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16
115장. 매력만 넘치는 남자
“뭐야? 개강 첫날부터 술이야?”
남 말할 것 하나 없는 친구가 보였다.
“현수, 너는?”
“흐흐흐. 동기랑 술 마시러 왔지~.”
고등학교 동창 강현수다.
자식, 동기들끼리 술이나 마실 것이지!
나쁜 놈이다.
인생 저주 수첩에 확실히 기록해 놨다.
“어! 태산 씨!”
어라? 이 분은 또 누구야!
“저 기억나죠? 아유라예요.”
경영학과 신입생들 중에 한 미모 자랑하던 아유라도 아는 체를 했다.
김중배 다이아몬드를 따라 여인을 배신하던 줄리엣이다.
“두 분만 마셔요?”
강현수와 아유라.
너희도 둘뿐이잖아!
“태산 씨……, 누구?”
마법에서 깨어난 손유리가 둘을 보고 물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경영대 신입생인 강현수, 그리고 같은 과 아유라 양이랍니다.”
분위기 텄다.
손유리가 경계 모드를 작동시켰다.
“태산아, 선배셔?”
현수가 손유리를 보고 선배 아니냐고 물었다.
신입생이라고 하기에는 손유리는 원숙했다.
“미대 서양화과 06학번 손유리입니다.”
손유리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아~ 미대 선배님이시구나.”
강현수 대학물 먹더니 연기가 많이 늘었다.
언제 봤다고 미대 선배님이라고 잘도 말한다.
“우리 합석해도 돼요? 선배님?”
아유라가 언제 봤다고 선배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굴었다.
뭐지? 갑자기 이 분위기는?
손유리가 날 봤다.
“태산아. 너 때문에 경영학과 오리엔테이션 지옥 된 거 모르지?”
법학과와 달리 2박 3일로 오리엔테이션이 잡혀 있던 경영학과다.
당연히 지옥인지 천국인지 관심 밖이다.
“태산 씨 08학번 동기니까 우리 말 놓자. 노땅들도 아니고.”
벌써 말 놓고 아유라가 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행동이 아주 자연스럽다.
그렇게 우리는 갑작스럽게 2대 2로 술을 마시게 됐다.
“태산아, 막걸리 니가 마셨냐?”
딱 보면 모르냐! 이 원수 같은 친구 놈아!
저 자식도 고3 때 지갑 털어먹던 놈인데 은혜를 발로 차버렸다.
“지금 밖에 비 오는데 딱이네!”
아유라 니가 막걸리 맛을 알아?
경영학과 08학번들은 참 넉살도 좋다.
“다들 한잔해요.”
손유리가 활짝 웃으며 옆에 포개 있던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진한 아쉬움.
‘너희 둘 용서치 않겠다!’
불구대천지원수라는 게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그냥 마시면 재미없겠지?”
“???”
모두 나를 봤다.
아무런 의심도 못 한 순진한 양들.
“술 하면 게임이잖아~.”
“아!”
손유리 표정이 순간 뻥졌다.
“게임 좋아!”
아유라는 손뼉을 쳤다.
“흐흐. 태산아 우리 경영학과를 몰라서 그러나 본데 덤벼!”
현수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래? 그 도전 받아주마.”
한 번의 대학 생활과 사회생활을 경험해 봤던 나다.
감히 이제 초짜 2008년 버전이 뭣도 모르고 도전해왔다.
머릿속에 2020년 술 게임 버전이 다 들어 있다.
결론은 하나.
처절한 응징뿐이다!
“가볍게 몸풀기로 배스킨라빈스 31부터 시작한다.”
“배, 배스킨라빈스 31? 그게 뭐야? 3, 6, 9 버전이야?”
현수가 당황했다.
세상에 조선시대 유행하던 3, 6, 9라니!
“새로운 게임이야?”
아유라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 게임은 말이야…….”
친절하게 게임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바로 게임에 돌입했다.
인생은 언제나 실전의 연속이란 걸…….
똑똑하게 가르쳐 줄 생각이다.
오늘 내 분위기를 깨트린 죄!
목숨을 각오해야만 살아날 것이다.
흐흐흐.
***
“으으…….”
손유리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두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몽롱한 정신이 서서히 차려졌다.
과거에 맡아봤던 익숙한 향기가 맡아졌다.
포근한 이불의 느낌이 좋았다.
엄마가 새로 이불을…….
“!!!”
손유리는 눈을 번쩍 떴다.
이틀 전 부모님은 부부동반으로 친구들과 유럽에 놀러 갔다.
일하는 아줌마는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 여기는…….”
한 번 와봤다고 친숙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불과 얼마 전에 신세를 졌던 그 방!
“나 어제……, 헛!”
손유리는 어제 기억을 주섬주섬 담다 비명을 터트렸다.
손으로 입을 급히 막았다.
그 남자의 방에서 또 깨어났다.
예전처럼 똑같이 옷은 그대로였다.
‘얼마나 마신 거야?’
장태산이 신선한 술 게임을 제안했다.
설명이 어렵지 않았다.
미대 2학년 때까지 술 마실 일이 많아 손유리도 신입생처럼 들떴다.
하지만 의외로 게임이 어려웠다.
눈치, 훈민정음, 이순신, 이미지, 만두 같은 들어보지도 못한 술 게임이 휘몰아쳤다.
똑똑한 경영대 신입생들이 연달아 술을 마셨다.
바짝 긴장했지만 손유리도 연속 걸렸다.
얄미울 정도로 장태산은 피해갔다.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는 사태가 벌어졌다.
손유리는 오기가 발동됐다.
장태산을 향해 보내는 아유라의 눈빛에 승부욕을 불태웠다.
딱 봐도 장태산에게 관심 있어 보였다.
장태산이 친구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앙큼한 아유라가 여친 아니면 물러나달라고 말했다.
신입생이라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술이 살짝 들어간 손유리는 싫다고 거절했다.
그때부터 아유라와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게임을 빙자해 둘이 공격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손유리는 승리했다.
도전하던 경영학과 신입생은 어느새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꿋꿋하게 버텼다.
아유라의 집에서 기사가 와 그녀를 데리고 갔다.
장태산의 친구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자취방에 가겠다고 사라졌다.
그 순간…….
“나 또 필름 끊긴 거야? 하아…….”
손유리는 부끄러움에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떻게 장태산 얼굴을 봐야 할지 몰랐다.
이 정도면 상습범 범주에 들어갔다.
외간 남자 방을 두 번이나 차지했다.
누가 보면 빼도 박도 못 할 문란한 여성의 표본이다.
“다 태산 씨 잘못이야. 술 게임은 어디서 그렇게 배워가지고!”
손유리는 애써 장태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가했던 방학 기간이 아니다.
오후에 강의가 풀로 잡혔다.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하고 머리까지 감았다.
드라이어로 머리칼 말리고 가방에서 꺼낸 스킨에 로션까지 바르고 거실로 나왔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인내로 버텼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리고 어제 분위기가 묘했다.
경영학과 신입생들이 오기 전까지 장태산은 뜨거운 신호를 보냈다.
손유리도 그 유혹에 취해 마음이 달아올랐다.
“하아아아.”
뭔지 모를 아쉬움의 한숨을 손유리를 길게 뱉었다.
디딩 띵띵 딩~♫. 띠디디딩~♬.
그때 거실에서 갑자기 라이브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라흐마니노프?”
손유리는 과거에 피아노를 배웠다.
강남에 살면서 초등학교까지 개인 레슨을 받았다.
그때 알게 된 세계적인 피아노 거장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그의 작품 중 피아노 소나타 2번 Bb단조 36번은 명곡으로 불렸다.
감미로운 서정성의 대가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였다.
띠리 띠링 띠리리리리리 띠링~♬♬.
훑어 내리는 듯한 1악장 도입부가 강한 인상으로 시작됐다.
음계 폭발이 사방에서 포박했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빠르게 전환되다가 어느새 부드럽게 넘어갔다.
손유리는 이끌리듯 거실로 나왔다.
그 남자의 등이 보였다.
처음 보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그가 앉아 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강과 햇살이 눈부시게 조명처럼 빛났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천상의 멜로디가 귓가에 들렸다.
쉬지 않고 건반을 두드리는 열정적인 장태산.
이별에 슬퍼하는 연인의 노래 같은 2악장.
손유리는 멍하니 음률에 빠져들었다.
실로 대단한 연주 솜씨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독주곡은 그 감정의 기복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세계적 피아노 연주자들의 손에 의해 수시로 음반이 발간됐다.
띠리리리리 띵! 띵띵띵! 띵띵띵띵~♩.
2악장 중반은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다.
장태산의 손이 거칠고 빠르면서도 정확하게 건반을 두들겼다.
정확한 해석과 연주 솜씨다.
음 이탈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이 3악장으로 넘어갔다.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2악장이 피날레처럼 휘몰아쳤다.
그러나 어느새 다시 부드럽게 변했다.
변화무쌍한 감정이 그대로 아낌없이 드러나는 3악장.
띠리리리리리 띵~♪♬.
절제보다는 폭발을 추구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독주곡.
소리와 힘이 압도적이지만 감미로움의 극치였다.
이율배반적인 그 선율에 손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세계적 피아니스트 수준의 솜씨다.
술에 취해 깨어난 아침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게 머리가 개였다.
놀랍게도 장태산의 피아노 소리는 정신을 맑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온몸의 피가 정화되는 듯한 그런 힘이 담겼다.
띵~♪.
어느새 마지막 건반음이 들렸다.
“아!”
손유리는 아쉬움의 탄성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귀가 호강했다.
그랜드 피아노와 어울리는 천장이 높은 거실은 음질을 극대화시켰다.
거기에 대단한 연주가의 솜씨는 손유리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른 아침의 멋진 선물이었다.
“배고프죠?”
“네?”
어느새 장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왜 이 남자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될까?’
미대 동기들에게 얼음 마녀라고도 불리는 손유리다.
그런데 장태산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늘은 칼칼한 육개장 어때요?”
“육개장요?”
육개장 소리에 손유리는 침이 꼴딱 넘어갔다.
매칼한 육개장 한 그릇 마시면 속이 확 진정될 것 같았다.
그제야 손유리는 코로 파고드는 매칼한 냄새가 맡아졌다.
냄새만으로도 환상이었다.
“앉아요.”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쳤던 남자가 이제는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느새 밑반찬 몇 개가 깔려 있었다.
손유리가 아는 상식에 저런 남자는 세상에 없다.
순정만화에나 등장하는 남주 캐릭터의 현실 버전이다.
손유리는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어디로 보나 매력만 넘치는 저 남자.
오늘도 남자의 집에서 맞이하는 이 아침이 새삼 부끄러웠다.
“어!”
손유리는 식탁으로 향하다 한쪽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화판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없던 여러 종류의 화판이다.
손유리는 화판 곁으로 다가갔다.
넓은 거실 한쪽에 이젤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젤 위에는…….
“고갱?”
# 116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