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61
160장. MoMA (2)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미녀다.
검정 정장 상하의를 깔끔하게 입고 서 있다.
미녀의 기본 조건처럼 보이는 오뚝한 콧날은 매력적이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금발 미녀는 분명 나에게 말을 걸었다.
“죽음을 상상하던 고흐의 주관적인 내적 표현이 그대로 작품에 투영됐어요. 사람들은 이 그림이 절대 몽환을 표현한 거라고 말하지만 전…… 구원 받고 싶은 영혼의 몸부림처럼 보여요. 그래서 자살을 감행했는지도 모르죠.”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여인은 속삭이듯 말했다.
상당히 깊이 있는 감상평이다.
고흐의 기억을 알고 있는 난 금발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고흐는 이때부터 자살을 꿈꿨다.
자살이 삶의 마지막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별이 제목으로 제격이었다.
“틀렸습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네?”
그제야 미녀가 고개를 돌려 날 봤다.
맑고 고운 피부가 눈에 환하게 들어왔다.
기미나 주근깨 색소침반으로 인한 잡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키도 얼추 175센티미터 정도는 됐다.
이런…… 완소 미녀 같으니라고!
금발의 단발이 깻잎머리를 연출한 듯 단정하게 뒤로 묶였다.
국산 깻잎 헤어스타일과 차이가 컸다.
보기에 좋았다.
시원하게 드러난 백옥 같은 이마와 두툼한 붉은 입술, 연푸른 눈동자는 매력덩어리 그 자체다.
패션잡지 보그 표지에서 금방 나온 것 같다.
특히 분위기가 고급지다.
“고흐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자살 또한 고흐에게는 하나의 영감이었을 뿐입니다. 구원 받고 싶어 몸부림쳤지만 그건 창작자라면 누구나 겪는 정신적 혼란에 불과했죠. 다른 말로는 광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흐는 자살했어요. 그래서 죽음을 가까이 그려낼 수 있었답니다. 고흐의 작품은 그의 자살로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여자 지금 뭐라니?
안 죽어봤으니 저런 말도 가능한 거다.
“자살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아우! 내가 직접 고흐에게 들었다니까!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물어봤단 말이다.
왜 자살했냐고?
고흐는 말했다.
어떤 미친놈이 그런 헛소리를 하느냐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릴 당시 고흐는 길에서 두 소년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술을 얼큰히 마신 고흐에게 정신병자라 소리치며 총을 쐈단다.
동네에서 내놨던 미친 아저씨가 고흐였다.
아이들에게는 평소 술주정하던 미친 아저씨였던 거다.
안타까운 대가의 마지막이 아닐 수 없었다.
심장에 총을 맞고도 2킬로미터나 떨어진 하숙집까지 걸어왔고 30시간이나 지난 뒤 임종했다고 말했다.
목격자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주정뱅이 고흐의 편을 들지 않았다.
물론 고흐도 소년들의 앞날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
그 결과 고흐는 악의 카르마 포인트가 많아도 신이 될 수 있었다.
내 귀로 직접 들었던 얘기인 만큼 확신에 찬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고흐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합니다. 지금도 그림만 그립니다. 붕대를 감은 채 자신의 별들을 수놓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자살이라니요…… 고흐가 슬퍼할 겁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내 말을 듣고 있으려니 미친놈 같겠지.
썩어서 먼지가 되고도 남았을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니.
그런 말을 하는 내가 제정신으로 보이겠나.
게다가 누구나 아는 고흐의 자살을 두고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여자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며 자존감이 떨어지긴 했지만 자살을 할 정도로 정신줄을 놓았던 것은 아닙니다. 똘끼로 가끔 빡 돌긴 했지만 정신력은 대단했습니다. 귀는 신들의 헛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고흐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책이었고 그 상처입니다.”
“……그게 무슨.”
금발 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이런 감춰진 야사는 처음 들어볼 거다.
동양적 미가 가미된 클라라와 달리 당당한 미국 금발 미녀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몸매가…… 참 꾸밈없이 정직하다.
회사원이 분명했다.
뉴요커의 패션 감각으로 당당함을 물씬 풍긴다.
하긴 월가에서 근무하는 이들의 보통 연봉이 10만 달러다.
“그럼.”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오늘은 미녀보다 그림이 먼저다.
신선들의 살아생전 작품들은 신계 작품들과 느낌이 달랐다.
신계 영향을 받은 신계 그림들은 욕망의 물이 많이 빠졌다.
욕망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생명 원천이다.
애욕, 명예욕, 물욕이 없다면 세상은 돌아가지 않았다.
태극의 원리처럼 욕망과 절제가 뒤섞여야 운명의 판이 돌아간다.
다들 예수나 석가, 알라처럼 성인이 된다면 생존의 의미가 없다.
“세잔 아저씨 작품도 좋지~.”
고흐 작품은 충분히 봤다.
발걸음을 옮겨 폴 세잔의 작품으로 옮겼다.
신계에서 만났던 알바신들 작품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언제 윤회의 굴레에 떨어질까 싶어 신계에서 벌벌 떨던 신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곳 인간계에서는 그들 모두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오! 역시 세잔…… 어?”
《멱 감는 사람들》, 《저녁 무렵의 에스타크》, 사과 정물화, 소나무와 바위 같은 폴 세잔 신선 작품들은 역시 좋았다.
명화는 언제나 사람을 묘하게 감동시키는 맛이 있다.
그렇기에 무지 비쌌다.
폴 세잔의 작품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카타르 공주에게 2011년 2억5천만 달러에 팔린 것을 기억한다.
인터넷 뉴스에 역대 3위의 기록이라고 대서특필됐다.
같은 폴 씨 집안의 고갱 아저씨 작품보다 4천만 달러가 비쌌다.
그런데…….
뉴욕 현대 미술관에 소장된 폴 세잔의 그림들 중 한 작품 앞에서 난 멍청해졌다.
“뭐야? 이거 짝퉁이잖아!”
‘사토 누아르’는 폴 세잔 아재가 죽기 몇 년 전 혼신의 힘을 완성한 대작이다.
기력이 쇠한 만큼 어린 시절 놀았던 엑상프로방스에서 힘을 얻으려 했던 폴 세잔이었다.
당뇨병에 걸린 뒤 1900년대 이후 작품들 모두 걱정과 불안, 슬픔이 담겨 있는 게 특징이다.
‘연금술사가 살던 검은 성’이라 불리던 샤토 누아르는 그런 폴 세잔에게 완벽한 감정 이입 대상이 됐다.
음침한 전설과 자신의 삶이 동일시되면서 폴 세잔은 그곳에서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미술사에서도 당시 작품들 모두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그런데 젠장…… 짝퉁이라니!
“뉴욕 현대 미술관도 밥값을 못하네……. 다들 눈먼 장님들도 아니고. 쯧쯧.”
장소가 장소인 만큼 영어로 혀를 찼다.
감흥이 팍 깨졌다.
“뭐라고 하셨나요? 눈먼 장님요?”
금발 미녀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 쌍심지를 켰다.
뭐지? 지금 이 행동들은?
스토커도 아니고 나의 뒤에 붙는 의문의 여자였다.
“짝퉁을 짝퉁이라 말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분이시네요. 아무리 블랙 카드를 소지한 VIP라지만 더 이상 모욕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슴없이 블랙카드를 언급했다.
금발 미녀가 내 정체를 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MoMA의 큐레이터 사라 요한슨이라고 해요. 무례한 그 쪽은요?”
미술관 큐레이터라면 화가 날만 하다.
엄청난 고가 작품인 데다 구할 수도 없는 명작을 짝퉁이라 말했으니 자존심이 팍 상했을 것이다.
그래도 짝퉁은 짝퉁이다.
아무리 짝퉁을 완벽하게 모작했어도 진품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정식 제자는 아니지만 같이 신계 그림을 그렸던 동료로서 그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제가 이유까지 말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셔야 합니다. 지금 폴 세잔님의 작품에 대해 상당한 모욕적 언사를 행사하셨습니다. 동시에 본 미술관 직원들의 명예도 훼손하셨습니다!”
사라가 사고 친다.
불질 전문가 앞에서 지금 화를 낸다.
조용히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이러면 전면전이다.
“증명하면 이 싸구려 짝퉁 불태울 겁니까?”
“……망언을 인정 못하시겠다는 거예요!”
“큐레이터 분에게 묻겠습니다. 미술관에 짝퉁이 진품처럼 전시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가만있겠습니까? 그건 동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야?”
“폴 세잔 작품이 가짜래?”
“뭐? 진짜?”
“나도 모르겠는데 저 동양 청년이 큐레이터와 언성을 높여.”
사방이 웅성거린다.
본토인과 관광객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나도 책임 못 진다.
조용히 신 아재들 그림이나 보고 가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판이 화끈하게 벌어졌다.
“용서치 않겠습니다!”
금발 미녀가 손을 허리에 척 걸쳤다.
이 와중에도…… 저 자세 참 좋다.
“Me too!”
201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미투 운동과 비슷한 미투 사태가 여기서 벌어졌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무슨 일인가요?”
그때 중년의 넉넉하게 배 나온 미국 아재가 다가왔다.
웃고 있지만 얼굴 인상은 썩 편하지 않다.
“수석 큐레이터님 이분이…… 폴 세잔의 샤토 누아르 작품이 가품이라고 말도 안 되는…….”
“가품요?”
“네. 가품요!”
사라 큐레이터 성깔 있다.
뚝 떨어지는 검은 정장과 잘 어울렸다.
“고객님, 근거 없이 작품을 모욕하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동네도 협박질이 후지다.
“짝퉁을 보고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고다!
“흐음…… 그렇다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여기 폴 세잔 작가의 샤토 누아르는 다수의 미술감정가들의 진품 확인을 거친 작품들입니다.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이만 나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VIP 손님이십니다.”
사라가 조용히 수석 큐레이터에게 속삭였다.
“……실례했습니다.”
경찰 부르겠다는 수석 큐레이터가 당황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와아…… 블랙 카드 오졌다.
이게 바로 돈이 주는 힘이다.
“간단하게 진품이 아니라는 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다들 알다시피 세잔은 말년에 당뇨병에 걸렸습니다. 사토 누아르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명화 취급을 받지만 그건 세잔의 환경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머릿속에 세잔의 당시 처지가 그려졌다.
나만 아는 진실인 셈이다.
“멱 감는 사람이나 다른 작품 특징들과 달리 요양차 왔던 프로방스 작품들은 붓터치가 훨씬 거칠고 떨립니다. 그림들이 모두 다 명료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건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사라가 발끈하고 나섰다.
검은 고양이 사라.
“문제는 죽기 1년 전인 1905년에…… 세잔의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겁니다. 동시에 몸에 다른 병이 나타났습니다.”
세잔의 명예를 위해 돈이 떨어져 아파도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처지를 말하지 않았다.
약값이 많이 들어갔다.
곧 죽을 걸 알면서도 연명할 돈이 필요했다.
꿈꾸던 여행을 포기하고 찾아 들어간 무덤 자리가 프로방스다.
“다른 병이라뇨?”
수석 큐레이터가 물었다.
“수전증이 나타났습니다.”
“말도 안 돼요!”
사라가 또 다시 하이톤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이 작품이 짝퉁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억지예요!”
사라 양 일단 들어보고 얘기합시다!
“그 증거가 뭡니까?”
수석 큐레이터가 관심을 보였다.
“대단한 위조 작가의 작품이지만 그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한 번 말을 끊었다.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였다.
도대체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다.
완벽하게 무대가 세팅됐다.
“박자가 틀렸습니다.”
“???”
“무슨 헛소리야? 박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라와 수석 큐레이터가 어이없는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잘 보십시오. 과거 작품들과 연결해 살펴야 미세한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1903년 작품들부터 둘둘 셋으로 손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1905년 작품은 그게 더 심해집니다. 하지만 여기 짝퉁은 정확히 삼삼삼으로 붓칠이 됐습니다. 분위기는 흡사하게 뽑아냈지만 위조 작가는 너무 건강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짝퉁입니다!”
확언을 끝냈다.
“…….”
다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뭔 참신한 개소리냐는 표정들이다.
“어, 억지예요!”
사라가 강하게 부인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더 명확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수석 큐레이터도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그래? 그럼 보여줘야지. 그 증거!
“증거요? 그럼 제가 똑같이 그려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 161
회귀의 전설