쳐도 몇 번 안 본 사이였기에 시녀는 한참 생각한 끝에야 그 사내가 맏형 범강림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새해가 코앞이라 옷을 지을 시간이 없다며 아씨께서 이미 만들어 놓은 옷을 사 오라고 하셨어요.”
시녀가 보따리를 내밀며 말했다. 사내들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누이한테 새 옷까지 지어 달라고 할 순 없지.”
서무수가 말했다. 조용히 앉아 듣기만 하던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집에 있는 여인들이 하는 게, 이런 일이잖아요. 내가 직접 지은 건 아니지만요. 요령 좀 피운 셈 치죠.”
범강림이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몸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어서 가서 입어 보세요. 안 맞으면 옷집 가서 수선하게요.”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새해라고 새 옷 입어 보는 게 얼마만이야.”
서봉추는 입을 못 다물고 싱글벙글 웃으며 보따리를 안고 가장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앞장서는 사람이 생기자 다른 사내들도 어려운 마음을 내려놓은 듯했다.
“이참에 목욕 좀 해야겠네. 새 옷에 냄새 배면 안 되잖아.”
“냄새나는 건 넷째 너지. 난 어제 씻었다고.”
“셋째 형님, 그 수염도 좀 정리하시오.”
“오라버니들 나가 봐요. 다들 정리 마치면 같이 밥 먹어요.”
“그럼 부탁 좀 할게, 누이.”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가 대답했다. 서무수에 이어 다른 형제들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정교랑이 간단히 답례하자 다들 웃으며 일어나 나갔다.
방 안에는 시끌벅적했던 여운과 함께 사내들 특유의 냄새만이 남았다. 시녀는 우선 정교랑에게 물을 올리고, 정교랑이 조용히 글씨 연습을 하도록 책을 한동안 읽어 준 후에야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씨, 한 공자가 수락했어요. 내일 저랑 같이 가겠대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왜 저한테 의원을 데려가라고 하세요? 그냥 아씨께서…….”
시녀가 망설이며 물었다. 아씨도 병을 볼 줄 아는데, 같이 안 가고 굳이 다른 의원을 데려가라니?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치료할 정도 아니야.”
신분이 천하여 자격이 안 된단 뜻인가? 추측해 보던 시녀는 얼른 생각을 털어 버렸다. 시녀는 윗전의 생각을 넘겨짚는 일이 없었다. 방금 질문을 던진 것도 이미 주제넘은 일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던 시녀가 돌연 입을 가리고 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 아까 한 공자가 정말 웃겼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시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아씨는 남의 일에 대해 먼저 묻는 일이 드문데, 역시 한 공자는 아씨와 아는 사이인가 보구나. 시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글쎄, 우리가 혼담을 넣으러 간 줄 알더라고요. 아주 점잖고 간곡한 말로 거절했어요.”
정교랑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왜 그런 생각을?”
“그리 생각할 만도 하죠. 경성에 그런 풍속이 있거든요. 과거 시험이 있는 해면 권세가와 부잣집에서 과거 급제자 중에서 사윗감을 고르곤 해요. 지금 비각 교리로 있는 왕위정 대인을 놓고 두 권세가 사이에 싸움이 붙어 소송이 어전까지 올라간 일도 있어요.”
“경성 풍속이, 재미있네.”
정교랑은 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음을 드러냈다.
“다른 곳은 경성처럼 경쟁이 치열하진 않아요. 그래도 훌륭한 사내라면 어디서든 혼사를 맺으려는 사람이 많기 마련이죠.”
시녀가 웃으며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공자께서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시녀는 못 참고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고 있는데 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내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
밖에서 서무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가 얼른 웃으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셋째 도련님, 벌써…….”
고개를 들던 시녀는 갑자기 멍해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정교랑도 소리를 듣고 쳐다보다가 움직이며 연습하던 손가락을 멈췄다.
밖에 선 사내는 청색의 새 솜옷을 입고 서 있었다. 키는 훤칠하고 신체 건장하여 깔끔한 행색이었다. 방금 씻은 얼굴은 촉촉했고 진한 눈썹에 눈은 부리부리했으며 이마는 넓었다. 피부색이 좀 거칠긴 했으나 준수한 외모를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딱 맞네요. 안 고쳐도 되겠어요.”
사내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내는 어색한지 짧은 수염만 남은 턱을 쓰다듬었다. 말을 잃은 채로 빤히 쳐다보는 두 여인의 눈빛에 사내는 더욱 어색해했다.
“셋째 도련님?”
정신을 차린 시녀가 놀라 소리쳤다. 서무수는 고개를 들어 시녀를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옷을 쳐다봤다.
“안 맞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셋째 도련님!”
이번에는 시녀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
“수염 깎으니까 못 알아보겠어요!”
서무수도 수염을 깎은 게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아서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이따금 옷깃을 털었다. 시녀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새 옷은 새해 첫날 입어야겠어. 괜히 주름지겠다.”
시녀가 얼른 일어나 문을 열어 줬다.
“셋째 도련님, 옷이 정말 몸에 딱 맞춘 것 같아요.”
“네가 잘 골라서 그렇지.”
서무수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아씨,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도련님들 전부 딴사람이 되겠는데요?”
시녀는 웃으며 장난기 어린 눈길로 문밖을 쳐다봤다. 아쉽게도 새 옷을 입고 누이를 보러 온 다른 사내들에겐 딱히 달라진 모습이 없었다. 더 우스꽝스럽게 바뀐 이는 있었지만.
“좀 작네.”
“재 봤는데 이게 제일 큰 거였어.”
“여섯째 도련님, 소인이 기억했다가 바꿔 드릴게요.”
“내가 같이 가는 게 좋겠어. 괜히 잘못 고치면 옷만 못쓰게 되잖아.”
이쪽에서 웃고 떠드는 사이, 벌써 전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서무수는 한결 자연스러워진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새해맞이라니, 이런 데 마음 안 써도 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가아가 뛰어 들어왔다.
“아씨, 진 상공 댁에서 새해 선물을 보내 왔어요.”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일어섰다.
“진 상공? 진 상공이 누구지?”
다른 사내들은 몰랐지만 서무수는 알았다. 상공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누이, 자리를 비켜 줄게.”
서무수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내 오라버니라면서, 이 누이더러 손님을 맞으란 거예요?”
안에 있던 사내들은 그 말에 더욱 당황했다. 서무수는 정교랑을 보며 심호흡을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
서무수가 범강림을 쳐다봤다.
“우리가 손님을 맞이합시다.”
범강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의복을 정돈하고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기, 나, 새 옷으로 도로 갈아입을까?”
뒤에 있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마당에서는 진씨 가문 집사가 사환들을 시켜 마차의 짐을 내리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집사는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예를 올렸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낯선 사내들만 보일 뿐이었다.
“범강림이 누이를 대신해 감사드리오.”
범강림이 맏형으로서 공수의 예를 표하며 먼저 나섰다. 진씨 가문 집사는 기민하게 반응하며 얼른 예를 올렸다. 금가아의 납치에 관한 오해는 암암리에 소문이 퍼진 상태였는데, 이제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사내들은 정 아씨와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오누이로 칭하는 사이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